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5-08-03 11:16

빌립보서 강해 18.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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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 18/율법주의 교회와 은혜로운 교회/2015.8.2

 

빌립보서 3:1-3
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2.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빌립보서 강해 18번째 시간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천주교나 불교와 같은 고등종교와 다른 기독교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은혜”라는 단어로 설명될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는 신이 죄악 된 인간을 찾아와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종교는 끊임없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려고 시도합니다. 인간의 내면적 욕망을 절제하고 선행과 깨달음을 통하여 신에게 보다 가까이 가려고 하는 것이 종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의 삶은 보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입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그러한 종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신뢰와 기대감을 갖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 때문에 간혹 종교인들이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게 되면 가혹한 비난과 비판을 받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종교인들에게 대한 사회의 기대를 반영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종교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구원입니다. 악과 고통의 세상에서 벗어나 신적인 삶을 사는 것이 모든 종교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방법은 깨달음과 선행입니다. 내적으로는 자기의 욕망을 죽이는 수행을 통해서, 외적으로는 구제나 봉사 등의 선행을 통해 신과 보다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주변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종교들은 선행체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선행체계를 잘 수행하면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안위와 복락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이러한 선행체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유대주의 자들을 향하여 심한 말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개”라고 지칭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지적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유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히 인하여 사회에 해악을 끼치거나 가정을 파괴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신천지 이단과 같은 자들은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어지럽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당시 유대주의 자들은 오늘날의 천주교나 불교처럼 도덕과 윤리를 중요한 덕목으로 삼아 살았던 자들입니다. 하루에 세 번씩 정한 시간에 기도하며 일주일에 이틀은 금식을 하였습니다. 또한 구제와 봉사에도 힘썼던 자들입니다. 그들의 선행체계가 비록 기독교적 입장에서 볼 때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여도 사회에 해악을 끼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개”라고 지칭하며 주의 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주의해야할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된 교리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바울은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빌립보서를 살펴보면서 자주 나누었던 주제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감옥밖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겪고 있는 어려운 상황을 초월한 어떤 기쁨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에 대하여는 말씀을 드린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같은 말을 쓴다”라는 것이 무슨 말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첫 번째 의견은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가 2:18, 1:18, 1:4절에서 기쁨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듭 말하는 것이 바울에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는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견은 “같은 말”이 3:2이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3:18절에 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라고 하면서 유대주의자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안전하다는 의미는 “기뻐하라”는 내용보다는 잘못된 교리에 빠지는 것과 연관되었기 때문에 두 번째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도 두 번째 해석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해해야 본문의 흐름이 보다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전의 부드러움과는 사뭇 대조된 어투로 유대주의자들을 주의할 것을 경고합니다. 3:2절에 보면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자들을 삼가라”
여기에 등장하는 “개” “행악하는 자” “몸을 상해하는 자”는 거짓 가르침으로 빌립보 성도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는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지난 시간까지 살펴보았던 바울의 자세와는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면서 보여주었던 따듯함과 자상함과는 반대로 엄격하고 단호한 바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개들”이란 말은 원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하여 붙인 욕설이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데 반하여 이방인들은 개처럼 불결하다고 본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그 욕설을 되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이 개들이고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욕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됨의 표징이라고 내세우는 할례를 “몸을 상해 함”이라고 비하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아니고 “개들”이며, 의인들이 아니라 “행악하는 자들”이며, 그들은 할례도 하나님의 백성 됨의 표징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들의 살점을 떼어 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성도들이 그들을 경계하고 그들의 주장에 휩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가고, 삼사고, 삼가라” 세 번의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무엇 때문에 유대주의자들에 대하여 발끈하면서 그들을 주의하라고 경고할까요?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들이 사회를 어지럽히거나 가정을 파괴하는 등의 잘못된 신앙적 형태를 추구한 자들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개”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그들을 경계한 가장 대표적인 이유 중에 하나는 “율법주의” 때문입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선행체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율법주의는 자신들의 선한 행실을 통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이방인들과 구별된 표로서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지킴으로 거룩한 백성으로서 살아갈 뿐만 아니라 마침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 의지와 노력으로 착하게 살아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이것은 그냥 종교일 뿐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종교적 신앙의 형태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만일 교회 안에 율법주의가 들어오기 시작하면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율법주의 모습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착하고 선하게 살고 좀 더 세련되게 종교생활을 하고 싶어서 모인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여진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그 구성원들은 허물과 연약함과 부족함이 다분히 많습니다. 우리는 무언가 자격이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곳에 율법주의 신앙이 들어오면 어떤 현상이 생기는가 하면 서로의 신앙의 행위를 평가하고 치하하는 문화가 자리 잡게 됩니다. 외형적인 신실한 신앙의 행위를 계속적으로 추구하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을 느낍니다. 또한 주변 성도들로 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러한 자신이 진짜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의 행위적 노력이 결국 자신을 의롭게 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호의와 긍휼의 근거가 된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지 못하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쁨이 상실한 삶을 살게 됩니다. 교회 내에서 열심을 내야할 자리에는 항상 있고 헌신과 봉사의 자리에는 늘 있지만 기쁨을 상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자신은 교회 내에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인정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자신 안에 있는 연약함과 허물이 드러나지 않게 계속적으로 감추어야만 하고 나는 괜찮은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표출해야 하는 고달픈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솔직하지 않게 됩니다. 늘 자신은 잘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누군가의 어려움과 신앙적 갈등을 이해하지 않고 왜 나같이 못하느냐고 나무랍니다. 그 결과 그 공동체는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 보다는 새벽기도, 봉사, 구제, 헌금, 전도와 같은 행위들이 우리의 의로움을 세우는 것으로 인정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한 통로도 자리매김 합니다.

 

율법주위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선한 행위를 짜내려고 합니다. 기도하십시오. 전도하십시오. 봉사하십시오. 헌금하십시오. 그러나 내면에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결핍된 상태에서 나온 행위들은 가식이고 위선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자신의 죄인됨과 연약함이 받아들여지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이러한 율법주의 신앙의 모습을 지적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9-14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기 보면 바리새인을 표현하시면서 9절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리고 표현하십니다. 즉 율법주의자들의 특징은 자신이 ‘의롭다’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11절에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고 세리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신앙적 열심히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14절에 보면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금식과 십일조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세리가 토색 즉 뇌물을 요구하는 것, 불의, 간음이 괜찮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신앙적 행위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롭게 하시는 은혜가 임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을 품는 공동체
따라서 율법주의 교회인가 아니면 은혜가 임하는 교회인가의 기준은 교회 내에 흠이 많고 연약하고 부족한 자들이 얼마만큼 용납되어지고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최근 설교를 통해 동성애가 죄라고 분명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동성애자들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동성애는 분명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또한 당시 죄인의 대명사였던 창기와 세리를 받아들이신 것처럼 교회는 죄인을 향해 열려져 있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라고 해서 모두가 정직하고 깨끗하고 의롭지 않습니다. 목사 중에도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도 있고 신실하게 보여 지는 성도일지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추악함 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 교회는 마치 교회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거룩하고 깨끗한 공동체인 척 합니다. 그들은 보다 거룩한 예배 의식과 열정적 찬양과 부르짖는 기도 다양한 봉사와 활동을 통해 이곳은 청정지역이라고 믿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공동체라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증거로 화려한 예배당, 성도의 수, 풍성한 재정을 자랑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의 모습이었고, 또한 교회의 역사를 통해 반복되어진 율법주의의 모습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대표적으로 중세교회가 그랬습니다. 여전히 유럽에 남아있는 웅장한 예배당 건물과 그 안에 채워진 화려한 장식과 기구들을 보십시오. 신부와 사제가 입고 있는 특별하고 화려한 의상은 자신들은 남들과 다른 거룩하고 특별한 존재임을 과시합니다.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적 의식들은 자신들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여 의롭게 할 것 같은 신비감마저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당시의 교회는 세속화 되고 타락하였습니다. 외형적인 화려함 안에 추하고 더러운 죄악들이 숨겨졌던 것입니다. 고상한 종교적 의식과 선행과 구제 등의 행위로 더러운 인간의 본성을 포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율법주의가 오늘날도 여전히 교회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조금만 방심하여도 율법주의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하고 교회의 중심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자들을 삼가라”로 삼중으로 경고한 것입니다.

은혜가 주관하는 교회
그렇다면 은혜가 주관하는 교회는 어떤 모습을 교회일까요? 그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율법주의 교회의 모습을 지적하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외형적 신앙행위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주관하는 교회는 어떤 모습의 교회일까? 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여기보시면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은혜를 받은 공동체는 첫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둘째,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는 따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사로 묶여 있어서 동일한 사람을 가르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열심으로 봉사하는 율법주의와 대조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은 봉사자체가 목적입니다. 율법주의는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호의를 얻고 더 나아가 복을 받는 것을 목적입니다. 여기서 “봉사”라는 단어는 원어로 ‘라트류오’인데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것, 특히 제사 또는 성전 봉사와 관련하여서만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으로 봉사
그래서 예배라는 단어로 바꾸어도 괜찮습니다. 지난 설교 때 몇 번 말씀드린 바가 있지요? 예배라는 것이 주일에 모여 드리는 예배도 있지만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 그것이 영적예배(롬12:1-2)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라트류오”라는 단어는 신약시대에 와서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도 의미하지만 동시에 신앙인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봉사의 삶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적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영어로 service인데 이것은 봉사라는 단어로도 사용됩니다. 즉, 은혜가 주관하는 교회 성도들은 성령으로 봉사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열정, 의지, 노력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봉사가 아닙니다. 이 봉사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용납하심과 받아들여짐을 경험한 자들이 내면에서부터 솟아나는 표현으로서의 또는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봉사입니다. 율법주의가 쥐어짜내는 봉사가 아닙니다. 내 속에서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반응으로서의 봉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봉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누군가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 행복합니다.

 

저는 지난 5월 아버지의 추모예배를 인도하면서 가족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늘 우리 가정가운데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가족에게 큰 은혜를 베풀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희 가정은 제가 3살 때 장로님이셨던 할아버지께서 전도사님을 모시고 저희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교회가 서울에 있는 중심교회입니다. 교회가 부흥하여 2층을 예배당으로 만들었습니다. 교회가 건축할 때까지 10년 동안 저희 집이 교회였고 교회가 저희 집이었습니다. 아름다웠던 정원의 잔디와 장미꽃이며 바나나 나무, 체리나무, 배나무는 몇 년 만에 사라지고 흙바닥이 되었습니다. 저와 누나들의 방은 주일날이면 아이들로 북적였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면서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약속했던 당시로서는 큰 액수를 헌금하였습니다. 이미 집안이 어려워진 처지였지만 땅을 판 돈으로 헌금을 드렸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신학을 결정하시고 목사가 되셨습니다. 20년 동안 개척교회를 섬기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암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왜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축복하지 않으셨나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이정도 헌신과 봉사했으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야 마땅하고 그래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본이 될 텐데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그렇게 헌신하고 봉사했던 것 자체가 은혜이고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그 당시 하나님을 섬길 때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집을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온 가족이 몸과 마음으로 헌신했던 그것이 은혜이며 축복인 것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는 것은 율법주의요 기복주의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
둘째는 은혜가 주관하는 교회와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자신의 신앙의 행위를 은근히 자랑합니다. 마치 바리새인처럼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린 것을 자랑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주관하는 교회는 예수님만 자랑합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기 때문이며 내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하신 일임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음


셋째는 육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의 외적인 것, 인간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곧 유대주의자들처럼 할례나 외적인 것들을 의지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육체를 신뢰하는 것은 자신의 가문, 학벌, 직업, 사회적 지위 등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왜 신뢰하지 못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참된 가치를 발견한 자들은 이것의 무가치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8절에 이러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경고를 통해 교회 내에 율법주의가 가져오는 폐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주관하는 교회는 어떠한 모습인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세울 교회는 당연히 은혜가 주관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행여 율법주의가 조금이라도 틈타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단은 무식하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활동하지 않습니다. 뱀처럼 교묘하게 거짓과 진리를 섞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를 견고하게 붙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비록 작지만 강한교회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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