빌립보서 강해 16/ 신앙의 모델 디모데/ 2015. 7.19
빌립보서 2:19-24
19.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강해 19번째 시간으로 신앙의 모델 디모데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나누겠습니다.
지난 시간부터 계속해서 우리의 신앙의 모델이 되는 세명의 인물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자신의 삶을 제물로 드렸던 바울에 대하여 살펴보았고 오늘은 디모데 그리고 다음 주일에는 에바브로디도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각자마다 다를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일지라도 누가 그 사람을 평가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또한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도 의견이 갈릴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평가기준은 자기중심에서 나옵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실력이 있는 사람과 무능한 사람, 믿을 만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등 그 기준은 자기중심성에서 나옵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선한사람, 나를 무시한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됩니다. 실력이 있고 없고는 내가 보고 경험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믿을만한가 그렇지 못한가도 나에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좌우됩니다. 그러나 나에게 선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악할 수 있고,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신뢰를 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경험한 것과 실제는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바울이 디모데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사람을 평가하였습니다. 그 결과 빌립보교회를 위하여 파송하는 사역자를 디모데로 선정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내용은 바울은 어떤 시각과 판단기준으로 디모데를 파송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살펴보면서 바울의 가치판단과 평가기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19절을 보니까 디모데를 파송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지금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온 소식들과 헌금을 받아들고 큰 감동과 위로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자신을 걱정하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의 형편이 어떠한지를 전하고 그들을 안심하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보내 자신의 사정을 알리고 또한 디모데 편으로 오는 성도들의 소식을 통해 안위를 얻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서 디모데를 선정한 이유를 몇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디모데는 뜻을 바울과 뜻을 같이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뜻을 같이 했다는 것은 바울과 한뜻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는 뜻이 하나되는 것, 한뜻을 품는 것에 대하여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1장 27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라고 말하면서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다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여기서 한마음과 한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2장 2절에 보면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람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여기도 마찬가지로 한뜻에 대하여 네가지 서로 다른 표현을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낼 사역자중에 가장 중요한 자격요건이 바로 바울과 한마음과 한뜻을 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뜻을 같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 까요? 만일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상대방의 뜻이 어떠하든 따르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뜻은 자기중심적이어서 악할 때가 많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뜻을 무조건 따르는 것은 위험할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뜻을 같다고 했을 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고 있는 바울의 뜻과 같이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보면서 그가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하나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처럼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조정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자격인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자인가? 아니면 자기의 뜻을 추구하는 자인가?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유익을 포기할 수 있는 자인가? 아니면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은 능력이 출중한 사람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뜻을 찾고 구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할 것입니다. 보냄을 받는 자는 보내는 자의 뜻을 가장 잘 성취해야 합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뜻이 같았고 그 뜻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같이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온전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거나, 신비적인 체험에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 전 교사로 일하시는 집사님께서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견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단지 교사로서의 일뿐만 아니라 학원복음화에 대한 사명을 가진 분이십니다. 학교일이 힘들지만 그 사명 때문에 그만두지 못하였습니다.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1개월 휴직을 하셨습니다. 집에 있어 보니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다니는 자녀들이 그렇게 좋아하고 남편 또한 가정이 안정되고 가족모두가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아 좋아했습니다. 또한 선생님도 어머니로서 아내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 때문에 다시 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편안한 가정을 떠나서 학교에서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가정에 충실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던 이유는 첫 번째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치의 우선순위중에 가정이 가장 상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명을 위해서 가정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명을 감당하려면 가정을 잘 돌보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감독의 자격, 집사의 자격중에 하나가 가정을 잘 다르시는 것입니다(딤전3:4,12). 딤전 3:5절에는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라고 말씀합니다. 즉 교회보다 가정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건강이 상하면서 까지 자신의 일을 맡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전체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과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그 분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를 억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건강이 상하면서까지 그 일을 맡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런 두 가지 성경적 근거를 통해 가정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가장 정당한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주실 수 있고, 꿈이나 환상등 신비적 방법을 통해 그 분의 뜻을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수한 상황이거나 긴급한 상황일 때입니다. 저와 함께 중고등부를 섬겼던 김집사님은 군대의 대대장 출신입니다. 어느 날 새벽 어머니께서 급하게 전화를 하셔서 지금 당당 부대 화장실에 가보라고 하셨습니다. 가보니 한 병사가 자살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당장 응급실로 데려가 그를 살려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경우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수하거나 긴급한 상화에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러한 긴급은혜를 계속 추구하는 것은 건강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통해 이미 계시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묵상적 차원에서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간을 내어서 공부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 그분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그 분의 가치는 무엇인지 알아가게 될 때 우리가 이 땅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삶의 과정속에서 그 분의 뜻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하나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파송할 사역자를 선발함에 있어 디모데가 가장 적합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진실한 생각입니다.
20절에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여기서 “생각하다”라는 단어는 ‘염려하다’라는 뜻입니다. “염려”는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산상수훈(마6)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6:34)”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도 바울은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8)”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염려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무엇을 염려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세상 일’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성도들을 위하여 진실히 염려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도들의 영적인 삶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민과 어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과연 우리들 주변에는 나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해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많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사정과 형편을 이해해주고 나의 말에 공감해 주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도록 돕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21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사람들은 먼저 자기 일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들이란” 바울 주변에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를 말합니다. 함께 말씀을 나누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정작 그들은 자기의 일을 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조차도 그런데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아무리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작 내가 어렵고 필요한 순간에 돌아보면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 반대로 나 또한 내 일을 구하느라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하지 못합니다.
디모데는 자기의 일을 먼저 구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일을 먼저 구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세 번째 디모데을 통해 배울 자세를 깨닫게 됩니다.
세 번째,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그리스도 예수의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단순히 교회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와 세상의 일을 구분하여 교회의 일은 예수의 일이고 세상의 일은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거듭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생가운데 감당해야하는 모든 일입니다. 그것은 교회와 세상으로 이원화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됩니다. 예를 들어 좀 전에 말씀드린 선생님에게 학원복음화만 그리스도의 예수의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정의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감당하고 있는 그 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진정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생각하면 주님의 뜻대로 그 일을 진행할 것입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계획과 과정과 진행가운데 주님의 뜻을 묻고 할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의 일을 멋지게 잘한다고 할지다고 자기의 일을 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이 아닙니다. 반면 아무리 하찮은 일을 할지라도 그 일을 주님의 뜻대로 한다며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를 세우고도 자기일로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새벽에 골목길을 청소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한 귀퉁이를 청소한다는 사명감으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디모데는 자기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먼저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한 자였습니다. 주님의 일에는 희생과 포기와 헌신이 있었지만 기쁨을 그 일을 감당했기에 바울이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맡기는 사람들은 이렇게 지금 맡겨진 일을 주님의 뜻으로 알고 충성스럽게 성실함으로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일의 크기와 외형으로 판단하지만 주님은 충성을 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실 수도 두 달란트를 맡기실 수도 있고 한 달란트를 맡기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내가 받은 것이 몇 달란트냐 하는 것이지만 주님은 충성을 보십니다. 적은 일에 충성했는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큰 것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임을 믿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네 번째 디모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삶의 자세는 연단을 통과하였다는 것입니다.
22절에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여기서 “연단”이라는 말은 ‘도키메’인데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연단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시험을 견딘다는 종작의 개념입니다. 둘째로 이 단어는 ‘시험을 잘 견뎌 낸 상태, 연단 받은 결과’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여러분들은 디모데가 어떠한 시험을 받고 어떻게 합격했는지 아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디모데는 증명된 지도자라는것입니다. 그가 받은 시험의 과정은 바울을 도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이후에 보면 이들이 함께 복음을 증거하면서 겪은 어려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모데는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때때로 찾아오는 어려움들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증명된 사람이었습니다. 전 이것이 무척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열정이 있고 신앙이 깊다고 하더라고 위기의 순간을 겪게 되면 우리의 신앙과 인격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자신의 이익이 달린 문제, 손해 보게 되는 순간,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 앞에 섰을 때 그 사람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행을 해보면 압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여 갈등을 피하지만 그런 상황이 계속해서 발생하게 되면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서로의 연약함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좋지 않은 결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선교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디모데의 영성과 인격과 성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묵묵하게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사람임을 알았기에 그를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외모나 말투 그리고 그의 직업, 또 내가 경험한 몇 가지 일로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정말 그 사람의 실체를 알고 싶으면 위급한 순간을 당할 때 그 사람의 반응을 보아야 합니다. 누구나 평상시에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위급한 순간 돌변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별로였는데 빛을 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연단을 받아봐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4년 전에 아버지께서 폐암판정을 받으시고 그분께서 얼마나 약한 분이셨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반면 어머니는 참 강하신 분이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40년을 살면서 아버지는 강한분이시고 어머니가 약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연단의 과정 속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어머니가 홀로 되셨지만 그렇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강하신 분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시험”이라는 단어가 원래를 제련소에서 용광로를 거쳐 순금을 추출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우리 삶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단련하시어 정금같이 만들기 위해 연단의 과정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와 인격의 실체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함을 통해 좀 더 성숙한 신앙과 인격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늘 좋은 것만을 주시지 않습니다. 편안하게 먹고 소화할 수 있는 죽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딱딱하고 먹기 힘든 음식도 주십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를 한층 성숙시키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가깝도록 이 땅에 있는 동안 우리를 연단시키실 것입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늘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만 인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데려가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그 곳에 양들에게 꼭 필요한 영향소를 공급하는 식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골짜기를 지나면서 목자에 대한 단단한 신뢰가 형성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 삶에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 연단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 과정 속에서 주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를 쌓게 될 것입니다.
다섯 번째 디모데는 섬기는 자였습니다.
22절을 보면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디모데는 마치 아버지에게 하듯 극진한 존경과 예를 가지고 대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할 대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주안에 있다고 해서 예의도 없고 존경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입니다(고전13:5). 주 안에도 규례와 범절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유교적 예의범절과는 다른 기독교적인 예와 규례를 뜻합니다. 그 중심은 ‘사랑’과 ‘겸손’과 ‘상호존중’입니다. 이러한 디모데의 극진한 태도에 대해 바울도 디모데를 자기 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주 안에서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고전4:17)’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아버지에게 함같이 수고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좀 약한 표현입니다. 원어의 뜻은 “종노릇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종이 주인에게 하듯이 섬겼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문형에서 “나에게”라고 해야 자연스러운데 “나와 함께”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디모데의 섬김을 받을 대상이 아님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일부러 고쳐 쓴 것입니다. 바울 자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종이며 디모데가 자신을 섬기는 것도 상전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는 차원에서 섬기는 것임을 알았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디모데의 섬김의 대상은 사도바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이 그 일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기에 그를 아버지처럼 섬겼던 것입니다. 이것 또한 교회안에서 무척 중요한 윤리중에 하나입니다. 교회안에서 사람에 대한 순종을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순종을 요구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형식적인 권위주의에 불과하며 갈등만 증폭시킬 뿐입니다. 참된 순종은 그가 복음을 위해 헌신적으로 수고할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복음을 위해 수고와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들처럼 바울을 섬겼고 바울 또한 디모데를 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아름다운 관계속에서 복음이 더욱 힘있게 증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다섯가지로 디모데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바울과 뜻을 같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다른 사람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는 자였습니다. 넷째로 연단을 통과한 자였습니다. 다섯 번째로 섬기는 자였습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실질적인 신앙의 자세가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 이루어질 소원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떤 일을 위하여 누구를 사용하고 할 때 쓰임받을 수 있는 주님의 일꾼들로 세워지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