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5-08-01 08:11

빌립보서 강해 17. 신앙의 모델_에바브로디도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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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 17 신앙의 모델_ 에바브로디도

 

빌립보서 2:25-30

25.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6.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29.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30.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빌립보서 강해 17번째 시간으로 신앙의 모델 에바브로디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나누겠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때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순간은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입니다. 반면 상처와 아픔과 실망을 느끼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옵니다. 아무리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분만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여도 현실적 삶에서 체험되어지는 희로애락은 사람들로부터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 그리고 성도들과의 사랑의 관계, 이러한 두 가지 방향에서의 관계성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이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중요한 것도 많겠지요. 전도하는 것,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 또 구제하는 것 등, 그러나 이러한 사역에 앞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이 바로 “관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내양을 먹이라”(요21장)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양을 먹이는 목양사역보다 우선시 되는 것이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그리고 성도들과의 수평적 관계가 이 모든 사역의 근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일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 분과의 친밀한 만남으로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만남이 깊어지면 사람들과 관계도 깊어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친밀한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일은 자연스럽게 시작됩니다. 만일 교회 공동체가 주님과의 만남을 소홀히 한 채 교회의 여러 가지 일로 인하여 분주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눈에 보여지는 외형적인 것들은 잘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 안은 썩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사역보다 주님과의 관계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형제자매가 나누는 친밀한 관계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사역은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빌립보서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이 이러한 공동체의 관계성입니다. 바울과 빌립보교회의 관계, 그리고 디모데의 관계, 에바브로디도와의 관계 등, 빌립보서를 읽으면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는가를 잠잠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힘 있게 증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배려하고 있는지를 보게됩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염려하고,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염려하고, 또 자신을 염려하는 빌립보교회를 염려하고, 빌립보교회는 바울과 에바브로디도를 염려하고....서로를 향한 따듯한 마음이 본문 속에 녹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내는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누렸던 동역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서고를 사랑하고 아끼고 섬기는 마음, 그리고 성도들을 배려하는 따듯한 마음을 느끼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빌립보교회에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바울을 도울까 의논한 결과 헌금을 모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바울곁에서 손과 발이 되어줄 사람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는 바울 곁에서 그의 손과 발이 되어 헌신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던 중에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됩니다. 정확히 어떤 질병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을 수발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바울의 수감생활이 얼마나 힘든지를 간접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자신의 얼마나 고생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연민의 글을 한 줄도 쓰지 않았습니다. 자기 불평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큰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섬기면서 거의 죽을 지경까지 되었다는 것을 통해 바울이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 있음을 간접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신앙의 성숙함을 보게 됩니다.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묵묵히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원망하지 말라”고 말했던 것이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 하면서 오해받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어려움들 속에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늘 잠잠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을 섬겼던 에바브로디도를 돌려보내면서 그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이었가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와 함께 하면서 자신이 경험한 그의 신앙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여기서 에바브로디도를 소개하는 네 개의 문구를 보게 됩니다. 곧 “나의 형제, 함께 수고하는 자, 함께 군사된 자, 너희 사자입니다.

 

첫 번째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형제”라고 표현합니다.

분명 바울은 가르치는 자였고, 섬김을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사도적 권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할 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사도적 권위라 함은 초대교회 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특별히 선택받은 자들이 가지는 권위를 말합니다. 사도라는 것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직접 파송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의 자격은 예수님과 함께 사역하였고 그분의 부활을 목격한 자였으며 결정적으로 주님께서 직접 파송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사도를 세우셨고 더불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당시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의심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그분이 직접 파송한 것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이 의심되는 자리에서는 언제든 다메섹 사건을 말합니다.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주님께서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하셨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이 당시 왜 중요한가 하면 바울의 사도성이 의심되면 그가 전파하는 복음의 권위도 의심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면서 복음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사도적 권위가 의심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개인적 권위를 주장하여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과 함께 복음증거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형제로 여겼습니다. 비록 사도적 권위가 있지만 그것은 복음에 관련되었을 때만 그랬고, 평상시에는 형제로 동등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제가 아주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의 권위적 문화입니다. 특히 목회자 사이에서 형성되는 상하관계를 싫어합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한 통계분석기관에 의뢰해, 부목사와 전도사 등 부교역자 949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12월 8일부터 올해 1월 11일까지 약 한 달간 온라인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부교역자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이 담임목사의 부당한 언행과 권위주의를 꼽았습니다. 22.9%에 해당합니다.
조성돈 교수는 “이것은 상당히 슬픈 현실인데, 목회자로서 부름을 받고 영적 권위로 설교와 목양을 해야 하는 이들이, 담임목사나 교회의 리더십들에게 상처와 비인격적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라며 “정말 부당하고 슬픈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목사를 영어로 Pastor라고 합니다. 부목사는 영어로 Vice Pastor입니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부목사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시니어목사, 유스목사라고 불리지 부목사는 없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제가 한국에서 경험한 교회들은 대부분 동역자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말로는 동역자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를 향한 뜨거운 사랑과 고마움의 표현이었습니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얼마나 생각하는가 하는 것은 27절-28절까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7.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 헌신하다 병든 에바브로디도를 보면서 근심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기사 치유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대목에서 바울이 얼마나 에바브로디도를 염려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근심”이라고 하지 않고 “근심”위에 “근심”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제 건강이 회복된 그를 빨리 빌립보교회로 보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26절에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성도들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8절에 보면 그를 “더욱 급히 보낸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우리는 이 대목에서 바울과 에바브로디도의 형제됨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의 필요가 무엇이고 그가 가장 잘 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보내게 됨으로 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겠지만 그를 위해 보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상대방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좋은 것이라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함께 수고한 자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수고했는가? 30절을 보시면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여기서 “죽기에 이르러도”라는 표현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라는 의미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수고한 자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질병 걸렸든지 아니면 과로였든지 아니면 박해에 의한 것이었든지 거의 죽음에 이르렀지만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수고한 자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일이 바울을 섬기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단지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어서 그가 할 수 없는 일들을 대신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바울을 섬기는 일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에바브로디도에 있어서 바울을 섬기는 일이 그리스도의 일이었습니다. 그가 죽음을 무릅쓰고 헌신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확신과 그 가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목숨을 걸만큼 수고할 때는 그 일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일 때 가능합니다. 에바브로디도에 있어서 바울을 돕는 것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가 비록 주도적 위치에서 어떤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함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는 주님의 일이라는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주님의 일은 꼭 복음을 증거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은 복음을 중심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모든 것이 해당됩니다. 우리가 선교지에 나가 복음을 증거하지 않아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는 것, 또한 다양한 방법으로 섬길 때 그것 또한 주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의 일은 바울을 수종 드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주님의 일이었기에 최선의 수고를 다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는 함께 군사 된 자였습니다.
이것은 에바브로디도의 헌신과 열심히 전투적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적극적이었고 진취적이었으며 전투적이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치열한 전투를 치루는 군사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는 유대주의 자들과 로마의 황제 숭배자들과 쾌락주의 자들과 세상의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을 대할 때 전투적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온유함도 필요하지만 죄와 사단과 싸울 때는 전투적이어야 합니다.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기독교TV에서 두 명이 신학자가 동성애가 죄인가에 대하여 토론할 때 그들의 발언은 상당히 조심스러워했고 침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와 같은 문제 앞에서는 전투적이어야 합니다. 이단들을 대항 할 때도 전투적이어야 합니다.

얼마 전 페이스북을 통해 TV의 한 장면이 올라온 것을 보았습니다. 강균성이라는 가수가 몇 명의 연예인들과 대화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주제가 동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연예인들은 동거를 찬성하였습니다. 그런데 강균성씨는 혼전순결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혼전순결을 지켜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조리 있게 설명하였습니다. 비록 TV화면에 짧게 편집된 내용이었지만 옆에 있는 동료들이나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임팩트 있게 전달되었습니다. 오히려 두리뭉실한 신학교 교수들보다 훨씬 더 나아보였습니다. 

신앙인들은 진리의 문제 앞에서는 전투적이고 단호해야 합니다. 진리의 문제 앞에서는 타협점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세상은 혼란에 빠집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동성애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가 이것에 대하여 적당한 수순에서 타협하게 되면 이 나라는 급속도로 타락할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에게 있어서 군사로서의 전투적인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배려해야 하는 것은 맡지만 진리의 문제 앞에서는 단호하고 전투적이기를 부탁드립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현대사회의 특징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진리를 주장하기 시작하면 배타적인 사람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태도를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 너희 사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자”는 문자적으로는 “사도”를 의미하지만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도는 12사도와 바울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좀 더 넒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빌립보교회가 ‘특정한 사명을 수행하도록 공식적으로 보낸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 일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빌립보교회의 헌금을 가져가는 것과 바울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이 사명을 받고 보냄을 받은 사자였습니다. 그래서 30절에 보면 바울이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섬겼던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라”
이 말은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을 섬기는데 있어서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단지 빌립보 성도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에바브로디도의 사자로서의 사명은 빌립보 성도들을 대신하여 바울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명감 때문에 죽기에 이르러도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헌신했던 것입니다.
“사명은 생명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정확히 에바브로디도를 표현한 말입니다. 그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생명을 돌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의 표현속에서 바울에게 에바브로디도가 어떤 존재였는가를 알 게 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바울과 에바브로디도 그리고 빌리보교회가 얼마만큼 사랑하고 친민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26절에 보니까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었다는 소식이 빌립보교회에 전달되었습니다. 그러자 빌립보성도들이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파송한 에바브로디도가 행여 잘못되지는 않을까 늘 걱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식이 또 다시 에바브로디도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러자 에바브로디도가 또 근심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성도들이 자기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 마음이 아펐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소식을 듣고 염려한다는 것을 에바브드로디도가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심한 근심에 빠집니다. 여기서 근심이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험하신 말할 수 없는 고뇌를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에바브로디도는 죽을 것 같은 질병의 고통속에서 오히려 빌립보성도들이 자신으로 인해 염려한 것을 근심한 것입니다. 바울도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빨리 빌립보교회로 돌려보내려 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섬기다가 거의 죽을 지경까지 되었다면 바울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에바브로디도 때문에 큰 힘과 위로가 되었을텐데 그를 돌려보내는 것은 바울에게 자신에게 큰 손해인 것입니다. 그래도 그를 빨리 돌려보내길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28절에 말한 것처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빌립보 성도들이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보고 서로 기뻐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울의 근심을 더는 일이었습니다.

 

바울과 에바브로디도 그리고 빌립보성도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아름다운 관계로 인해 바울이 증거했던 복음이 힘있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비록 느릴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친밀하고 탄탄한 관계속에서 성장하길 원합니다. 일로 인해 분주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사랑과 배려가 먼저 이루어져 우리안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행복이 있을 때 하나님의 사역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에바브로디도의 아름다운 헌신의 모습이 먼저 우리 가운데 있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누렸던 사랑과 친밀한 관계가 기쁜우리교회 가운데 이루어지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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