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8/ 어떻게 살 것인가? 2015.5.17
빌립보서 1:27-30
27.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빌립보서 강해 8번째 시간으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 중에 하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것입니다. 정말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이고 행복한 삶일까? 우리에게 있어서 아주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삽니다. 따라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대답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목적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소크라테스는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 과정은 삶의 목적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왜 공부해야 하는가?’...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 그렇다면 ‘왜 원하는 대학에 가야 하는가?’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서. ‘그러면 왜 좋은 직장에 취업해야 하는가?’ ‘안정된 직장을 얻어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그러면 ‘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야 하는가?’ 이렇게 계속 질문을 하다 보면 마지막에 이르는 결론이 행복하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행복해야 하는가?’하고 물으면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대답외에는 더 이상 없습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구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도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한 삶의 자세도 당연히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 가운데 표현되었던 대표적인 방식이 쾌락주의입니다.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첫 번째가 ‘에피큐로스학파’입니다. 이들은 가능한 많은 쾌락을 취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믿습니다. 감각적이고 순간적인 육체적 쾌락을 선으로 추구하여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에 치중합니다. 인생은 결국 죽으면 끝이니까 살아있는 동안 많은 것을 누리자고 말합니다.
또 한 부류는 ‘스토아학파’입니다. 이들은 진정한 쾌락은 지속적이고 정신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간소한 생활 속에서 영혼의 평화를 찾는 삶의 방식을 취했습니다. 또한 지적인 깨달음을 통해서 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의 삶의 특징은 금욕주의였습니다. 순간적인 육신적 쾌락을 절제하고 보다 고상한 정신적 쾌락을 추구한 것입니다. 오늘날 철학이나, 윤리학, 종교학등 지적 깨달음과 절제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한 문제를 소크라테스의 행복론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크게 두부류의 삶의 방식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하여 어떤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자녀가 또는 우리의 가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우리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존재론적인 대답이 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 대답이 뒤따를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정리하여 장로교교리로 엮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보면 첫 번째 문항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삶의 목적과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이 자신이 행복해 지는 것에 있지만, 성경의 진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선이자 행복해 지는 길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제 빌립보 성도들에게 실천적인 당부의 말을 합니다. 이전까지는 안부의 인사와 감사의 기도 그리고 자신을 걱정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하고나서 이제 본격적으로 성도들의 삶의 문제를 터치하기 시작합니다. 그 내용이 바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직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바울의 대답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대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의 실천적인 적용입니다.
여기서 ‘생활하라’는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시민답게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특별이 이 단어를 전략적으로 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도시의 특성과 빌립보인들의 시민의식을 염두에 두고 한 것입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퇴역 군인들을 정착시킨 군사도시임을 말씀드린바가 있습니다. 그곳의 시민들은 로마 식민도시 시민이라는 높은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로마는 당대의 정치, 문화, 경제, 과학의 최고수준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빌립보는 리틀 로마라고 불릴 만큼 로마의 최고수준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로마의 시민답게 살아가라는 것은 그러한 문화의 수준에 걸맞은 자부심과 책임 있는 행동을 하며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에 합당하게 시민생활 하라는 의미는 너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의 시민답게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나눈 것처럼 성도에게 있어서 이 땅에서의 삶은 거류민과 나그네로서의 삶입니다(벧전2:11).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입니다(빌3:20).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지만 잠시 동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은 비록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의 수준은 이 땅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고차원적인 삶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싱가폴은 청결의 도시로 유명합니다. 세 가지 청결을 자랑하는데, 수돗물의 청결, 공직사회의 청결, 그리고 거리의 청결입니다. 지금도 싱가폴에서 껌이나 침을 뱉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발각되면 태형을 맞고 엄청난 벌금을 냅니다. 껌은 아애 판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그 책임을 다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이 만일 우리나라에 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뜨는 것은 거리의 쓰레기와 껌일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익숙한 것들이 그들의 눈에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껌이나 침을 함부로 뱉는 다면 그것은 싱가폴 시민답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면 이 땅의 사람들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다운 수준 높은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은 복음의 정신과 가치관, 복음이 제시하는 방법에 따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성경의 대답입니다.
한 마음으로 서는 것
그러면서 바울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 번째가 한 마음으로 서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니까 “한 마음으로 서서” 여기서 ‘서다’로 번역된 말은 당시 군사적 용어였습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대모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때 전경에 간 친구들을 보면 자주 하는 훈련이 대모진압 훈련이었습니다. 운동장에 모여서 어깨와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오른 손에는 진압봉을 잡습니다. 일렬로 나란히 서서 전투화로 땅을 구르면서 한발한발 진격하게 되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위협적입니다. 이렇게 군인들이 어깨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적들의 공격에 대항하는 모습이 바로 ‘서서’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빌립보서 4:1절에 보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그러니까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 하나님 나라의 시민다운 삶은 첫 번째가 교회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서는 것입니다. 누구를 대항하여 서는 것입니까? 복음을 대적하고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이 세상의 악한 사탄과 죄악에 대항하여 서는 것입니다. 나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가 함께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 10절부터 보면
“10.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렇게 우리가 악한 권세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든든히 서 있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가 함께 거는 것입니다. 전에 대학에 걸려 있는 이런 문구를 본적이 있는데 ‘한 사람의 열걸음이 아니라 열사람의 한걸음으로...’ 마치 이와 같은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모습이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조금 앞서가는 사람들은 뒤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다려줘야 합니다. 뒤에 있는 사람은 뒤처지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깨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서야 하는 것입니다.
한 뜻으로 협력
두 번째는 한뜻으로 협력하는 것입니다. 27절 뒷부분입니다.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여기서 ‘협력하다’라는 말로 번역한 헬라어는 “함께 경기하다, 한 팀으로 싸우다”를 뜻합니다. 이 단어는 운동경기의 언어로서, 혼자씩이 아니라 하나의 팀을 이루어 투쟁한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군대에 가면 체육대회 때 꼭 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마전입니다. 보통 네명이 한 조를 이루게 됩니다. 등치가 있는 사람이 가운데 서고 양쪽으로 두 사람이 어깨를 손으로 감싸게 됩니다. 몸이 작고 날렵한 사람이 위에 목마를 타고 위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뒤쪽으로 밀리지 않게 받쳐주는 푸시맨이 서게 됩니다. 이렇게 대열을 이루어서 호각소리와 함께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네 명이 마음이 맞지 않게 되면 어떨까요? 우왕좌왕하다가 적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한 뜻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협력할 때 한뜻으로 협력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세상을 대항하여 싸울 때 뜻이 같아지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비전과 사명을 정하여 함께 공유합니다. 그것을 통해 각자의 뜻을 하나로 모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뜻으로 협력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2:2-3절에
“2.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바울은 교회가 오직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겸손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그것은 하늘보좌를 버리고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배워야 함을 말합니다. 이렇게 이 땅의 교회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할 때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 가운데 두려움이 없습니다. 28절 보시면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두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악한 영들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온갖 종류의 공격을 퍼붓습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 가족들에 대한 걱정들, 경제적 문제에 대한 두려움, 건강에 대한 염려 등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 공동체 가운데 앞날에 대한 염려로 인해 계속해서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근심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성도가 있다고 합시다. 그것을 그 사람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로 치부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함께 짊어지고 함께 서고 함께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28절의 말씀처럼 “무슨 일이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4절에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이러한 모습이 우리에게 있을 때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증거입니다.
28절 뒷부분에 보면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악한 권세들이 우리를 계속해서 공격하는 것은 저들이 결국 멸망받을 자들이라는 증거가 되고, 우리가 그들을 대항하여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협력하는 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하나됨과 협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지금도 하나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길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한복음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의 삶의 모습입니다.
고난도 은혜
세 번째 복음에 합당한 삶은 무엇인가? 고난도 은혜임을 알고 감당하는 것입니다.
29절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을 조금 원문에 가깝게 해석하면 “왜냐하면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은혜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서 고난 받는 은혜도 주어졌기 때문입니다”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은 은혜로 주어진 것은 이해하는데 고난도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고난은 우리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받는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받는 감정적인 상처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서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에 필연적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또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해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사단의 저항을 많이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당신의 백성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는 구조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받음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손해 볼 것을 감수해야 하고,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억울한 순간에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할 때도 있고, 편안함과 안락함을 뒤로하고 고난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편법과 불법이 관행이 된 사회에서 회사생활을 할 때 그리스도인은 그것에 대항할 때 갈등을 느끼고 핍박을 받기도 하고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접대문화가 관습이 된 사회에서 실력과 능력이 있는 사람보다는 그것을 요령 있게 잘 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성경에는 뇌물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고 말하지만, 세상은 뇌물을 통해 움직입니다. 여기에는 목회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제가 아는 동료 목사 중에도 아이들의 학교선생님에게 돈 봉투를 주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전혀 갈등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은 고난을 각오한다는 뜻입니다.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고난을 받으며 그것이 은혜임을 알고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순교의 자리에 담대히 나갔고, 집에서 내쫓김을 당하고 동네에서 이상한 사람 취급당하여도 그것을 은혜로 감당하였습니다. 만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초대교회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고난의 삶을 의미한다면 과연 얼마만큼의 성도들이 교회에 남아있을지 궁금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첫째, 한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 둘째, 한 뜻으로 복음을 위하여 협력해야 합니다. 셋째, 고난도 은혜로 받아야 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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