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5-09-07 16:04

빌립보서 강해 23. 교회의 분쟁과 해결책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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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 23/교회의 분쟁과 해결책/

 

빌립보서 4:2-3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립보서 강해 23번째 시간으로 “교회의 분쟁과 해결책”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교회에서 상처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성도들 간에 갈등으로 또는 목회자에게 실망하여 교회를 떠난 이들이 많습니다. 교회를 떠나게 되면 새로운 교회를 찾게 됩니다. 이때 존경할 수 있는 목회자 그리고 따듯하게 반겨주는 성도들을 찾게 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아 보이고 은혜롭습니다. 그러나 성도들과 교제도 깊어지고 교회의 이런 저런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또 다시 갈등을 겪게 됩니다.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목회자에게 성도들에게 실망하는 일들이 생깁니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또 다시 교회에 실망한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한두번 겪다 보면 이젠 교회가 싫어집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큰 교회를 찾게 됩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예배만 드리고 일절 교회의 일이나 성도들과의 교제를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교회의 일이나 성도들과의 만남은 꺼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의 소속감은 떨어지고 믿음을 함께 나눌 사람들이 없는 탓에 신앙적 외로움과 고립감에 빠지게 됩니다.

 

왜 우리들은 교회에서 상처를 받게 될까요?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평안과 안식을 얻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있고, 미움이 있고, 싸움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허물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저마다의 연약함과 허물이 다 있습니다. 이것을 감싸주고 이해하지 않으면 언제든 갈등과 충돌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이것을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도 갈등과 충돌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 나름대로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있는 두 성도의 갈등을 해결하는 장면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문제를 살펴보고 그 해결방안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교회에 갈등이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빌립보 교회의 두 여성 리더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처음부터 여성들이 주도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우리가 빌립보서 강해 첫 번째 편에서 빌립보교회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 중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마게도냐인이 밤에 환상중에 나타나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원래는 동쪽으로 가던 길을 돌려서 마게도냐 지역으로 방향을 틉니다. 그리고 첫 번째 도착한 첫 번째 성이 빌립보입니다. 이곳에서 바울일행은 안식일에 기도할 장소를 찾게 됩니다. 보통 기도할 장소는 회당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땅히 기도할 장소를 찾지 못하자 강가에 모인 여자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가 하면 루디아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루디아가 누구인가 하면 두아디라시에 사는 자색옷감 장사였습니다. 자색옷감은 당시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입던 옷이었습니다. 사업차 그 자리에 온 것입니다. 그 루디아가 바울의 말을 듣고 있을 때에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서 복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루디아는 바울을 데리고 자신의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합니다. 그 결과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되고 그 가정에서 빌립교교회가 시작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빌립보 교회는 여성들이 주도권이 강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가운데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갈등과 충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2절에 보니까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이라고 말합니다. 바울과 함께 복음사역에 힘썼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충돌을 일으키고 갈등을 빚었을 까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문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교리적인 문제, 진리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교리의 문제, 진리의 문제에 관해서는 단호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문제로 인해 다툼이 있었다면 강한 어조로 책망하거나 내쫒았을 것입니다. 추측하건데 아마도 교회의 일들을 진행하면서 의견차이가 있거나 일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교회의 분쟁의 모습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의 양상을 보면

첫 번째, 교리적인 문제, 진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삼위일체를 부인 한다던가 성경의 기적을 부인하다던가 이단적인 사상을 믿는다던가 하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장로교의 교리가 있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이것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성경과 어긋나는 것들을 주장하여서 성도들과 교회를 흔드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교회는 말씀으로 그 성도를 교정 시켜야 합니다. 만일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는 내 쫒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진한 성도들이 오염이 되고 분열과 갈등이 심각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5:11-13절에 보면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1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두 번째, 윤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간혹 성도 가운데 간음을 한 사람, 사기를 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발생할 경우 교회는 그 성도를 치리해야 합니다. 교회의 치리는 범죄자와 증인을 소환 심사하고 심문할 수 있고 범죄한 증거가 명백할 때는 권계, 견책, 수찬 정지, 제명, 출교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는 해벌합니다.
누가복음 17:3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교회는 이러한 치리권을 바르게 사용함으로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지키게 됩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범죄한 자를 치리하지 않고 그 죄를 덮기만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회개의 기회를 주지 않으므로 그 영혼을 죽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가 심각성을 깨닫지 못함으로 더큰 죄로 빠지게 하는 방종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치리의 목적은 그 영혼을 살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바르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전에 00교회의 박00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떤 이야기를 했는가 하면 교회의 장로님 자녀의 주례를 맡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주례했던 신랑신부가 혼전임신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주례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당회를 소집하여 이 장로님을 치리했습니다. 몇 개월 동안 근신하게 한 것입니다. 근신이란 교회일을 하지 않고 자숙하는 기간을 말합니다. 만일 이것을 방치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의 장로의 자녀가 혼전임신 한 것을 담임목사가 인정한 것이 되고 교회의 장로들이 묵인 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교회의 청년들은 혼전임신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성도들이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전 그 목사님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한국교회가 교회내에 발생한 윤리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치리권을 사용한다면 한국교회는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일하는 방식이나 의견차이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일을 주도적으로 하다보면 각자의 의견차이나 일하는 방식 때문에 다툼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사람 이상 어떤 한가지 일을 함께 할 때는 반드시 충돌과 갈등의 상황이 생깁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각자가 살아온 방식이 다르고 경험한 것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어떤 한 가지 일을 하게 되면 당연히 부딪히게 됩니다.

 

분쟁의 해결, 복음에 집중
오늘 본문의 상황이 바로 이러한 상황입니다. 이때 교회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첫 번째는 복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울이 지금 이 글을 쓰는 목적 중에 하나가 빌립보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두 사람의 분열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복음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을 만난 자들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에 집중합니다. 사실 그러면서도 이 문제를 계속해서 염두해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1:27절부터 보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내가 너희에게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이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 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여기서 감옥에 있는 바울이 어떤 말을 듣고자 했다고 합니까?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을 듣고 싶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다는 것을 듣고 싶다는 것입니다. 또 2장 1절에부터 보면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편지 내용이 에바브로디도 편에 빌립보 교회에 도착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모든 성도가 모여 있는 가운데서 읽혀졌을 것입니다. 처음 이 내용을 접할 때 “아! 그래 우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야 해. 바울이 그렇게 그 소식을 듣고 싶어 하는데 우리가 그렇게 해야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울은 너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근거가 2:5절부터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으니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의 마음을 품어야 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디모데를 소개했습니다. 디모데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복음을 위하여 수고했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에바브로디도의 헌신을 소개하였습니다. 그가 죽기에 이르러도 자신을 섬겼던 그 헌신과 사랑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을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후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래 우리도 하나가 되어야해, 디도데 처럼, 에바브로디도 처럼, 그리고 바울처럼 살아야 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4장에 와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언급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유오디아와 순두개를 권하노니”라고 하지 않고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라고 말합니다. 각자 한명 한명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듣는 이 두 사람은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이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따듯한 권면을 합니다.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겠습니까? 그러나 한마디만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지금까지의 내용 1장부터 3장에 이르기 까지 했던 바울의 모든 말을 담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너희가 분쟁하지 말라”가 아니라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따듯하지만 아주 강력한 권면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먼저는 복음에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이처럼 한마디의 권면만 하여도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하다보면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도 마찬가지죠. 남편과 아내의 의견이 달라 갈등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문제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복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문제가 해결되기도 하고 닫혔던 마음이 열리기도 하며 우리를 분열시켰던 악한 권세가 떠나기도 합니다. 문제에 집중할수록 문제는 더 커지고 꼬입니다. 그러나 복음에 집중하면 우리 손으로 풀 수 없었던 엉켜있는 실타래와 같은 문제가 한 올 한 올 풀리게 됩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많은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조언이나 충고도 사람을 변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계속해서 듣고 복음에 집중하면 복음의 능력이 우리를 변화시켜 마침내 하나 되게 합니다.

 

주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문제 앞에서 복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특히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자들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여 그 분을 머리로 한 지체들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지체들이 분열과 충돌을 일으킬 때 당연히 머리에게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한 마음을 품으라”라고 하지 않고 “주 안에서 한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입니다. 한 마음의 기준이며 준거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지난 시간 말씀 드린 것처럼 “주님의 주권에 순종하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라는 의미입니다.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가 한 사람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주님이십니다.

 

만일 남편과 아내가 어떠한 결정을 앞두고 마음이 갈려 있다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자신의 의견만을 주장하면 상처만 남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상황에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갈등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자기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존심이 상하는 대부분의 원인은 열등감 때문입니다. 무시당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견을 더 강하게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답게 이루어져야할 하나님의 일이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고 좌절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뜻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권위에 순종
두 번째로 분쟁의 해결방안은 교회의 권위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 권위가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3절에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크게는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하나는, 이 사람은 빌립보교회의 리더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이고 바울과 함께 동역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빌립보교인들이 이렇게만 말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람이기에 굳지 이름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견은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를 고유명사로 보는 것입니다. 원어로 “쉬쥐고스”인데 “쉬쥐고스”라는 빌립보교회의 리더의 이름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바울이 서신에서 대부분 각자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까지 이런 이름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좋습니다. 어찌되었던 이 사람에게 바울이 부탁합니다.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저 여인들은 유오디아와 순두개를 말합니다. 즉 두 사람의 갈등을 해결할 한 사람을 지목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교회에서 어떤 직분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글을 읽었을 때 두 사람의 갈등을 해결하고 도와야 하는 역할을 맞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의 분쟁은 질서를 통해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질서는 권위라는 방식으로 세워집니다. 마치 바울이 함께 동역했던 사람을 중재자로 세운 것처럼 교회에서 세워지는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 맞는 권위를 부여받습니다. 즉 책임과 권위가 따른 다는 것입니다.

 

섬김의 권위
그런데 이때의 권위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의 권위는 갑과 을의 관계에서 갑이 아닙니다. 자신이 말에 나머지 사람들은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권위가 아닙니다. 이 권위가 잘못 오용되어 교회의 목사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어 자신의 말에 성도들이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되어 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이 권위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도록 잠시 동안 부여한신 권위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할 때 질서가 필요하고 그것을 운영하고 유지하기 위한 권한과 책임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국회를 보면 국회의장이 있습니다. 국회의장이 다른 국회의원보다 더 실력이 있고 뛰어나서 국회의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회의가 합리적이고 조화롭게 진행되도록 하는 역할을 국회의원들이 부여해 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권위는 그를 통해 교회의 일이 아름답게 진행되도록 부여해준 권위입니다. 그리고 그 권위의 집행 방식은 섬김입니다. 바울은 멍에를 같이 한 자, ‘쉬쥐고스’에게 저들을 도우라고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저들을 도우라고 합니다. 즉 권위는 지원하고 돕고 세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시하고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고 섬기고 헌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섬김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
이러한 섬김의 권위를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허물 많고 연약한 자들을 그분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하여 나무라거나 지시하거나 감정적으로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연약함이 있다면 기도하시고 인내하시면서 한 사람 한사람을 세워 가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누군가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보면서 저 사람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까? 어떻게 섬겨야 할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의 연약함과 허물이 드러날 때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허물 많고 연약한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기에 섬김의 권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언제든 상처입고 깨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내의 대부분의 분쟁은 섬기려는 자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저 사람을 도와서 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 주장만 고집하면 안됩니다. 교회내에서 리더의 역할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구역장, 셀리더, 목자, 성가대장, 찬양팀 리더, 교사등이 있을 것입니다. 이들의 역할은 가르치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를 섬기는 일로 권위가 부여된 것입니다. 제가 중고등부를 담당할 때도 선생님들께 늘 강조하던 것이 있습니다. 너무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가르침이 없어서 변화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기도해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자꾸만 가르치려고 하면 잔소리로 듣습니다.

 

이렇게 권위를 부여받은 자들은 섬김을 통해 성도를 세워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을 이러한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전체의 유익을 위해 마땅한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이 빌립보 교회에서 읽혀졌을 때, ‘바울과 멍에를 같이 한 자’는 저들을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또한 두 여인은 그의 말에 순종해야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리더들은 섬기는 권위를 통해 문제를 접근해야 합니다. 또한 문제에 연관된 성도들은 리더들에게 자발적인 순종을 해야 합니다.

이 땅에 교회는 불완전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언제든 분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이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복음에 집중하고, 섬기는 리더쉽과 자발적 순종을 통해 교회가 하나될 때 비로서 교회에서 천국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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