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21/그리스도인의 자신감/2015.8.22.
빌립보서 3:17-21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빌립보서 강해 21번째 시간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신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가 삶에 목표를 설정하고 달려갈 때 중요한 심적 자원중에 하나가 자신감입니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삶이 능동적이고 추진력이 있습니다. 또한 확신에 찬 모습으로 인해 사람들의 호감을 삽니다. 유머는 자신감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유쾌하게 만들기에 주변에 사람이 많습니다. 삶에 여유로움도 자신감에 나옵니다. 사회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위치에 있는 분을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과 대화하면서 그가 과거에 주머니에 천원짜리 하나 없이 살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밑바닥을 치는 어려움을 격고 그 자리에까지 오른 것입니다. 그가 가진 여유로움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신감은 실력에서 나옵니다. 어떤 일에 대한 전문성이나 과업성취로 인한 좋은 평가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성장과정에서 부모님의 인정과 칭찬이 자신감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신감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심령에 빛을 비추어 내 존재를 정확히 보게 하십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허세를 발가벗기듯 다 벗어내시고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게 하십니다. 그 결과 내 자신의 존재가치가 발견됩니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이 이 땅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오늘 본문을 보면 자신의 삶에 자신감과 확신에 찬 사람의 당당한 선언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 그 누가 자신을 본받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바울이 가졌던 자신감의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우리도 그와 같은 모습으로 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오늘 본문이 어떤 맥락에서 주어졌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3장에서 자신이 자랑했던 것들이 모두 헛된 것들이었음을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후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삶의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난시간 함께 나눈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즉 내가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 것처럼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발견하고, 나의 삶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닮아가고, 나의 삶의 자세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의 의미입니다.
바울의 자신감
바울이 이렇게 까지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입니다. 자신의 삶이 행복하지 않고 기쁨이 없고 만족함이 없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기쁨의 사람입니다. 행복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만족함이 있었습니다. 이전에 자신이 추구했던 것들,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고자 했던 것, 자신의 특출했던 태생을 자랑했던 것, 또한 하나님에 대한 열심 이라고 생각하고 교회를 핍박했던 것들...그러한 삶속에 행복이나 기쁨이나 만족함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히고 난후 그리고 주님을 위해 살기 시작하면서 그의 삶에는 이전에 없던 평안과 기쁨과 만족함이 충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도 나처럼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이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의 모습을 주목하여 보고 그들처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가장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이기에 너희도 그렇게 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가치 발견
그렇다면 바울이 가졌던 삶의 자신감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두 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참된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8절 뒷부분과 9절 앞부분을 보면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가치를 발견하고 나서 자신의 참된 가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8-9)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가치를 알고 그분을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발견된다”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신의 참된 가치가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 가치를 분명하게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안에서 발견된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자신의 죄인됨 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죄인이며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러한 자신을 용서해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자신과 같이 무가치한 자를 위해 아들을 주신 하나님, 그리고 순종함으로 그 사랑을 이루어주신 예수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자신과 동행하시는 성령님...성삼위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을 보니까 어떤 존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을 주고 사신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고귀하고 가치있는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나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하나님의 빛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보게 됩니다. 그 빛이 내 존재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자신감입니다. 그러한 자신감은 그 사람을 더욱 빛나게 만듭니다.
우리가 세상에 보여지는 것들에 자꾸만 마음이 가는 이유는 내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감은 내 존재의 가치를 아는 것에서 나오는데 그것이 없다보니까 자꾸만 보여지는 것들로 치장하여서 내 존재를 과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참된 가치를 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얼마큼 부유한지, 그의 직위는 무엇인지, 수입이 얼마인지.... 그것이 그렇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것에 갇혀 버립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상하관계로 생각합니다. 갑과 을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돈이 많으면 갑으로 여겨 그에게 머리를 숙입니다. 나보다 돈이 없으면 을로 여기고 쉽게 대합니다. 이러한 관계속에서는 진정한 친밀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 존재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 그래서 자신의 삶에 자신감과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가진 것이 없어도 멋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대할 때 항상 자신 있고 당당합니다. 돈이나 권력 앞에서 기죽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린도후서 6:8-10
“8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가난하고 어려운 것 같은데 자신보다 행복하게 살고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러한 자신감과 당당함은 로마의 황제의 권세 앞에서도 주저함이 없었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일절 굽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그들을 일컬어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참된 가치를 보는 사람
여기 청년들이 있는데 성경에서는 이방인과 결혼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러한 가치관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치관이 다르면 추구하는 삶도 다르고 삶을 해석하는 인식도 다릅니다. 그것은 존재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저들은 세상의 속한 자들입니다.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이 함께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전도해서 변화시키겠다는 것은 교만한 생각입니다. 내 삶도 변화시키지 못하면서 누구의 삶을 변화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사람의 가치를 그의 외형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인지 그것을 볼 줄 압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날 때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전에 교회에서 찬양팀을 하는 자매가 있었는데 외모적으로 별로였습니다. 키도 작고 뚱뚱합니다. 그런데 그 자매를 좋아하는 형제가 있었는데 명문대 출신의 외모가 훤칠한 형제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모두가 의아해 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뭐하나 빠지지 않는 형제가 저런 자매를 좋아할 수 있는가? 그 형제는 집안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자매는 지방출신으로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습니다. 청년들 사이에 여러 말이 오고갔습니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그 자매가 그 형제를 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이 좋은 형제와 결혼해서 지금도 잘 살고 있습니다. 그 자매는 무엇이 가치있는지 볼 줄 아는 자매였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내 삶이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주어진 소명의 길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왜 어머니들이 자녀들 결혼시켜 놓고 우울증에 빠집니까? 자신의 인생을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위해 살았지 한번도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을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아버지들이 퇴직 후에 우울증에 빠집니까? 자신의 일이 자신의 인생 전부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도 나의 일도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저에게 있어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가 제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중요한 한 부분일 뿐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다 벗겨내 보십시오. 학력, 재산, 일, 건강, 자녀, 집, 가족.....
과연 무엇이 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거 하나 잃었다고 인생 무너진 것처럼 생각하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건강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여 큰 손해를 볼 수 도 있습니다. 자녀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고 모든 것이 만사형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 삶에 있었고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생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오른 팔이 없으면 왼팔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비가 오면 우산 쓰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조차 없으면 비 맞고 가는 것입니다. 비가 온다고 바람 분다고 주저앉아 있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우리 삶에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본질이 우리 안에 있다면 그것은 모두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붙잡아야 합니다. 그분을 알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내 존재의 가치도 더욱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
바울은 지금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에 이러한 진심어린 심정은 18절에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바울은 이제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그것은 이러한 가치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18절에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19절에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은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이 땅에 것들을 추구하고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형통하게 보이고 잘사는 것처럼 보여도 멸망입니다. 그들의 신은 배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유대주의 자들이 정결법을 통해 자신의 육신을 거룩하게 하는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유대주의 자들은 먹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마치 현재 이슬람교가 할랄된 제품만을 먹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먹는데 있어 여러 가지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잘 지킴으로 자신이 거룩하게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또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라는 의미는 바로 할례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할례를 하나님의 자녀됨의 표시였지만 헬라 로마인들에게는 조롱꺼리였습니다. 그래서 헬라문화에 동화된 유대인들은 이미 난 할레 자국을 일부러 수술하여 없애려 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정결법이나 할례를 통해 거룩하게 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무가치한 것이며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것을 생각하는 자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즉 유대인들이 의롭게 되고자 하여 노력하는 모든 인간적 노력들은 결국 땅의 일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이 땅에 내려오시고 구원해 내신 일입니다. 결국 이 땅에서 인간들이 노력하고 추구하여 얻은 모든 것들은 땅의 일인데 그것은 결국 멸망에 이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면에서 착하고 선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여 종교적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도 결국 그 마침은 멸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삶은 멸망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본받아서 그리스도의 참된 가치를 깨닫고 또한 너희 자신의 가치를 알고 살라는 것입니다.
시민권
두 번째, 그리스도인의 자신감은 내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인식에서 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바울이 여기서 “시민권”이라고 했을 때 빌립보 성도들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누렸던 특권들은 로마인들과 동일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채찍 형벌면제, 극단적인 범죄를 제외하고 불체포 특권, 황제 직상소권, 세금면제, 자치권등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시민권이 있다고 하면 당시 그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과는 비교도 안 될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부심이 우리안에 확고하게 있을 때 자신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싸웁니다. “우리 아버지는 과장이야” “우리 아버지는 사장이야” 그런데 우리의 아버지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통장에 수백억을 저금해 놓은 사람들은 든든합니다. 그래봐야 그 돈 다 쓰지도 못하고 100세도 넘기기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무한한 자원을 소유한 자들이고 더군다나 영생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고 믿을 때 세상의 부나 권세가 부럽지 않습니다. 그래봐야 50년 100년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의 시민입니다. 잠시 이 땅에 머물다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집이 거기 있습니다. 우리의 진짜 몸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도 거기 계십니다. 우리의 이름도 거기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지난 겨울 3개월을 뉴질랜드에서 여행을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어떤분이 작은 캠핑카를 빌려주시긴 했지만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한국에 가면 집이 있다는 생각에 든든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소풍 나온 사람들과 같습니다. 아이들이 놀다가 저녁이 되면 어머니들이 부릅니다. 한명씩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언제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이름을 부르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진짜 우리의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곳을 사모하는 이유는 그곳에 황금집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곳에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기 까지 나를 사랑하신 주님이 계신 곳. 그곳이 천국입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우리의 심판자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 심판주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 앞에 감격할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가 심판주로 계신다면 그 심판은 살리는 심판이며 구원하는 심판이 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며 우리를 반겨 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확실히 믿을 때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자신 있고 당당하게 인생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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