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1/ 빌립보교회의 시작 2015. 3. 29
1.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오늘부터 빌립보서를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교회를 설립하면서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은 기쁨에 대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성도들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쁨을 소유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환경에 종속된 기쁨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기쁨이었습니다.
어떻게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과 고난의 삶속에서도 기쁨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우리들의 관심입니다. 그래서 기쁨의 서신이라고 불리는 빌립보서를 선택하게 되었고, 오늘부터 함께 말씀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기대와 바램
빌립보서를 시작하면서 저의 기대와 바램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기쁜우리교회가 빌립보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서 교회의 방향과 목적 비전 그리고 세부적인 모든 활동들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교회를 향한 기대와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와 소망이 나의 기대와 소망을 채우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환경에 의해 쉽게 변하고, 감정과 기분에 영향을 받습니다. 또한 우리의 시야는 우리의 경험 이상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또한 자기중심적인 죄의 본질이 여전히 우리 안에서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바라는 것들이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두 번째 예배를 드리면서 다짐하고 기도해야 하고 순종해야 할 것은, 내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을 우리교회에 채워드리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빌립보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달되도록 한주동안 부지런히 공부하고 연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여 무언가 의문이 나거나 제가 설명을 잘 못한 부분들은 언제든지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하게 받아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를 세워갈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기대와 바램이 빌립보서와 충돌된다면 마땅이 우리의 의지를 꺾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보서의 말씀이 우리안에 역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 교회의 방향과 목적 그리고 비전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과 가정의 삶에서 빌립보서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교회적인 것이라면 두 번째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말씀과 삶의 현장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내 직장에서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순종되어져야 합니다.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죄악으로 가득 차 있고, 또한 내 안에 여전히 역사하는 죄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갈등과 싸움이 우리를 성숙시킵니다. 이 싸움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빌립보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시고 우리의 삶을 빌립보서에 맞추어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으로 우리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정립하시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빌립보서의 배경을 잠시 살펴보고 1절 말씀을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빌립보교회의 설립배경
먼저 빌립보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6장 6-34절을 보면 바울이 2차 선교 여행중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선교계획은 원래는 아시아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사건이 하나 등장하는데 그것은 성령님께서 그들의 행로를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6-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은 아시아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고 이제 동쪽으로 향하고자 애썼는데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는지라” 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들이 가려고하는 길의 여정속에서 날씨가 좋지 않았던지,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던지, 여러 가지 사건들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애쓰지만 때로는 성령이 허락하지 않는 일들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치하면 좋겠지만 다를 때도 있습니다. 성령이 어떻게 막았는지, 어떻게 허락하지 않았는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에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일행도 계속적으로 애썼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사건이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16:8-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8.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마게도냐는 서쪽입니다. 성령께서 밤에 환상중을 보여주시는데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함께 동역자들과 함께 그 환상을 나누고 하나님의 뜻이 동쪽이 아니라 서쪽임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확신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애쓰고 힘쓰고 안될 때 이 길이 과연 맞는 길인가 우리는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성경으로 충만했던 바울 또한 환상을 보기까지는 계속해서 동쪽으로 가고자 애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지 못할까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지 못할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100% 순종할 자세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길에 세운 나의 계획에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고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마치 사장실에 들어가는 직원처럼 하나님께서 내 계획에 싸인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백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하고자 하는 일에 우리는 그저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경험과 판단으로는 이 길이 맞는 것 같지만 우리가 하나님보다 지혜로울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100% 순종할 자세를 가진다면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어떤 식으로든 보여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되기 전에는 환상이나 예언 같은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셨지만, 이제 66권의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위해 예언이나 환상 꿈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때때로 명확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는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서쪽 마게도냐 지방으로 가라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여정가운데 빌립보 지방에 이르게 됩니다.
사도행전 16장 11-15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1.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여기 보면 빌립보지역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라는 것은 첫 번째 만나는 성이 아니라, 주요한 도시 중의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로마의 식민지라고 설명합니다. 주전 168년 로마의 장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퓌드나에서 마게도냐 왕 페르세우스를 패배시킴으로 빌립보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갑니다. 그리면서 역사적인 로마의 상당수 퇴역군인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곳을 로마의 식민지로 건설했습니다. 당시 로마하면 최고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이 꽃피우던 곳이기에 복지나 인권에 대한 것도 굉장히 발달하였습니다. 채찍형벌의 면제, 극단적 범죄를 제외하고는 불 체포 특권, 황제 직상소권, 세금면제, 자치권 등이 있었습니다. 바로 빌립보가 그러한 혜택을 누리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빌립보서를 읽을 때 이러한 배경을 머릿속에 그리고 읽으면 좀 더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도시는 로마의 문화가 그대로 담겨져 있고, 이곳 사람들은 주로 퇴역 군인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난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고, 그 문화 가운데 로마의 경제, 정치, 교육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와의 만남
바울일행은 안식일에 기도할 장소를 찾습니다. 보통 기도할 장소는 회당을 말합니다. 당시 회당은 종교와 교육의 센타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면 교회를 중심으로 모입니다. 교회가 꼭 예배의 장소만이 아니라, 문화센터나 커뮤니티역할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빌립보는 유대인들이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문밖 강가에 나가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가 하면 두아디라시에 살던 루디아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14절에 이 여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이 여인의 직업은 자색옷감 장사였습니다. 당시 자옷감은 아주 귀한 천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입던 옷이었습니다. 사업차 그 자리에 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은 그가 유대인들처럼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바울의 말을 듣게 됩니다. 그 말을 듣고 있을 때에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합니다. 그리고 루디아와 그의 가족들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그 집에 며칠을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빌립보교회의 출발이었습니다.
간수의 회심
그리고 또 한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6:16-34절입니다.
읽지는 않고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바울일행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귀신들린 여종을 만납니다. 그의 직업은 점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번 돈으로 주인에게 상당한 이익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바울일행을 따라다니면서 이렇게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여러 날을 계속 그렇게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의 이름을 귀신을 내어쫒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더 이상 점을 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인이 화가 나서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장터에 있는 관리들에게 끌고 갑니다. 그리고는 장터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이 사람들이 이상한 풍속을 전한하고 고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리들이 이에 동조해서 흥분하고, 상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벗기고 매로 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이때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첫 번째 루디아를 만난 일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따듯합니다. 그러나 장터에서 매를 맞고 결국 감옥에 갇히는 이 사건은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빌립보에 왔는데 때로는 루디아 가정을 만나 따듯한 대접을 받기고 하지만, 때로는 사람들에게 조롱받고 매 맞는 고난을 받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늘 기쁘고 좋은 일들만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픔도 있고 고난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좌절한 것이 아니라, 찬송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아도 성도의 삶의 기도와 찬송은 상황과 환경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감옥에 있으면서도 찬송할 수 있었는가는 우리가 빌립보서를 나누면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와 찬송을 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지진이라는 자연현상을 통해 옥문을 여십니다. 이때 옥문을 지키던 간수가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는 바울이 탈출한줄 알고 자결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법에 죄수에 대한 책임이 간수에게 있기 때문에 죄수가 탈출하면 간수가 목숨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소리를 칩니다.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여기 있노라” 간수는 바울과 실라는 데리고 나갑니다. 그리고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때 위대한 대답을 하지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고는 간수집에 가서 상처를 치유하고 그곳에 모인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세례를 받습니다. 참 감동적인 장면인데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6:33-34
“33.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음식을 함께 먹으며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간수 가족의 모습으로 이 사건이 마무리 됩니다.
바로 이 간수 가족의 구원사건이 빌립보교회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렇듯 빌립보교회의 시작은 성령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과 그것을 온전히 순종하는 바울과 동역자들을 통해서였습니다.
두 가지 교훈
이것을 통해 깨닫게 되는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이루고 싶은 꿈, 내가 원하는 직장, 내 인생에 세워놓은 계획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로마서 12장은 그리스도의 삶의 대헌장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은 보통 교리와 실천으로 나뉩니다. 보통 앞부분이 교리에 대한 것이고 뒷부분이 삶에 대한 적용에 대당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11장까지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나서 12장에 그렇게 복음을 받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을 언급합니다. 특별히 12:1,2절은 3절부터 마지막장까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기 보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보통 동물을 죽여서 각을 내어 태워 드리는 것인데,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에 대한 설명이 2절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을 자기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갑니다. 결국 돈을 따라갑니다. 명예를 추구합니다. 쾌락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삶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합니다. 변화의 시작이 마음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뜻은 때때로 악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뜻은 슬픔과 우울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온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뜻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오늘 서론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생각은 아무리 지혜롭게 결정한다고 하여도, 우리의 지혜와 경험의 수준 이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온전하여 우리 생각에는 아닌 것 같지만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삶의 여정 속에서 빌립보 교회가 탄생된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각자에게 질문해 봅시다.
내가 삶의 여정 속에서 나름대로 고민하고 판단하고 결정한 일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인가? 아니면 내 생각과 내 뜻인가?
내가 품고 있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인가? 아니면 나를 드러내고 인정받기 위한 것인가?
나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순종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기쁨도 있지만, 때로는 고난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4:35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해가 저물 때 배를 타고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여정속에 큰 풍랑과 파도를 만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인생에도 풍랑과 파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는 여호와가 나의 목자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다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다닐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의 여정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거짓 진리에 속으면 안됩니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고난중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강하게 부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4장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만일 우리가 나와 함께 하는 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믿으면 찬송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던 중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가운데 빠진 것은 배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잠잠하라”는 말씀 한 마디에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 집니다. 그때 제자들이 말합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제자들과 동행했던 예수님은 자연을 굴복시키는 창조주의 권세가 있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움과 공포에 빠진 이들이 사도행전에 보면 거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죽음의 공포를 뚫고 나갑니다. 이러한 담대함이 바로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를 위해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에베소서 3:14-19
14.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렇게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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