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4/바울의 기도 1 /2015 4.19
빌립보서 1:9-11
9.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지난 시간 바울의 감사와 기쁨의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두가지로 정리 했었는데 첫 번째가 복음안에서 이루어지는 ‘코이노니아’, 그리고 두 번째는 구원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신실하심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바울의 기도입니다. 바울은 대부분의 서신에서 교회를 향한 기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17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하였고, 골로새서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로마서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누가복음 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베드로전서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은 무엇을 기도하고 있습니까?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는데 먼저 기도의 내용입니다. 9절부터 10절 앞부분까지
(1)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2)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3)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는 목적에 해당되는 것이
11절 뒷부분의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가 사랑의 풍성함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이 풍성해 지는가?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해 지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 “너희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의 풍성함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먼저 성경에서 사랑이라고 할 때 그것은 감정이기 보다는 의지적 결단이며 행동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사랑이라고 할 때 그것은 감정을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황홀한 감정, 애틋한 마음, 설레는 기분 등, 이러한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감정이 사라지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은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이렇게 사랑은 의지적 결단이며 행동입니다. 설레는 기분, 황홀한 감정은 사랑을 시작하게 하는 원동력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차량의 시동을 거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사랑은 의지로 유지되고 희생과 섬김으로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 청년들이 있는데, 감정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여기에 속아서 평생 후회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은 희생이고 섬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하늘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이며 십자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사랑이 바로 희생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서기관들에게 마가복음 12:31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보면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되는지 깨닫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몸이 아프면 몸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식을 합니다. 때때로 잘못을 해도 자신을 비난하기 보다는 이해하거나 덮어 버립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생각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나를 어떻게 사랑하는가? 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을 말합니다. 희생과 섬김을 기반으로 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위해 기도하면서 먼저는 지식으로 그 사랑이 풍성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지식으로 풍성해 지는 사랑
그렇다면 지식으로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을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다음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입니다. 칼빈은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 때 비로소 자신을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을 사랑하셨는가를 먼저는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무조건 믿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먼저 지식이 있고 그 다음에 그것을 내가 수용하는 믿음이 동반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어디서부터 올까요?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모든 지식을 자연과 성경을 통해서 계시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연만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이 지식만으로는 구원에 이르거나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연을 통해 신에 대한 지식을 아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자신이 만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지식을 성경을 통하여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바르게 소유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지식을 바르게 갖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가? 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인간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성경을 통하여 그 처참한 죄인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성경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지식이 풍성해 질수록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깊어지고 넓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은 순간적인 감정이나 동정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지속적이고 견고해 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으면 사랑이 풍성해 질까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장 탁월한 사람이라고 하면 아마도 신학교 교수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들의 주된 일을 하나님에 대하여 공부한느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과연 사랑이 풍성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식으로 사랑이 풍성해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지식이라고 하면 언뜻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지식은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그것을 머리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전달되어 마침내 손과 발로 행동할 때 그것을 지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때는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하나님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음식을 만드는 법을 아는 것과 실제로 음식을 하는 것은 다릅니다. 저는 된장을 만드는 방법을 압니다.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안다고 해서 된장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된장을 만드는 것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만들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지식이라고 할 때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라고 할 때는 성경의 지식을 머리고 알고, 가슴으로 믿고, 결국 손과 발로 순종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아내와 15년을 살면서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 아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먼저는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들으면 왜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사랑이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을 통해 기도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해야 할 의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러면 더욱 기도하고 싶어지집니다. 이렇게 지식이 순종을 통하여 더 강화되고 견고해 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
한 가지 덧붙여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지식은 몰라도 죄가 아니지만 어떤 지식은 모르는 것이 죄가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분인지 모른다고 해서 그것이 죄가 되거나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운전을 하는데 교통법규를 모른다는 것은 죄가 됩니다. 마찬가지고 천지만물의 창조주요 주권자인신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우리에게 죄입니다.
총명
다음으로 총명입니다. 총명이라는 의미는 분별력 또는 판단력입니다. 좀 더 쉽게 풀이하면 지혜입니다. 지식이 많다고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것이 많다고 분별력이나 판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법을 잘 아는 변호사라고 해서 법정에서 탁월한 것은 아닙니다. 의학지식이 풍성하다고 해서 환자의 질병을 잘 고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주변에 비록 학벌도 좋지 않고 많은 지식은 없지만 지혜롭게 판단하고 바른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지혜는 다양하고 많은 경험에서 오기도 하지만, 비록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총명이 사랑과 결합되어 질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 중 누군가가 잘못된 길로 걸어갈 때,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조언을 할 것입니다. 그때 지혜롭게 조언하는 것과 그냥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그가 처한 상황을 똑바로 인식하고 또한 미래를 내다보는 해안과 식견을 가지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언한다면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는 지식이 없는 시대가 아니라 총명, 즉 지혜가 부족합니다. 학생들은 10년 전에 비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바른 판단력과 분별력 그리고 창의력은 그렇지 못합니다. 학교의 교육은 지식전달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지혜로운 사람을 양성해 내지 못했습니다. 젊은이들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언제든 넘쳐나는 지식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앞날을 내다 볼 줄 아는 지혜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지혜를 갖추고 있고 그 지혜와 함께 사랑이 풍성해 진다면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이웃을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더욱 풍성해 지게 하옵소서”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알아 갈 뿐만 아니라 순종의 삶을 통해 그 지식을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님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사용하셔서 바른 판단력과 분별력과 통찰력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지혜는 노력으로 얻어지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절하게 구했던 것입니다.
기도의 결과
이렇게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이 풍성해진 결과는 무엇인가? 바로 이어지는 10절 말씀입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여기서 “지극히 선한 것”의 의미는 ‘햇볕에 쬐어 순수한 것으로 판명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밝은 태양 빛 아래서 아주 치밀한 시험과 엄격한 조사에서 순수함이 나타나고, 조금의 불순물도 없음이 드러난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장인이 도자기를 구울 때 어떤 것은 금이 가기도 합니다. 대부분 이런 경우 깨어버리지만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한데 조금 흠집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왁스같은 것으로 그 부분을 살짝 때웁니다. 그리고 도색작업을 하면 감쪽같습니다. 이러한 도자기는 실내에 있을 때는 누가 보아도 완벽합니다. 그런데 도자기 전문가가 그것을 햇빛에 쬐어 봅니다. 그러면 흠집을 때운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최고의 것을 분별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어떤 것의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최선의 것, 최고의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가장 최고의 가치를 지난 것인지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대부분 가치관에 따라 움직입니다. 내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에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투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여 우리 인생을 이룹니다. 따라서 우리의 현재는 지금껏 우리의 가치관에 의해 선택된 삶의 순간들이 모인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우리가 진정한 가치를 지닌 것을 바르게 분별하여 우리의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투자했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하다면 우리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잘 살았다고 칭찬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것이 내 삶에 최상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게 된다면, 그리고 이제 죽음의 순간이 닥친다면 그 순간 우리의 삶이 얼마나 허망해 질까요?
인생은 길게 살고 짧게 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가치 있게 살았는가에 따라 판단됩니다. 이 시간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길 원합니다. 우리는 진정 가치 있는 일에 우리의 삶을 드렸는가?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땅속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인생 속에 감추어진 지극히 선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에 천국이 경험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지극히 선한 것들...학벌, 외모, 명예, 돈에 우리의 인생이 끌려 다닌다면 우리는 결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극히 선한 것들을 눈에 보이지 않기에 하찮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중요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 인내 같은 것들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극히 선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가치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많이 소유한 사람 앞에 주눅 들거나 머리 숙이지 않습니다. 또한 그러한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것을 더욱 얻기 위해 그리고 풍성해 지기 위해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안식 그리고 사랑과 같은 열매들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첫 번째 기도제목을 나누면서 우리의 삶에 계속해서 드려져야 할 중요한 기도제목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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