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26/자족의 비결/2015.10.25.
빌립보서 4:10-13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강해 26번째 시간으로 “자족의 비결”이란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시면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기뻐한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편지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울의 상황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는 로마의 어두운 감옥에 갇혀 이 편지를 씁니다. 그의 발에는 쇠고랑이 채워져 있습니다. 그의 얼굴은 오랜 감옥생활로 인해 수척해 있습니다. 그의 육신은 지쳐 있습니다. 그런데 펜을 들어 편지를 쓰는 그의 얼굴은 기쁨으로 충만해져 있습니다. 그는 지금 빌립보 성도들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그의 기쁨은 더욱 충만해 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염려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해 크게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기회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기회가 되어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빌립보 교회의 헌금을 의미합니다. 빌립보 교회가 전부터 헌금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드디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보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편에 보내온 헌금과 옷 그리고 여러 가지 물품들을 받아들고 크게 기뻐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을 보내준 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 담긴 저들의 사랑을 기억하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에게서 온 물질을 받았을 때 너무나 감동되고 기쁠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대부분 넉넉지 않은 형편에, 정말 힘들고 어려운 생활 중에서도 정성을 다해 보내준 헌금이나 선물을 받아들 때 마음이 울컥해 질 때가 있습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팔아 차곡차곡 모아둔 구겨진 천원짜리를 곱게 펴 헌금하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자식들이 준 용돈들을 모아 헌금하는 권사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식당일을 해가며 모든 돈을 주님의 교회에 전부드린 아름다운 손길들이 있습니다. 손의 액수가 기쁨이 아닙니다. 저들의 마음과 정성을 받을 때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러한 기쁨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4:18절에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너희가 준 헌금과 물품들이 “향기로운 제물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크게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내는 헌금이나 또는 어떠한 물품들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린 다는 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 우리 삶에 손해를 감수하는 행동입니다. 우리 중 돈에 잉여가 생겨서 남는 돈으로 헌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돈으로 좋은 옷을 살 수 있고 맛난 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돈을 모아 차를 사거나 집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금을 하는 것은 나를 기쁘게 하는 것 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곧 나의 기쁨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 돈으로 나를 치장하여 기쁘게 할 수 있겠지만 그 기쁨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더 큰 기쁨이기에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할 때 그 사람의 중심가운데 하나님이 우선순위에 계신 것입니다. 내가 아니고 나의 배우자나 자녀들도 아니고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존재로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은 우리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보내준 헌금과 물질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오늘 새로운 건물에서 예배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3월 22일 저희 집에서 첫 예배를 드리고 이제 6개월이 되었습니다. 비록 작은 수가 모였지만 여러분들의 헌신은 신실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는데 이렇게 좋은 예배당이 생겼습니다. 강대상도 있고 의자도 있고 책상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제 입술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고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자,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혹시 마음에 부담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더 열심히 헌금을 해야 겠구나. 안먹고 안입고 안쓰고 더 많이 헌금을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행여 빌립보 성도들이 그렇게 생각할까봐 이렇게 말합니다.
11절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여러분, 바울 사도께서 우리의 헌금을 받고 크게 기뻐하시니 우리 다시 헌금을 모아 보냅시다”라고 할까봐 걱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절대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텐트를 만들고 팔아 그 돈으로 선교를 할 정도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9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그만큼 바울은 성도들을 아끼고 배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행여나 빌립보 성도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내가 궁핍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행여나 부담을 느끼거나 더 하지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나는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12절에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은 자신은 자족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헌금에 대한 부담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고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현재 자신은 풍족하고 만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에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여러분, 지금 이 말은 감옥의 쇠사슬에 메여 있는 바울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13절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가 이 말씀을 많이 오해합니다. 성도들이 아주 좋아하는 구절이죠? 그래서 액자로 담아 집이나 사업장에 걸어놓기도 합니다. 이 말씀만 딱 띄어놓고 읽어보면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불가능은 없다. 도전하라” 이런 의미로 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높은 고지에서 승리자의 모습으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감옥에 죄수의 신분으로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할 때 모든 것은 바로 위에 있는 12절의 “모든 일”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비천에 처할 줄고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배부름이나 배고픔이나 그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가난하다고 해서 기가 죽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또는 풍부하다고 해서 거만해 지거나 그것 때문에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즉 그 상황을 수용하고 만족하고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나에게 주어진 형편과 상황이 좋을 때 만족하며 감사합니다. 반면 그렇지 않으면 힘들어 합니다. 집도 있고 직장도 번듯하고 가족이 모두 건강하고 일도 잘 풀리고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고 하면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상황들이 우리 삶에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사업에 어려움이 생기기도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실망을 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러한 형편에서도 우리는 과연 자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바울처럼 비천한 가운데서도 배고픔 가운데서도 자족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이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여 과연 만족하며 살아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신앙의 아주 높은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이 성숙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했을 때 바로 이러한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이 자란다고 했을 때는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바울처럼 자족할 수 있을까요? 자족함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우리에게 있는 것을 감사할 때 자족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6절입니다.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히브리서 13:5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성경은 자족의 비결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감사할 때 자족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주 없는 것을 봅니다. 나는 왜 집이 없지? 나는 왜 키가 작지? 나는 왜 이것을 못하지?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우리는 자주 없는 것을 불평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고 알 것이니라”
성도들은 이 땅에서의 삶을 나그네요 소풍으로 인식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의 집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도 거기계십니다.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이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잠시 이 땅에 소풍처럼 살다가 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만일 이곳이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곳이라면 많이 쌓아두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잠시 머물다 갈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버리고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 잠간 사용하고 버릴 것들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있으면 감사한 것이고 없어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여행의 고수들은 짐이 많지 않습니다. 딱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다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소풍 같은 이 땅의 인생을 살면서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비를 막아줄 잠자리, 입을 옷, 일용할 양식 그것만 있어도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남들과 비교하여 없는 것들을 찾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불행해 집니다.
그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 감사하고 만족해야 합니다. 주일학교 아이가 교회 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병원으로 달려가 만났습니다. 아이가 말합니다. “목사님 크게 다치지 않아서 감사해요”.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교회 가는 길에 지켜 주시지 않았지? 왜 우리 아이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 내가 잘못한 것은 뭐지?” 이런 원망들이 아니라, 크게 다치지 않아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보고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실패한 것, 손해본 것, 잃어버린 것, 없는 것을 보고 실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족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때 자족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닥친 어떠한 어려운 상황들일지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고 자족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그곳에서 기도하고 찬송을 부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닥친 모든 어려운 상황들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목적을 위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간섭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우리의 삶은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연히 일어나거나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하신 계획가운데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좋다 나빠다 또는 잘됐다 안됐다는 나의 평가일 뿐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이 목적하신 일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바울이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 곧 고통스러운 질병을 없애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기도를 통해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쳤고 그의 손수건을 대어도 병이 낳는 역사를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고통스런 질병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 번 주께 간구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간절함을 가지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온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즉 너의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뭐하고 말하는가 하면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후 12:9-10).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고통스런 질병도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기뻐하며 자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나의 제한된 지혜와 경험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왜 이러한 일이 있어났는지, 무엇 때문에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있는지, 왜 나에게 이러한 일이 생겼는지 다 해석하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과응보라는 것은 하나님께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과응보의 법칙을 초월하십니다. 그것이 대표적으로 욥기서입니다. 우리는 욥의 고난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큰 아픔을 주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너의 고난은 원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욥은 정직했고 의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큰 고난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어떻습니까?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줍니다. 형제들에게 노예로 팔리고, 노예로 들어간 집에서 억울한 누명을 써 감옥에 갇히고 그곳에서 꿈을 해석하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애굽의 총리가 되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구성되고 마침내 그 백성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단지 성경속의 동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 가운데하나님께서 섭리하셨던 사건들이고 그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에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 삶에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기적을 베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긴급할 때 사용하시는 은혜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환경을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십니다. 나를 더욱 겸손하게 하시고 온유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신앙인들로 세워 가십니다.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는 초보의 신앙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는 성숙함으로 인도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악가운데 허덕였던 우리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자녀들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꼭 닮은 그분의 사랑스런 자녀들로 빚어 가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자족함의 비결은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또 12절에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즉 자족함이란 저절로 터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움의 과정과 노력이 수반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의 삶의 여정속에서 자족함을 배웠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이 기도와 찬송가운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보니 옥문이 열려있자 자결하려 하였습니다. 그때 바울은 그를 말립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들이 바로 빌립보 교회의 개척멤버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바울이 배우게 되었던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자족함입니다. 감옥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에 대한 기대속에서 자족하는 것입니다. 배움이라는 것은 동일한 것을 반복적으로 학습하는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고 자족함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반복적으로 체험한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실을 매순간마다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들이 반복되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지난 삶들을 뒤돌아보면 매 순간 순간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기쁜 순간도 힘들었던 순간도 하나님은 그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그 동안 신실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남겨진 삶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가족들, 삶의 문제들 그 모든 상황속에서 하나님은 신실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자족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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