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6/ 기쁨의 이유 1/2015. 5. 3
빌립보서 1:12-18
12.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우리는 지난 두주 동안 바울의 기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앞으로 두 주 동안 기쁨의 이유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제목을 이와 같이 잡은 이유는 18절의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노라”는 구절 때문입니다. 기뻐하고 기뻐한다는 말에서 앞의 “기뻐하고”는 12절부터 18절까지의 내용을 그 원인으로 하고 있고, 뒤의 “기뻐하리라”는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는 의미인데 그 이유는 19-20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전반부를 통해 바울의 기쁨의 이유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삶이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을 향한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나서, 이제 곧이어 바울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에 대해 상당히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바울이 자주 쓰는 문장의 형태가 등장하면서 자신이 처한 상태를 언급합니다. 바울은 새로운 주제로 전환할 때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자주 쓰는 표현이 “너희가...알기를 원하노라, 또는 너희가...을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는 어법입니다. 여기서 보면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내가 당한 일”이라는 것은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복음전파의 진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대와 소망이 좌절됨
우리는 여기서 당시 바울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현재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가 여기까지 온 배경은 이렇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로마에 가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로마서 1:10에 보면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고 쓰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에 있어서 최고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향한다는 말처럼 로마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따라서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어진다면 세계선교의 길이 열리는 것이기에 로마에 가기를 그토록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로마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자유자의 몸이 아니라, 죄수의 신분으로 갑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대제사장과 유대인 고위층의 고소를 당하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로마이 총독이 파견되어 관리하였는데, 그가 베스도라는 인물입니다. 그 앞에서 심문을 받는데 바울에게 아무런 죄가 발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예루살렘에가서 심문을 받자고 제안합니다. 그때 바울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로마 황제인 가이사께 상소하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이 있어서 황제에게 상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바울은 구속된 상태로 로마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오는 중간에 배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파산되기고 하였고, 뱀에 물리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과정이 있었지만 결국 안전하게 로마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감옥에 갇혀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들이 빌립보 성도들에게까지 전달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좌절과 혼돈에 빠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한다고 헌신하고 열심히 달려갔는데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이제 복음증거의 길이 막힌 것입니다. 또한 복음전도자였던 바울의 상태도 더 이상 소망이 없어보였습니다. 이것이 빌립보 성도들의 마음을 위축시켰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당연히 무언가 잘 풀려야 하고, 기적적인 역사들이 일어나서 어려움들이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은 더 이상 복음을 증거할 수 없게 되었고 감옥문이 열리는 기적같은 일들이 더 이상 일어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무언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우리의 기대와 소망과는 반대로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어떤 일을 시작했는데 건강에 어려움이 닥칩니다. 물질로 섬기고자 했는데 사업이 잘 풀리지가 않습니다. 뜻하지 않는 사고로 인해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위축될 수 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정말 능력이 많으신 분인가? 나를 진정 사랑하시는 분이신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버리기도 합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가 이와 같았습니다. 특히 신앙의 연륜이 얼마 안되고, 여러 신비종교들과 로마 황제 숭배에 익숙했던 빌립보 성도들은 자기들의 목자인 사도 바울이 가이사의 관리들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사형에 당할 위기에 처하니까 그가 제시한 복음 자체에 회의를 갇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복음의 패배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진전을 가져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빌립보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히면서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의 엘리트계층들에게 복음증거의 기회가 열린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바울은 자유의 몸으로 회당이나 광장에서 복음을 증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죄수의 몸으로 있으면서 자신을 지키는 간수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길 원합니다.
사도행전 28장 16절입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바울은 다른 죄수들과는 따로 개별 된 공간에 있었습니다. 감옥이 아니라 연금된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곳에서 쇠사슬에 매여 24시간 군인들의 감시를 받게 됩니다. 여기서 군인들은 로마황제의 직할부대인 가이사의 시위대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군인들 중에서도 특히나 엘리트 계층에 해당하였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대통령 경호부대와 같은 것입니다. 이들은 6시간 근무하고 교대를 하게 되는데 그러니까 하루에 총4명이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독립된 공간에 붙잡혀 있다 보니까 여러사람들이 그를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 유대인의 높은 신분의 사람들도 있었고, 가이사황제의 측근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로 하면 장관들이나 대통령 보좌관들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감옥의 죄수의 신분으로 있었지만 그의 복음전파는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로 돌아오면 12절에 ‘내가 당한 일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진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진전’이라는 단어는 군사용어입니다. 빌립보지역이 로마의 퇴역장교들이 주로 많이 거주한다고 말씀드린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는 군사용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잘 이해하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진전’이라는 단어는 군대가 진격할 때에 먼저 공병부대가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길을 닦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면서 엄청난 장애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 그리고 유대지도자들의 과격한 반대에 매번 부딪혀 번번이 돌에 맞고, 채찍에 맞고 쫓겨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23:12절에 보면 40여명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면서 바울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태한 상황속에서 복음을 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로마감옥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유자의 몸으로 있을 때 보다 오히려 더욱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28장 23절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사도행전 28:30-31
“30.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온 이태는 2년이죠? 2년동안 자기 셋집...셋집은 빌립보 성도들의 헌금으로 마련된 집이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연금된 상태로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시위대의 보호가운데 안전하게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감옥에 갇힌 것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 13절에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여기서 시위대는 가이사황제의 시위대를 말합니다. 그들에게 바울의 매임을 듣고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 가운데 복음을 듣고 회심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22절을 함께 봅시다.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마지막 문안인사로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 명도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이사의 집 사람들이라는 것은 가이사 황제의 직할 영지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고위신분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노예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증거된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심장부에 복음이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이 증거됨
결국 바울의 기쁨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처한 상황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처한 상황 때문에 오히려 복음이 증거되었기에 기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삶의 희노애락은 결국 복음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감옥에 갇혀도 복음이 증거되어 진다면 그것이 기쁜 것입니다. 그에게 질병이 있어도 육신의 고통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난다면 기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7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것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당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 표현에 칼로 도려내는 것 같다는 말을 하는데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떠나나게 하기 위해 세 번 간구합니다. 세 번이라는 것은 숫자적인 세 번이 아니라 정말로 간절하게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주어진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내가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함이라” 오히려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약함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질병이 고침받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그러나 바울은 질병이 고침받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문다면 그것으로 크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바울이 기적을 일으키며 베드로처럼 수천명의 사람들을 회심시켜야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옥에 갇혔지만 오히려 그것이 복음증거의 진전이 되기에 기쁘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현실적 상황은 고통스럽습니다. 24시간 쇠사슬에 메여있고 자유도 없습니다. 그리고 형집행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절망적인 현실조차도 기쁨으로 승화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처한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증거되고 있고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 신앙
이것을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적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 신앙관에 묶여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착각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되고 만사형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이유와 목적이 내가 잘되는 것에 있습니다. 미국의 레이크우스 교회를 담임하는 조엘오스틴 목사가 쓴 ‘잘되는 나’라는 책이 있습니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이 예수 믿으면 잘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건강도 회복되고, 사업도 잘되고, 자녀들도 형통하고....이러한 거짓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적인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 이미 자기중심적으로 가득찬 사람들을 자극하여 더욱 자기중심적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좋고 신실하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중심이면서 신앙적 행위 예를 들어 예배참석, 기도, 헌금, 섬김 등의 모습은 탁월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건강에 어려움이 오거나 사업에 실패를 하게 되거나 어떤 사고를 당하게 되면 굉장한 혼란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돌아오는 보상은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가? 내 삶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신가? 내 고통을 왜면하고 계시는가? 이러한 의문들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무너집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됩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바른 신앙은 그 중심이 자기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중심이 바뀌는 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내 생각, 나의 계획, 나의 가치관, 삶에 대한 인식, 상황에 대한 해석 등 모든 것을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나의 실패가 오히려 예수님께로 나오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면 그것을 실패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좌절하고 절망했지만, 이제는 기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의 건강의 문제가 나를 절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함으로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중심이 나에게 예수님에게로 옮겨질 때, 우리는 상황과 환경에 종속된 기쁨이 아니라 참된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더 들어볼까요? 13절부터입니다.
“13.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바울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형제들이 실망하고 지하로 숨은 것이 아니라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바울의 이러한 그리스도중심적인 모습으로 인해 형제들이 용기를 얻고 담대해진 것입니다.
“15.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5-17절은 X자 구조로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어법입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은 17절과 연관되고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는 17절과 연관됩니다. 여기 보면 당시 두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투기와 분쟁으로 전파하는데 그것이 바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자들인가 하면, 요란하게 복음을 증거하여 로마관원들을 자극시킴으로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정치적 핍박을 가중시키려고 했던 자들을 말합니다. 당시 복음의 내용이 예수는 주시다는 것입니다. 로마는 오직 황제만을 퀴리오스 즉 주라고 해야 하는데 예수가 퀴리오스라고 하니까 로마의 반역행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적대관계에 있던 부류가운데 요란하고 자극적이게 복음을 증거한 무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은 그들을 원망하거나 대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18절에 보면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은 자신이 처한 상황, 자존심등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 진다면 기쁘고 기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자기중심에서 탈피하여 예수중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합니다. 우리 삶의 이유와 목적이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전파될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서 기뻐하실까? 를 늘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내 삶에 손해가 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증거되고 기뻐하신다면 그 길로 가야 합니다. 나의 모든 선택의 순간에 자기유익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서 기뻐하실까 생각하며 결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비록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내 존재가치가 증명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증거 되어지고 기뻐하신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기쁨을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자리까지 인도하길 원하십니다. 이번 한주도 이 말씀을 붙잡고 예수중심의 삶을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겠습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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