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2/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2015. 4. 5
빌립보서 1:1-2.
1.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지요? 첫 번째는 자주옷감 장사 루디아의 회심 사건이었고 두 번째는 간수의 회심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두 사건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때로는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 올 수 있음도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했고 찬송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인 주안에 있음을 믿었고, 나와 함께 하신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기에 기뻐할 수 있음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빌립보서 1장 1절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것은 저의 궁금증이기도 하고, 우리의 궁금증이기도 한, ‘어떻게 고난과 어려중에도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쁨과 감사를 잃지 않았는가?’ 에 대한 대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빌립보서를 통해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사역자였던 바울과 당시 빌립보 성도들의 자기 인식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삶을 바라보는 인생관,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 삶의 태도와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가치관 등...이러한 것에 염두에 두고 말씀을 읽고 묵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명언도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바르고 분명한 인식이 없다면 우리는 인생을 잘못 살아갈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인 누구인지 말씀을 통해 들으면서 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르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될 때, 우리 삶의 많은 부분들이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
1절에 보니까...“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은..” 이라고 하면서 편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고대 편지를 쓰는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편지를 씁니다’의 형식입니다. 여기 보니까 바울이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종”
우리가 첫 번째로 알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할 때 그것은 관계성을 규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아내 앞에서는 남편입니다. 부모 앞에서는 자녀입니다. 성도 앞에서는 목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입니까? 바로 종입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종이 원어로는 둘로스입니다. 영어로는 Slave. 종이라고 하니까 별 거부감이 없지만 사실은 노예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
그러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입니다.
첫 번째로 이것을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조차도 자기를 섬기는 종으로 취급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신앙적 표현 속에도 이러한 자기가 주인됨의 표현은 손쉽게 발견됩니다.
“하늘 보좌를 흔드는 기도” 이 표현을 누가 처음에 썼고 성경어디에서 그 근거를 가져왔는지를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좋아하고 자주 쓰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늘 보좌를 흔든다면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입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자존감을 높여주고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에는 호감을 같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그리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녀됨의 권세’ ‘왕 같은 제사장’ ‘주님의 자녀’같은 호칭은 좋아하지만, ‘종’, ‘노예’ 라는 호칭은 꺼려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노예”라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은 호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로 불리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만 무려 130번 이상 등장합니다. 바울 또한 자신을 소개할 때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노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구속”이라는 단어는 당시 노예 시장에서 사용되던 단어였습니다. 노예시장에 노예들이 줄을 지어 서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친족 중에 빚을 갚지 못해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친척중 하나가 돈을 지불하고 그 노예를 삽니다. 그리고 자유인으로 해방시켜 줄 때 사용하는 단어가 “구속”이라는 단어였습니다. 그 밖에 “자유”라는 단어도 그렇게, “해방”이라는 단어도 그렇고 구원에 연관된 여러 가지 개념들은 “노예”라는 것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보다 명확하게 하길 원합니다.
마태복음 6: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고린도전서 7:22-23입니다.
“22.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마태복음 25:21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로마서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종의 삶의 태도
“야고보서4:13-15
13.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디모데후서 2:24-25
24.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종의 자세 네 가지
이렇듯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정체성은 종, 노예입니다.
이것을 통해 네 가지 종 됨의 자세가 요청됩니다.
첫째로는 우리 삶의 주권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삶의 주도권은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온전한 순종의 자세입니다. 종은 주인의 의견을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주인의 말에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내 뜻과 주인의 뜻이 다를지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내 뜻은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좀 더 쉽고 편안한 길을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불편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자리에 있길 원하시면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종은 모든 면에 있어서 주인에게 의존되어 있습니다. 주인은 종의 삶을 보호하고 책임집니다. 따라서 종은 철저하게 주인을 의존해야 합니다.
네 번째, 종은 주인으로부터 훈련에 그 결과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 수많은 잘못된 가르침은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성 속에서 성도의 위치를 너무나 높게 올려놓아서 아마도 이러한 진리의 말씀에 기분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이고,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자꾸 종, 종 하는가? 그러나 성경이 이것을 증거 하기에 저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우리의 모습이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묻는 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22장:3,6절을 보세요.
3절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6절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여전히 종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살지 못하면 어쩌면 천국에 가서 큰 충격을 받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신있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전도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를 그리스도의 종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 뜻과 의지를 꺾고, 이제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순종하는 자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좋은 목사, 훌륭한 목사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설교를 잘하고, 교회운영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겠습니다. 그러나 종으로서의 자기인식과 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이겠습니까? 참된 종들이 모인 곳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가져야 할 바른 자기인식은 바로 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주인의 뜻을 잘 이해하고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으로서 잘 사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
두 번째,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표현은 바울이 즐겨 쓰는 표현입니다. 제가 빌립보서에서만 찾아도 15회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까? 첫 번째 시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하시면서 말씀하신 대목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입니다.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6절, 7절입니다.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우리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고 하나님의 농부(요15:1), 그리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은 모습은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쉬운 그림언어를 통해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서 연합되어진 관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할 때 그것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성경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열매로 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15-22절입니다.
15.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열매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무엇인가? 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21절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을 수밖에 없듯이, 우리가 예수님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1절 말씀처럼 아버지의 뜻을 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때로는 미욱하고, 부족하고 연약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 마음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부단한 노력과 열심히 동반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주여! 주여! 하면서 놀라운 이적을 나타낸다고 하여도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방언을 하는가? 어떤 환상을 보았는가? 어떤 음성을 들었는가? 예언을 하는가?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는가? 등, 그것이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구별하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세 번째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성도입니다(1절)
성도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성전기물을 거룩하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교회라는 단어는 ‘에클레시아’인데 그 말뜻은 …로부터 부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그들을 바로 ‘에클레시아’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합니다. 그들을 왜 구별했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로 구별한 것입니다.
출애굽때 5장 1-3절
“1.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3.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예배하는 자들로 구별해 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낳은 무언가가 있어서가 절대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불러내신 것입니다.
신명기 7:6-8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공동체로 부르신 우리를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이들 보다 무언가 좀 더 낳은 것이 있어서 선택받았다면 좀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실제로 비교해 보아도 못나면 못났지 내가 더 잘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랑할 수가 없고 그저 나 같은 자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이렇듯, 이 세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종,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자, 그리고 성도임을 아는 이러한 자기 인식에서부터 이 빌립보서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없이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세 가지 자기인식을 분명히 하고 앞으로 살아가길 소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 신분에 걸맞은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라는 확신 속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또한 성도로서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사시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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