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7/ 기쁨의 이유 2/ 2015.5.10
빌립보서 1:19-26/ 개역개정
19.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지난 시간 바울의 기쁨의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여 있지만 기뻐하고 기뻐하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계속적으로 전파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심장부에 까지 파고들었기에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바울의 기쁨의 이유는 자신의 환경이나 조건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리스도중심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기쁨의 이유 두 번째 시간으로 19-26절까지의 내용을 나누고자 합니다. 18절에서 바울은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고백합니다. 첫 번째 기뻐하고는 12-18절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고, 두 번째 “기뻐하리라”는 “또한 나는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는 의미인데 그 이유가 19-26절까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기뻐할 것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 시간을 통해서 기대하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기쁨의 원천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할 때 그것은 기쁨이라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비유하실 때가 많았습니다(마22, 막12, 눅13,14, 요2).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풍성함과 기쁨이 충만한 곳임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풍성한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이미(already)’ 이 땅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미’ 이곳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무엇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모진 고문을 겪고 결국 끔찍한 사형을 당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기뻐하며 살아갔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성경에 등장하는 특별한 경우이고 우리의 현실적 삶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서 우리 또한 그를 본받는 자리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기쁨의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
첫 번째로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풀려날 것을 믿었기에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19절에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이렇게 읽으니까 쉽게 와 닿지 않는데 새번역 성경이 이것을 잘 번역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압니다.”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바울의 석방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지금 무엇을 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석방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석방될 것인데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기도와 성경님의 도우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여러분의 기도만으로 또는 성령님의 도우심만으로 라고 말하지 않았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성령님의 인도,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 두 가지를 함께 강조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힘쓰고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떤 선한 결과가 맺어지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함께 병행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와 성령님의 인도입니다. 그러니까 만일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처할 때 그저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다리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를 배제한 체 인간적인 노력만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우리에게는 기도와 성령님의 인도 두 가지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어떤 좋은 결과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 성도님들이 기도해 주셔서 이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두 가지가 함께 강조될 때 균형 잡힌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분은 어머니와 외할머니입니다. 두 분은 평생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분들이십니다. 그래서 어떤 좋은 일이 있으면 그분들의 기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령님께서 늘 우리의 삶을 도와주십니다. 만일 성령님의 인도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많이 실수하고 잘못하고 죄를 지음에도 성령님은 이 자리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또한 비록 우리 각자의 삶에 어려움들이 있고 기도제목들이 있지만 성령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으면 기쁨이 생깁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살아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님의 도우심을 확신했기에 구원, 즉 풀려나게 될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바울은 기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 때문에만 기뻐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자유의 몸으로 풀려나게 되면 성도들과 함께 거할 것인데, 이를 통해 이루어가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기대하며 기뻐했습니다.
빌립보서 1징 25-26절을 보겠습니다.
“25.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25절에 “내가 살 것과”는 석방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그러고 26절에도 동일한 의미의 구절이 반복됩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함께 있음으로” 그러니까 석방되어 성도들과 함께 거하게 되는 것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25절의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나고 또한 주안에서 기쁨을 함께 누리는데 자신이 쓰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6절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과 함께 있으면서 가르치고 섬기는 사역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더욱 자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지만 자신이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석방될 것을 바라보며 기뻐했던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과 함께 거하면서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믿음이 성장하고 또한 진리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되며 우리 안에 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자랑할 수 있기에 그것을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기뻐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봅시다. 우리가 미래를 바라보면서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현재의 상황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현재 우리를 위축시키고 자유하지 못하게 하는 감옥과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좋은 직장을 구하고, 돈도 많이 벌고, 지금보다 더 좋은 집에서 사는 것, 사회적인 위치도 향상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자체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잠시 동안은 기쁨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습니다. 진정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음으로 그들을 섬기고 도울 수 있는 것, 그래서 믿음 안에서 함께 성장할 때 그것이 성도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거함
두 번째 기쁨의 이유는 바울은 비록 자신이 기대하고 소망하던 대로 풀려나지 못하고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거할 것을 믿기에 기뻐했습니다. 20-21절입니다.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여기 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바울의 석방을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원문의 뜻은 목을 길게 빼어 멀리서 오는 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접하려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는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 말씀이 보면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말하는데 그러한 자세를 의미합니다. 또한 바울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막8:28절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그러니까 바울을 감옥에 있으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증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살든지’ 라는 것은 결국 바울이 석방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죽든지’는 결국에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찌되었던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석방되기를 학수고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 위대한 고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의 삶의 이유와 목적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가 내 삶 전체를 주관함으로 죽는 다면 그것도 주님의 뜻이기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의미가 큰 차이는 없습니다.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이 그리스도이시며 그분께서 내 삶을 주관하심으로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고백을 진심으로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삶의 이유, 그리스도
사람마다 삶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 때문에 산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삶의 모든 모습은 자식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내 자신 하나 잘 키워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까? 그러기 위해서 지금 어떤 교육을 시켜야 하는지가 모든 관심사입니다. 이들 삶의 모든 희로애락은 자식에게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훌륭하게 키운 자식들이 부모의 곁을 떠나가면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자식을 위해 살았는데 이제는 삶의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하는 것이 삶의 이유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일을 하면서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업적을 남기고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 사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이들은 방황합니다. 아침에 눈을 떠 일하러 갈 곳이 없음을 깨달을 때 인생의 허무함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있어 삶의 이유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는 이 한마디로 대답합니다.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사는 이유는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산다는 것입니다. 삶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입니다. 지난 시간 함께 나눈 것처럼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입니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까지도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23.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할 것이기에 그것이 자신에 훨씬 좋은 일이기에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면 또한 기쁘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면 성도들과 함께 거하여 기쁘고, 죽으면 주님과 함께 거하기에 더욱 기쁘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면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기에 기쁘고 죽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에 자신에게 가장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를 그토록 사모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강했으면 죽음까지도 초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생각했던 인생관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기에 죽음조차도 사모할 수 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23절에도 보면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에서 ‘떠나서’의 의미는 텐트의 줄을 풀다, 또는 배를 묶어놓았던 줄을 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텐트의 줄을 푸는 것이나 배를 육지에 묶어 두었던 줄을 푸는 것은 목적지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땅에서의 삶이란 목적지로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텐트를 치고 살아가는 캠핑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3장 20절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지라”
베드로전서 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고린도후서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저도 외국생활을 해보았지만 떠나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이곳은 영원히 살아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삶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의 삶은 이 땅에서 텐트를 치고 사는 삶입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오라 하시면 텐트를 걷게 될 텐데 그것이 “떠나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어디로 갑니까? 우리의 영원한 집인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천상병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이것이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놓아도 주님께서 오라 하시면 나 두고 가야 합니다. 여행을 자주 다녀보면 누가 여행의 고수인지 초보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여행의 초보들은 짐이 많습니다. 외국여행을 가거나 또는 캠핑을 가거나 짐이 많습니다. 저도 처음에 그랬습니다. 혹시 쓸지 모르니까 많이 싸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실제로 쓰는 것은 얼마 안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경험을 몇 번 하게 되면 짐이 단출해 집니다. 어떤 것이 필요하고 어떤 것이 필요 없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행의 짐이 가벼워지면 여행이 편해집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풍 같은 인생인데 짐이 많으면 오히려 불편합니다. 우리는 많이 쌓을수록 쌓여진 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래서 떠나기를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늘 필요한 것만 소유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인생이 더 편해집니다. 그렇게 살다가 주님이 오라 하시면 훌훌 털고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떠나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천국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천국은 어떤 곳인가 하면 화려하고 안락한 곳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국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곳입니다.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가는 구나 이제 그곳에서 풍성하고 화려한 삶을 살게 되겠구나...하는 것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슬람인들이 가지는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우리에게 천국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그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은 죽어서 만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살아도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면 이 땅이 천국이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원하는 정말 멋진 집에 화려한 가구를 비치해 놓고, 풍성한 음식을 먹으며, 최첨단의 시설을 갖추고, 누구도 부러워하는 차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여러분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천국은 환경이 아닙니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천국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곳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연애를 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와 함께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냥 수단일 뿐이고 목적은 그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갑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행복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대학다닐 때 불렀던 노래중에 사노라면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비가 새는 판자집에 새우잠을 잔대도 고운님 함께 라면 즐거웁지 않더냐...”
상황과 환경이 우리의 기쁨을 좌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면 그곳에 천국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가사에 보면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구월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거하는 삶을 살 때 그것이 기쁨의 삶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완전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것을 조금씩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저 영원한 천국에서 완전히 누리게 될 주님과의 동행을 더욱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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