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22/주안에 서라/2015. 8.30
빌립보서 4:1.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립보서 강해 22번째 시간으로 “주 안에 서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은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죄악의 유혹과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영향력은 날마다 우리를 죄악으로 끌고 들어가려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중생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영향력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돈과 권력 그리고 성적쾌락을 향한 끊임없는 욕망은 죽는 날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에서 멀어지는 순간 이러한 죄의 영향력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따라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의 결단과 노력이 없이는 날마다 넘어질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주 안에 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를 흔드는 수 많은 죄의 유혹 앞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것에 넘어지지 말고 설 것을 권면합니다.
기쁨
먼저 본문에서 “주 안에 서라”고 할 때 먼저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렇게 까지만 말해도 되는데 이어서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이것도 모자라 “사랑하는 자들아”... 아름다운 수식어가 길게 붙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4장에서 마지막 권면을 앞두고 마음이 격해 진 것 같습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말하지 않습니까?(3:18). 그런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이런 표현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이 표현 속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기쁨이요 면류관이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표현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빌립보 성도들은 기쁨이며 면류관이었습니다. 너희가 나의 기쁨이고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누군가가 여러분의 기쁨이 되어 본적이 있습니까?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를 생각만 해도 기쁘고 함께 하는 모든 시간들이 기쁨일 것입니다. 또는 어린 자녀를 둔 부모에게는 자녀들이 기쁨입니다. 그가 하는 모든 것들이 부모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사실 인간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대부분의 기쁨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옵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사랑하고 또한 그를 통해 사랑을 받는 것처럼 기쁨일이 없습니다. 결혼을 하여 아이가 태어났을 때 새 생명이 주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자녀를 양육하며 그가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 또한 부모에게 기쁨입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형제자매를 향하여 “당신은 나의 기쁨 입니다”라고 할 때는 무언가 좀 어색한 것이 사실입니다. 바울의 이 말이 단지 상대방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큰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과연 서로를 향하여 “당신은 나의 기쁨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특히 목사인 저에게는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가 바울처럼 “당신은 나의 기쁨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만 있다면 그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면류관
다음으로는 면류관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를 향하여 여러분들은 나의 면류관이라고 말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면류관은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내려 주는 관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 대에서 올림픽 경기의 시상식 때처럼 자신을 불러 상을 주신 것인데 그것이 바로 너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3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앞에 놓여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하였습니다. 3:14절에 보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무조건 달려간 것이 아닙니다. 부름의 상을 바라보며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상이 바로 면류관이고 그것이 바로 빌립보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급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잘못된 상급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신앙관 중에 하나가 상급에 대한 개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얻지만 상급은 행위로 얻는다고 생각입니다. 저는 어릴적 교회에서 목사님으로부터 이 땅에서 선한 행실과 충성을 한 자들은 천국에서 황금 면류관을 받고 황금집에 살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개털모자를 쓴고 초가집에 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면서 천국에도 등급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수고한 자들은 높은 등급, 그렇지 못하면 낮은 등급 결국 천국에도 계급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학교 때 천국에 다녀온 장로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는데 천국에 가보니 세 가지 물어보시더랍니다. 네가 얼마나 성경책을 읽었느냐? 얼마나 기도했느냐? 얼마나 전도했느냐? 그리고 그것에 따라서 상급을 주시더랍니다. 이러한 천국에 대한 간증이나 책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간혹 장로교의 경우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고 가르치고, 천국의 상급은 행위로 얻게 된다고 하여 성도들에게 선한행위를 강조하는 근거로 상급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급에 대한 이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상급에 대한 바른이해를 갖게 합니다.
상급은 황금면류관이나 황금집이 아니라 바로 빌립보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이 땅에서 빌립보 성도들의 위해 복음을 증거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지도록 섬길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복음전도를 통해 죽어있던 영혼이 새 생명을 얻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마치 새 생명을 가슴에 안고 기뻐하는 어머니처럼 바울은 너희가 나의 기쁨이고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이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금씩 성장하였습니다. 자신의 야망과 유익을 위해 살던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로 성장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상급은 빌립보 성도를 섬긴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어떤 상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헌신하고 섬겼던 것 자체가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은 것 자체가 상입니다.
이전에 할머니께서 돌아 가시기전 병상에 계실 때 하신 말씀이 주일에 성도들을 위해 밥 준비할 때가 가장 기뻤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상급입니다. 제가 한주동안 설교를 준비하여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저에게 상급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교회를 위하여 헌금하고 마음을 쓰고 기도하는 것 그것이 상급입니다. 특히 우리 공동체가 서로를 위해 염려해주고, 기도해주고, 섬길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상급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여 여러분들이 나의 면류관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19-20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주 안에 서라
바울은 이렇게 그들을 향한 진한 사랑의 표현을 한 후에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서라”는 의미는 전투용어입니다. 적을 대항하여 스크럼을 짜고 서 있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공격해 오는 수많은 대적을 향하여 견고하게 설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공격하는 적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무장하고 설 것을 의미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에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바울은 자신의 신앙의 여정이 믿음을 지키는 싸움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같은 대사도에게 있어서도 그의 신앙을 흔드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들과 끊임없이 싸워 믿음을 지켜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세상의 죄악과의 싸움 그리고 내 자신의 죄성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에게 권면하기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그렇다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오는 적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늘은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물질주의
첫 번째가 물질주의입니다. 물질주의에 흔들려 많은 성도들이 넘어졌습니다.
디모데후서 4:10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의 소유를 팔아 헌금할 때에 정직하지 않았던 일로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물질에 그들이 판단력이 흐려진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리더들 중에 여러명이 물질주의에 넘어져 창피를 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도 물질 때문에 넘어졌는데 지금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질주의는 이미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것입니다. 물질주의는 돈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마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섬긴다”는 단어는 예배용어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예배하듯이 돈을 섬길 수 있음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던 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이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먼저 돈이 무엇입니까? 돈은 그저 화패에 불과합니다. 인류가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처음에는 물건을 교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돈이라는 것을 만들어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교환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돈이라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교환할 수 있는 가치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이제는 화폐 형태가 아니라 카드나 인터넷 뱅킹을 통해서 가치 교환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돈을 번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지식과 노동 그리고 투자한 시간의 대가로 돈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힘들게 번 돈은 잘 못씁니다. 그만큼 내가 투자한 가치가 크기 때문입니다. 반면 쉽게 번 돈은 쉽게 씁니다. 우리는 그렇게 모은 돈을 가지고 우리가 원하는 것과 교환을 합니다. 내가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옷, 타고 싶은 차, 살고 싶은 집....이렇게 보면 돈의 목적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하는 수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냥 종이이고 화패일 뿐입니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과 교환되어서 나의 필요를 채우고 만족감을 줄 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반면 교환되지 않고 쌓여진 돈은 사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용도로 돈은 우리 삶에 굉장히 유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돈으로 교환될 수 없는 것을 돈과 교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먹고 마시고 쓰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이제는 사랑도 돈으로 사려고 합니다. 권력의 자리도 돈으로 삽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죄를 지어도 돈만 있으면 무죄판결을 받습니다. 결국 우리가 지켜야 될 돈과 바꿀 수 없는 가치들이 이제는 돈과 교환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의라는 불변의 가치가 이제는 경제논리 앞에 설자리를 잃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흐름을 보면 경제논리가 최상위에 있습니다. 4대강 사업, 광복절 특사 그리고 최근 설악산 케이블카 승인 등....이런 결정들은 보면 환경이나 법, 정의, 윤리 보다 경제가 우선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인간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결국 돈이 된 것입니다. 사실 돈은 수단이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얻게 하는 수단이었는데 이제는 그 돈이 목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 목적이 되어 버리면 모든 것을 수단화 시킨다는데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손익을 따지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그 안에 친밀한 만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교회를 나오는 것도 돈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목적이 아니라 돈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도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속에서 끊임없이 유혹을 받게 됩니다.
쾌락주의
두 번째 우리는 흔드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쾌락주의입니다. 쾌락주의에 넘어진 대표적 인물이 다윗 아닙니까? 그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탐하여 결국 간음죄와 살인 교살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 결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죽는 징계를 받게 됩니다.
사실 쾌락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쾌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쾌락은 인간의 본성적 욕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식욕, 성욕, 명예욕, 자아실현 욕구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들로 인해 인간은 결혼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구들이 지향하는 목표가 쾌락입니다. 이것을 철학자들은 행복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여 결국에는 쾌락 또는 행복에 도달하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쾌락을 얻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나 잘못된 방식으로 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욕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만족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벗어나서 성적욕망을 채우고자 할 때 그것은 자신과 상대방을 파괴 시킬 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공동체 까지도 파괴시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욕망은 이 땅에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원하는 삶의 진정한 쾌락 또는 행복은 이 땅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돈을 추구하고, 성적욕망을 추구합니다. 또한 자아실현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습니다.
중고등부 사역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반에서 5등하는 아이는 1등이 목표입니다. 그런데 1등은 전교1등이 목표입니다. 전교1등 하는 아이는 전국1등 하고 싶어 합니다. 이 이야기를 했더니 반에서 1등하는 아이가 그 말이 맞는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면 전국1등하면 만족할까요? 이제 그 아이는 외국아이들과 경쟁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욕구는 우리를 성장시키고 발전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땅에서 아무리 우리가 노력해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류의 현실입니다. 얼마 전 아내가 장모님이 우울해 한다고 걱정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삶이다, 그것이 정상이다’. 우리 중에 늘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때로는 우울하고, 자신감이 없고, 걱정스럽고, 한숨이 나고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것에 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부유하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그런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합니다. 좀 더 돈이 많으면 괜찮아 지겠지, 좀 더 높은 자리에 가면 무시당하지 않겠지...하면서 끊임없이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쾌락주의가 우리를 흔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충만해져 있으면 이러한 헛된 욕망에 빠지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친밀함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면 이러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특히 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하면 더 많이 흔들입니다. 저들은 왠지 재미있게 사는 것 같고 부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흔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은 지독한 인생의 허무함과 외로움에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이 땅에서 진정한 행복과 만족은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야 이루어집니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배고픔을 채울 음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외로움이 있다는 것은 참된 만남을 통한 기쁨의 교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허무가 있다는 것은 그 허무를 채워 줄 완전한 만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욕망이 있다는 것은 그 욕망을 채울 완전한 쾌락 완전한 행복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게 갔을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쾌락주의에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주 안에 서는 것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대항하여서 주 안에 서야 합니다. 주 안에 선다는 것은 주님의 주권과 통치에 순종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2장에서 예수가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 만유를 통시하시는 주권을 받으셨다고 선포했습니다(2:9-11). 주 안에 선다는 것은 바로 만유의 통치자이신 주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죄악에 대항하여 우리는 주님의 주권과 뜻 안에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안에 서는 것, 주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에 대한 해답이 “이와 같이”라는 문구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근거없이 “주 안에 서라”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1-3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두 가지 내용으로 간추려 볼 수 있습니다.
목적을 분명히
첫 번째,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3장의 내용이었습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행여 흔들리더라도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넘어지더라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3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 목적에서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우리 삶에 주어진 여러 가지 판단과 선택의 순간 우리는 먼저 이 목적을 떠올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이라면 과연 어떻게 하실까?” “나의 이러한 결정을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 뜻대로 함부로 판단하고 결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는 주변사람의 의견에 밀려가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성이라는 죄의 영향아래에 있습니다. 또한 앞에서 말한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의 유혹가운데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고 결정한 것이나 시작한 일들이 실패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나의 수준이상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하고, 배운 것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또한 내가 아무리 꿈을 크게 가진다고 하여도 그것은 헛된 꿈이거나 무모한 도전인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당연히 내 뜻을 아뢰기 보다는 주님의 뜻을 묻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 내가 이렇게 할 것인데 도와주세요”가 아니라 “주님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하고 물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우리가 뜻을 정해놓고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 뜻 안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주님의 뜻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할 때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순종할 때 그것이 주 안에 서는 것입니다.
함께 서는 것
두 번째, 주안에 선다는 것은 하나가 되어 함께 서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내용이 1장 27절부터 2장에 이르기까지 이러지고 있습니다. 1:27절에 보면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바울은 한 마음으로 서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2장 2절에서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겸손의 마음임을 예수 그리스도의를 본으로 하여 말하였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함께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독불장군이나 자수성가가 없습니다.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공동체는 세상에 죄악에 대항하여 함께 서있어야 합니다. 유기체와 조직은 큰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조직은 기계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고장이 나면 부품을 교환하면 됩니다. 그러나 유기체는 우리 몸과 같습니다. 어느 부분이 아프거나 다치면 온 몸이 신음하고 함께 아픔을 감당합니다.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유기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연합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서로의 연약함을 함께 짊어져야 합니다. 누군가 죄로 인해 넘어지면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해 지면 인내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허물이 있으면 가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안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안에서 서로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중 누구든 흔들릴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가야하는 존재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 안에 서야 합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가치위에 서지 마십시오. 헛된 것입니다. 주님의 뜻 안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서야 합니다. 이렇게 주 안에 설 때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수 많은 유혹앞에서 당당히 서게 될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미국 그레이스 커뮤니티 처치를 목회하시는 존 맥아더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가 많은 목회자들이 존경하는 목사님이십니다. 그가 한번은 병상에 계시는 78세된 노인분을 심방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이제 죽음을 앞두고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물었습니다. 그때 그의 대답이 이것입니다. “나는 평생토록 포르노를 즐겼던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 부끄럽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끊임없는 죄악과의 싸움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여정입니다. 주 안에 서야 합니다. 이 말씀 기억하시고 믿음의 여정에서 승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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