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19/진정한 가치, 예수그리스도/2015.8.8.
빌립보서 3;4-9
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립보서 강해 19번째 시간으로 “진정한 가치,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전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또한 그것을 얻었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어떤 일을 할 때도 자신이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 열심히 일하게 되고 또 보람도 느낍니다. 어떤 선택의 순간에도 보다 가치있는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을 선택합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도 집에서 쉬는 것보다 예배드리는 것이 더욱 가치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은 나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삶의 자세를 결정하고 삶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작동합니다. 따라서 내가 얼마만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치있게 여기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자입니다. 바울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의롭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통하여 정결함과 거룩함에 이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얼마 전 TV에서 “차마고도”라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네팔의 세 명의 젊은이들이 오체투지를 하며 수행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체투지란 양 무릅과 팔꿈치 이마등 신체의 다섯 부분을 땅에 닿게 하면서 절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성지에 이를 때가지 180일 이상을 그렇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지에 도착해서도 2개월 동안 계속적으로 오체투지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의롭게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마치 오체투지를 하는 젊은이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의롭게 되고자 애썼던 사람입니다. 그 결과 자신조차도 만족할 만한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 자신이 의롭게 되기 위해 추구했던 모든 것들이 무가치함을 깨닫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바울의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살피면서 바울이 발견한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4-6절까지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자랑할 만한 것들의 목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7-9절까지는 이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긴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해로 여기게 된 직접적인 이유와 목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바울은 자신의 자랑할 만한 것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두 종류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출생적으로 얻은 특권들이고 둘째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취한 것들입니다. 출생으로 얻은 특권들은 5절입니다.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라는 것입니다.
할례, 이스라엘 백성, 베냐민 지파
할례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백성됨의 표시입니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구별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것은 이방인 출신으로 할례 받고 개종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과는 구별된 순수한 혈통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베냐민 지파소속을 특별히 내세우는데, 베냐민이 누구냐 하면 야곱의 4명의 아내중에 특별히 사랑한 라헬의 두 아들중 하나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이 남북왕국으로 갈릴 때 유다 지파와 함께 남왕국을 이루어 하나님의 백성의 정통성을 지속했던 지파였습니다. 나아가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의 첫 왕이었던 사울을 배출하였고 전쟁 때 영웅적으로 싸운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원래 바울의 이름이 사울왕의 이름을 따서 사울로 지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매우 자랑스러운 지파였습니다.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히브리 부모들 사이에서 난 히브리인이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인”은 헬라파 유대인과 구별해서 쓰인 용어입니다. 당시 유대인은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유대인으로 구분되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은 로마 제국 등 이방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로서 - 그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불렀는데- 헬라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반면 “히브리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쓰는 유대인들을 지칭한 것입니다.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에서도 이민 1세대로서 히브리어를 쓰는 사람들이 회당을 중심으로 모였는데 그들을 히브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지금의 터키 남부의 다소 출신이지만 히브리어를 모어로 쓰는 가정의 출신이었음을 자랑합니다. 이것은 바울자신이 헬라문화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 유대인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시의 유대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자신의 출생자체가 상당히 탁월했고 누구도 부러워할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자신이 노력을 통하여 얻은 것들을 자랑합니다. 5절 뒤부터 6절에 보면“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세 가지를 자랑합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는 것은 자신이 얼마만큼 종교적 열심히 있는 자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하면 우리가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가 있는데 사실 바리새인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기독교적 측면이 아니라- 상당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종파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기 19장에 반영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삶을 살아야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를 위해 제사장이 아닌 중산층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자는 취지의 운동이 바리새주의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장들을 위한 정결법들을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불결한 것으로 부터 분리, 곧 정결과 성별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라는 명칭 자체가 분리, 성별, 구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인 이라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철저히 지키려 하였는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그 다음에 6절의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열심”이라는 단어는 단순히심리적으로 열심을 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를 지닌 개념입니다. 당시의 열심에 대한 구약적 배경을 추적해 올라가면 비스하스의 전통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출애굽 당시 가나안으로 들어가던 이스라엘인들이 그곳에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하고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그때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순결에 대한 열성으로 미디안의 여인과 동침하는 이스라엘인을 창으로 찔러죽입니다. 이 열성이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고 그에 대해 내려진 하나님의 재앙을 거두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주후1세기 중반에 당시 로마의 통치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비느하스의 열성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열심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전통에서 “열심”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그것들을 범하는 자들을 폭력으로 대항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런 태도를 가졌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범하고 이스라엘의 순결을 해치는 자들이라 생각하여 교회를 잔해하려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야 말로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더 열성적인, 유대교의 정통과 순결을 위해서 폭력을 불사한 맹렬파로서 비느하스, 그리고 열심당과 같은 신학적 전통에 섰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율법의 의’란 율법 안에 있는 곧 율법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를 말합니다. 이는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의를 말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의의 표준에 자신을 비추어 볼 때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때 절대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전혀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특별히 책망받을 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태생적으로 탁월했고 그가 노력하여 이룬 것들은 누구에게도 자랑할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한순간에 변화되었습니다. 자신의 자랑거리들이 한순간에 배설물처럼 여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7-9절까지 보면 자신이 지금까지 추구하고 쌓아놓은 가치들이 무가치함을 말하고 자신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유익이 아니라 손해
7절에 “그러나”로 시작하면서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해’란 손해, 손실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상업적 용어로 손익대조표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인생의 손익 대조표를 그려놓고 한쪽에는 태어나면서 획득한 그리고 살아오면서 노력하여 얻은 가치의 목록을 죽 썼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것이 ‘이익항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손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7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리스도를 인하여’ 또는 ‘그리스도 때문에’입니다. ‘위하여’는 목적이나 지향점 나타내지만 ‘인하여’는 어떤 일의 이유와 원인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손해로 여긴 까닭은 바로 자기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 현재 자기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곧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신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의 인간적인 유익과 가치를 다 포기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자기가 전에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긴 이유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줍니다. 8절에 보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고상함’은 뛰어난 것, 탁월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는 단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만남을 통해 그 탁월한 가치 모든 것을 능가하는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손해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손익계산표에서 유익의 항목들이 한 순간에 손해처리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들이 배설물로 여겨졌습니다. 최고의 가치를 발견하고 나니까 그동안 추구했던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마치 태양을 발견하고 나니까 자신이 붙잡고 있었던 것이 촛불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추구하는 모든 노력들과 성과들은 잘못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더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 직장에서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살기위해 애쓰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그러한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무가치한 것인가? 그래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신학공부하여 목사나 선교사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그러한 의미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3장에서 에서 유대인의 나음과 할례의 유익에 대해 말합니다.
1.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의 나음과 할례가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해로 여겼다’ ‘배설물로 여겼다’할 때 ‘여겼다’의 의미는 그러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 추구했던 것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손해로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아는 선교사님은 잘 나가던 정형외과 의사였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그동안 쌓아왔던 의술이 무가치하고 무의미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의술은 선교에 큰 도움이 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회심 전에 받았던 율법 교육과 인문교육, 신앙 훈련과 열심 등은 나중에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아주 귀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
이어서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했던 것을 이처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던 목적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것은 훨씬 더 좋은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8절 후반절과 9절 초반에 보면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귀한 보물이기 때문에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 중의 보배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자신이 소유했던 모든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손에 많은 것을 움켜쥐고 있으면 더 좋은 것을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려놓을 때만이 더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들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내려놓았습니다. 그 안에 발견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 우리는 참 생명을 얻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 생명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중에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주 예수 보다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주 예수 보다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전에 즐기던 세상 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주 예수 보다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맘 변치 못해
세상 즐거운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바울은 이어서 자기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인생에서 끊임없이 추구했던 것이 바로 의롭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종교적 열심과 선한 행위를 통해 그것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자신이 그동안 쌓아두었던 공로와 행위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룩해 지려는 모든 노력이 결국 의를 이룬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거룩과 그 빛 앞에서 자신은 여전히 초라한 죄인임을 발결한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다 하여도, 내 몸이 부수어지는 오체투지를 평생한다고 하여도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은 내안에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하여도 까마귀는 백조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죄인이 의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내 안에서 끌어 올릴 수 있는 최선의 선한 행위라 할지다로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길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길을 믿는 것입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이 길 외에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 길로 갈 때만 의롭게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얻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반면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얻어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 삶에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지요? 이루어야 할 목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만이 참된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내 인생의 가치도 그리고 인생속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크고 작은 일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미와 목적이 발견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많은 것들을 잃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었습니다. 내가 그동안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을 한쪽 면에 다 써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손해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오히려 유익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얻으셨다면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과 바꿀 수 없는 최상의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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