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5-10-11 20:38

빌립보서 강해 28. 성도의 교제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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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 28/성도의 교제/2015.10.10.

 

 에베소서 4:21-23
21.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22.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2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빌립보서 강해 28번째 시간으로 “성도의 교제”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전하겠습니다.

 

초대교회의 역동적인 교제의 모습

바울은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성도들에게 문안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보통 바울의 편지는 대필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먼저 편지의 내용을 말하고 대필자는 그것을 옮겨 적는 형식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의 경우 더디오가 대필자였습니다. 그래서 편지의 마지막에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롬16:22)고 썼습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면서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고전16:21)라고 썼습니다. 즉 바울은 성경의 영감을 받아 성도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말로 하였고 그것을 누군가 대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안인사를 쓸 때는 펜을 들어 직접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로 바울이 친필로 문안인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각각 문안한다”는 것입니다. 각각 문안한다는 것은 성도들 전체가 아니라 각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이름을 제한된 용지에 다 쓰지는 못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에 교제했던 형제들이었을 것입니다. 그중에는 2장에서 언급되었던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대신하여 인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란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처럼 가까운 형제들은 아니지만 함께 믿음을 나누었던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대신하여 인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소개하는 성도들이 있었는데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고 합니다.

가이사가 누구입니까? 가이사는 로마의 황제입니다. 당시 로마 황실의 일을 수발들었던 사람들 중에 성도들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여러분들에게 문안인사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이러한 문안인사를 통해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 빌립보 성도들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환경과 문화가운데 있었고 서로가 한번도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있어서 자랑할 만한 모습 중에 하나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어려움에 처하자 헌금을 모으고 에바브로디도편에 보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헌신을 기억하고 이렇게 편지를 보내고 또한 마지막에 문안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향한 사랑과 배려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따듯하게 여겨집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교제가 역동적으로 살아있었습니다.
부한 자와 가난 한 자, 상전과 종이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였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구별은 있었지만 차별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환경과 배경속에 있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였습니다.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함께 찬양하였으며 함께 음식을 먹고 교제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문화적 배경속에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차별이 심한 문화였습니다. 남자와 여자, 상전과 종, 권력자와 시민, 귀족과 평민, 부자와 가난한 자가 뚜렷이 구별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계층간의 이동은 거의 없었고 부나 가난이 자연스럽게 세습되던 시대였습니다. 아버지가 목수이면 아들이 목수가 되고 아버지가 빵장수이며 아들도 빵장수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경우에도 이러한 차별적 문화가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여인의 뜰, 이방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이방인의 뜰,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뜰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뿐만 아니라 종교조차도 차별적 문화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처음부터 이런 것들을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존재들로 모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라고 할지라도 교회에서는 중요한 역할들을 감당했고 종의 신분이라고 할지라도 상전들과 함께 예배하고 음식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어떻게 처음부터 이러한 역동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신약교회가 시작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성경적인 원칙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등의 원칙입니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평등의 원칙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바울이 모든 교회들에게 명령하는 중요한 대목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뿐만 아니라 여러 교회에는 다양한 계급과 신분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너희가 종이나 자유인이나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차별이 없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신분에 연연해하지 말라고 합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7.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여기보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았던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던 자유자로 부르심을 받았던 그것이 교회 안에서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하나님께 부름 받았을 때 어떤 모습이던 간에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굳이 자유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기 때문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자유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바울이 초대교회에 모든 교회에게 이 말씀을 했기 때문이 교회는 이 말씀을 준거로 삼아 평등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저는 초대교회 안에 완전한 평등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사람을 외모로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보면 당시 교회안에 차별하는 모습을 지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야고보서 2장
“1.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당시 교회에도 차별하는 모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문제로 여겼고 더 나아가 죄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9절에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이런 인식 때문에 교회는 세상과는 다르게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했던 것입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교회에 들어온 이상 모든 성도들은 평등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에서부터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무척 중요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얼마만큼 평등을 실천하는가 하는 것이 성경적 교회인가 아니면 세상적 교회인가를 구분하는 중요한 잣대입니다. 그리고 평등의 원칙이 교회의 구석구석 마다 깊게 자리하고 있을 때 성도의 교제가 살아있게 됩니다. 만일 어떤 교회가 목사, 장로, 권사와 같은 직분을 계급장처럼 여긴다면 그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는 활발하게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만일 교회에서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그 교회에서는 진정한 성도의 교제의 기쁨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목사를 위한 주차구역이 따로 배치되어 있고 장로들을 위한 당회실이 따로 있다면 이미 권위적이고 계급적인 세속 문화가 교회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 교회에서는 진정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전북 김제에 가면 모악산 기슭에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ㄱ자 형태의 작은 교회로 한국초기의 교회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명소입니다. 이 교회가 유명한 것은 아름다운 일화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라도 지역에 선교하던 테이트 선교사는 김제지역의 거부 조덕삼을 만나 전도합니다. 그리고 조덕삼은 자기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이자익을 전도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1905년 함께 세례를 받고 곧 이어 함께 집사가 되었습니다. 1907년 장로 선거가 있었습니다. 조덕삼은 김제의 최고 갑부였고, 교회를 지을 땅을 헌물하였고,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동네 많은 사람이 조덕삼의 소작농이었습니다. 나이도 조덕삼이 15살 많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머슴인 이자익은 경상도 마산 출신으로 외지인이었습니다. 당시 조덕삼(1867~1919)은 41살이었고, 그의 집 머슴인 이자익(1882~1961)은 26살이었습니다.


17살 때부터 조덕삼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이자익은 조덕삼의 선처로 결혼도 하고 함께 신앙생활도 했던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둘이 장로 후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조덕삼이 장로가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의외였습니다. 이자익이 장로가 된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신분을 뛰어넘고, 지역 차별을 뛰어넘는 일이었습니다. 모두 당황하여 술렁거리기 시작할 때 조덕삼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그건 그냥 인사치레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조덕삼은 죽을 때까지 이자익 장로를 지지하고 후원해주었습니다. 1909년 장로가 된 조덕삼은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할 때(1910~1915)도 모든 학자금과 생활비 일체를 다 지원하습니다. 그리고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잘 받들어 섬겼습니다. 이자익 목사는 한국장로교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삼선 총회장을 역임하였던 사람입니다. 또한 대전신학교를 설립하고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 뒤에 조덕삼 장로가 있는 것입니다. 이자익 목사도 훌륭하지만 자기집 머슴을 목사로 섬겼던 조덕삼 장로의 겸손한 인격과 신앙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조덕삼 장로의 가정은 지금 삼대째 금산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렇듯 평등의 원리가 교회안에서 실천될 때 아름답고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역동적 교제의 원인은 성도들이 가지고 있던 자기 정체성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를 교회가 붙들고 있었던 성경적 원칙을 찾았다면 두 번째는 교회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던 자기 정체성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인사를 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성도”는 영어로 saint입니다. 카톨릭에서는 어거스틴이나 프란체스코 같은 성인들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 성 프란체스코라고 할 때 ‘성’이라는 단어가 saint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에서는 성인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세인트입니다. 모두가 성도입니다.

 

구별된 자들
성도라는 것은 구별된 자들을 의미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또는 죄악으로부터 구별된 자들이 성도입니다. 이렇게 구별하여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된 자들을 일컬어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성막에 드려진 접시, 촛대, 음식들을 거룩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물이라고 했습니다. 똑 같은 그릇이지만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 것을 거룩하다고 여겼습니다. 마찬가지고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의 것이 된 성도입니다.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특별히 우리를 부르시고 구별해 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인 자들이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악가운데서 불러내셔서 자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분의 자녀들이 죄가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인과 함께 거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대신할 화목제물로 삼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심판하시고 마침내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사 그 분의 백성으로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라고 말하고 있죠?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인 자들 그들은 세상과 구별된 성도인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죄인이라는 인식
이렇게 성도로 모인 자들에게는 공동된 자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죄인이라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은 의인이라는 인식입니다. 이 두 가지의 상반된 인식이 성도들에게 공존합니다. 우리는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라는 인식입니다. 이러한 독특한 자의식이 성도의 교제를 역동적으로 이끌게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서로를 바라볼 때 그 사람의 외모나 학력, 사회적 지위, 재산정도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먼저 죄인으로 바라봅니다. 아무리 교회에 대통령이 앉아 있어도 그는 대통령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대기업의 회장도 교회에서는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교제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하나님 앞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은 죄인임을 인식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 보다 따듯한 자세로 대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어 실망할 때도, “그래! 우리가 죄인이었지”하며 이해할 수도 있게 됩니다. 서로의 연약함과 허물이 드러날 때도 ‘그래 죄인이라 그럴 수 있어’하며 감싸줄 수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언급했던 평등의 원칙도 모두가 죄인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형제라는 인식
이러한 죄인이라는 인식을 통해 서로를 향한 따듯한 마음과 이해의 자세가 생겼다면 다음으로는 형제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성도로서 하나님의 한 자녀라는 인식입니다. 이러한 형제라는 인식은 보다 적극적으로 서로를 돌아보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본문 21절에도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라고 말하죠. 우리는 서도를 형제로 인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한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배경과 환경 속에서 살다가 기쁜우리교회로 모였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부모는 다 다르시만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는 동일하십니다. 그래서 한 형제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는 한 형제입니다. 지금 이 시간 한국 땅에서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도 형제이고 세계 곳곳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 한 형제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계 어디를 가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만나보면 한결같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동일한 가치관과 동일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뉴질랜드에서 만난 신실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러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지만 한 형제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집에서 재워주고 먹여주고, 차도 빌려주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고민했습니다. 비록 서로에 대하여 아는 것은 없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신의 것을 나누었고 서로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저는 이것이 참 놀라웠습니다. 내가알지 못하는 수많은 성도들이 나와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소망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고민한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그들이 모두 우리와 한 형제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는 형제라는 인식가운데 서로의 필요를 돌보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을 돌보았던 것 또한 바울이 복음을 통해 빌립보성도들을 섬겼던 것 모두가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돌보는 형제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에서 하나됨의 권면을 하면서 4절에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됨의 실천이고 교제의 실제입니다.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것입니다. 기도제목이 무엇인지, 현재 어떤 필요가 있는지, 내가 도와줄 일은 없는지 서로를 돌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들은 누구나 성도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어떤 어려운 상황과 환경에 놓여있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성도가 될 수 있다는 인식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한 형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구원의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악한 사람일지라도 구원받을 수 있고, 아무리 구원받기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한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바울은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문안한다고 했습니다. 가이사가 누굽니까? 당시의 황제를 일컫습니다. 당시 황제는 네로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주후 64년에 일어난 로마의 대형화제 사건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이 했다고 해서 수많은 성도들을 로마시내를 밝히는 횃불로 처형하고 원형경기장에서 사자밥이 되게 하는 등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황제의 일을 돌보는 사람들 중에도 성도의 무리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에 그를 찾아왔던 무리들 중에 가이사의 측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서슬 퍼런 네로 황제의 집권 하에서도 그와 가까운 자들 중에 복음을 듣고 성도가 된 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 중에는 귀족들도 있었을 것이고, 정원관리사나 조리사와 같은 하층 신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복음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복음의 확장은 인간의 노력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북한의 공산정권은 지금도 기독교인들을 처형하고 있습니다. IS 무장단체들은 기독교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그것을 영상으로 담아 세계 곳곳에 보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계속해서 확장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기에 인간의 노력으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누구의 구원도 단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구원을 받고 안 받고는 내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일지다도 구원에서 박탈당할 수 있고, 저 사람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사람일지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편견 없이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가이사의 집 사람 중 몇이 너희에게 문안인사를 한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이제 복음이 이제 로마의 심장부 까지 들어갔구나!’ 그러면서 그들은 더욱 로마 정부를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는 주후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게 됩니다. 당시 가이사였던 콘티탄티누스도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서 국교로 받아들입니다.

 

이렇듯 바울은 이러한 인사말을 통하여 복음이 얼마나 능력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그 결과 그들이 우리와 한 형제가 되었음을 언급하였습니다. 전에는 우리를 핍박하던 자들이 이제는 한 형제가 되어 여러분에게 문안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도 그랬던 인물중에 한 사람 아닙니까? 그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옥에 가두는 일을 하던 사람입니다. 한 때 그 일에 정열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부르심을 받다 이제는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가이사의 집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 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저는 우리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이 살아있는 교제가 이루어지는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성경적 원리인 평등의 원칙이 실천되어지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서로의 허물과 연약함을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공동체가 되길 원합니다. 한 형제라는 인식으로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살아있는 교제가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또한 복음의 능력으로 아직도 가이사의 집과 같은 죄의 권세아래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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