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5-08-17 09:13

빌립보서 강해 20. 삶의 목적과 자세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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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 20/삶의 목적과 자세/2015. 8.16

 

빌립보서 3:11-16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빌립보서 강해 20번째 시간으로 “삶의 목적과 자세”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전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인생의 목적은 나태한 삶에 탄력과 긴장감을 주어 보다 성숙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인생을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목표가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외국에서 목회할 때 보면 이민생활이나 유학생활에 성공한 사람들은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목표가 분명하면 인생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또한 현재 당하는 어려움이나 고통을 잘 인내하고 감당합니다. 왜냐하면 내 앞에 놓여있는 목표가 있기에 현재의 어려움은 과정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의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인생의 목적은 가치관에서 나옵니다. 내가 어떠한 것을 가치있게 여기느냐에 따라 목적이 설정됩니다.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사람,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 등 이러한 목적은 저마다의 가치관에 따라 그 우선순위가 결정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후 자신이 붙잡고 있었던 가치들이 하찮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는 이제 삶의 목적으로 이어집니다.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언급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구원받은 자의 진정한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10-11절을 보면 바울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성경에서 “앎”의 의미
여기 보니까 바울은 세 가지를 알고 싶다고 말합니다. 첫째 그리스도, 둘째 그 부활의 권능, 셋째 그 고난입니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는 “그의 고난에 참여함”에 보충 설명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싶고 그분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 싶고 예수께서 죽으신 것과 같이 그분이 겪은 고난을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내용이 그리스도, 부활의 권능, 고난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지식이 아니라 체험
먼저 “알고자 하여”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알다”라는 것은 지식적으로 또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저는 무씨와 배추씨가 어떻게 다른지 알지 못합니다. 만일 이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기 위해서는 세 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 인터넷이나 백과사전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책이나 매체를 통해 어떤 정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농부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어떤 것에 전문가의 지식과 경험과 학식을 통해 어떤 것을 아는 것입니다. 셋째, 직접 심어보고 키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방법 중에 어떤 것이 배추씨와 무씨를 진정으로 아는 것일까요? 책이나 인터넷은 단지 정보를 아는 것입니다. 전문가를 통해 아는 것은 피상적 지식입니다. 그러나 직접 심어보고 그것을 키우면서 아는 것은 배추와 무에 대한 체험적 경험적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기쁨을 줍니다. 음식 만드는 법을 안다고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듯 성경에서의 지식은 경험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의 의미를 “하나님을 아는 것” 또는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구원은 단지 깨달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은 17:3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0장 14-15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아모스 3: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하나님께서 ‘전지’하신데 다른 민족을 모를리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만 알았다는 것은 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앎”은 어떻게 생길까요?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고 공부하면 생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지성에 빛을 비추어 줄때만이 가능합니다.

고후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태초에 어둠과 공허 가운데 말씀으로 빛을 비추셨던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타락한 인간의 지성에 빛을 비출 때 비로소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됨을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믿어지게 되고 그리하여 그분과의 친밀한 연합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이 우리 가운데 계속 비추어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도O 교수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 해박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가진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자기의 학적 열심을 통해 얻은 것일 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아닙니다.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던 이어령 교수는 회심 전에도 성경을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문학과 신화로서 성경을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그의 지성에 빛을 비추어 주셨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열렸습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성을 열어주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실 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순종의 삶으로 이끕니다.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이 순종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순종은 예수님에 대한 더 깊은 확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선순환을 통해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식으로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들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기에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적 지식, 신학적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삶속에 순종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싶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바울이 알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0절의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요약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성경의 중심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이며 이 지식을 알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결국 바울이 알고 싶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이며 그 분이 걸어가신 길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가 죽음의 권능을 뚫고 부활하신 그 권능이 죄인을 어떻게 구원하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 깨달음과 지식은 적은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그의 생애를 이끌어 가는 동안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인 얼마나 영광스러운 길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에 대한 작은 지식이 성령님께 인도되어 순종하는 삶을 사는 과정 가운데 점점 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더 큰 순종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순교의 자리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을 때는 감옥에 있을 때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늘 두 가지 마음이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1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석방되어 다시금 성도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마음은 빨리 천국에 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되든 현재의 상황 속에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바라보았던 것은 현재 감옥에 있던 자유의 몸으로 있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더욱 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고난의 길을 자신이 걸어가면서 그것이 축복된 길임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침내 자신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부활을 영광을 얻게 될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짐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11절에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의 삶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고난 받고 예수님처럼 죽고 마침내는 예수님처럼 부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삶의 목적이 그의 삶을 휘감은 것입니다.

삶의 목적지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것이 그의 삶에 목적이 될 수 있었을 까요? 그것은 우리 목적지가 이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요한1서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우리가 이 땅의 삶의 마치고 마침내 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갔을 때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과 같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적지입니다. 예수님처럼 되는 것,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온유하게 되는 것, 그 분의 풍성한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것...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설레지 않습니까?
그것을 위해 지금부터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처럼 되는 것, 그 분을 닮아가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삶에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지금 달려가고 있습니까?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교회를 시작한 이후 내가 바라보고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빨리 교회가 성장하여 선교사들도 돕고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가 달려가야 할 목적이 아닙니다. 또한 제 삶의 목적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과 더 깊이 교제하고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더 많이 더 자주 체험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업적과 성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주님은 우리 존재의 어떠함을 보십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얼마큼 주님 닮은 모습으로 있는가를 보십니다.

 

바울의 삶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감으로 그분과 친밀한 교제와 연합가운데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3장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체험했기에 성도들이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 것을 깨닫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의 자세, 목적을 향해 달려감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에 자세에 대한 것입니다.
첫째, 목적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12절에 보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또 14절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가 인생에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삶의 목적을 바로 세우면 그 때부터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내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에게 붙잡혔기 때문에 이제는 그 예수를 더욱 붙잡기 위해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시작은 그리스도에게 붙잡힘으로 시작됩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어느 순간 그리스도에게 붙잡혀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내가 먼저 그리스도를 붙잡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잡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세상길로 죄악 길로 걸어가던 우리를 붙잡으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붙잡히게 되면 이제는 우리가 더욱 주님을 붙잡고 싶어집니다. 그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붙잡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 가치들은 붙잡을수록 허무해지고 때로는 인간성을 파괴시키는데, 주님의 가치는 붙잡을수록 더 행복해지고 겸손해지며 온전해 지는 것. 그것을 체험했기에 더 붙잡고 싶은 것입니다.

 

바울은 원래부터 열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의 열심은 잘못된 것에 대한 열심이었습니다. 잘못된 것에 대한 열심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참된 가치와 그것이 주는 인생에 목적이 세워진 후 그 열심은 올바른 열심이었고 그것이 결국 그를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에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달려가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스포츠 용어를 사용합니다. 마치 경주장에서 달리기 경주 하는 사람이 목표를 향하여 맹주하는 것처럼 그렇게 달려간다고 합니다. 인생에 진정한 목표를 발견한 사람은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달릴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상”이 무엇입니까? 14절에 보면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급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상급은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인 황금면류관이 아닙니다. 그 상급은 바울이  그토록 원하고 추구했던 목적이 달성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내 안에 있는 연약함과 허물로 인해 주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루지 못하지만 마침내는 믿음의 경주를 다한 후에는 주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룰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에게 푯대였고 상급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푯대이며 상급인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의 자세,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림
두 번째 목적을 위한 삶의 자세는 뒤에 있는 일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바울에게 있어서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일입니다. 특히 그는 스데반집사를 죽일 때에 찬성했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단편일 것입니다. 바울의 삶에는 잘못과 후회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척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에게도 과거에 잘한 일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습니다. 감사한 일도 많고 후회스러운 일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잘한 일 때문에 자랑할 것도 없고 잘못한 일 때문에 발목이 묶여서도 안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뼈아픈 실수와 과거가 우리 삶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것이 주님을 더욱 의지하고 신뢰하는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삶의 치명적인 실수도 주님을 닮아 가는데 있어서 선을 이루는 재료가 됩니다. 과거에 붙잡히는 것처럼 미련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앞에 놓여 있는 상을 위하여 달려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과거에 잘한 치적도 자랑할 것이 못되고 잘못한 것도 이젠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놓여있는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주어진 시간과 자원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을 선택하고 집중하는 것이 인생을 성공하는 길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선택과 집중이 중요합니다. 우리 앞에 남겨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우리의 젊음은 한순간에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아침안개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 물질, 일할 수 있는 능력도 오래지 않아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고 그 집중하시겠습니까? 30년 50년 후면 사라질 것들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것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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