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24/주 안에서 기뻐하라/2015/ 9.13
빌립보서 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강해 24번째 시간으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 보니까 세 가지의 권면이 나옵니다. 첫째 주 안에서 기뻐하라. 둘째,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 셋째, 염려하지 말라. 사실 성도라면 이것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잘 압니다. 기뻐하며 살아야지, 관용하며 살아야지, 염려하지 말아야지...
그런데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것을 알지만 여전히 염려하고 걱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이러한 실천적인 명령 또는 권면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기뻐하라, 관용하라, 염려하지 말라와 같은 명령은 성도들이 가진 삶에 대한 인식,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 가치관 등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삶의 자세입니다. 이것은 마치 빙산의 일각처럼 우리 눈에는 기뻐하는 성도의 모습만 관찰되지만 그 밑에는 하나님 중심적이고 성경적인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이 거대하고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표면적인 명령만을 듣고 실천하려 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됩니다. 그것의 기초가 되는 성경적 기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 세 가지 명령의 성경적 토대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4절을 보니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두 번씩이나 기뻐하라고 하는 것은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강조입니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 감옥에 묶여 있습니다. 그가 언제 사형집행이 이루어질지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빌립보 성도들은 여러 가지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들은 빌립보 성도들은 어떠했을 까요? 그들 중에 바울만큼 고난과 어려움을 겪은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현재도 바울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은 계속해서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굉장한 위로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나하면 어려운 처지에서도 그렇게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은 말이나 아름다운 글을 쓸 수는 있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어떤 것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하는 말과 경험해본 사람이 하는 말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렇게 해본 사람, 그렇게 사는 사람의 말은 우리의 머리를 지나 심장까지 파고듭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동기를 유발시키고 자신감을 갖게 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기뻐하라는 명령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기쁨의 비결, 주 안에 있는 것
그렇다면 바울이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주 안에 있을 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라는 의미는 주님의 주권과 통치 안에서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그림언어로 보여주는 아무 좋은 본문이 있습니다. 제가 첫 번째 설교 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4-5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여기 보면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마치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여기서 “나”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가지니” 가지는 우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열매를 맺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기쁨”이라는 열매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염려가운에 있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두 번씩이나 강하게 명령하는 것은 지금 너희가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붙어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를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너희가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지속적이기에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하나님의 사랑, 항상!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항상 붙잡고 있기 때문에 너희가 항상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것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 삶의 현실적인 문제들과 미래에 대한 염려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묵상하기 보다는 내 발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또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염려가 우리를 휘감고 있습니다. 결국 녹녹치 않은 삶의 상황과 여건에 종속되어 결국 기뻐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바울처럼 상황과 여건을 초월하여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이것에 대해서 6절에 그 해결방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먼저 “염려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염려가 없어야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는 여러가지 염려거리들이 있었습니다. 옥에 갇힌 바울에 대한 염려와 바울을 위문 왔다가 병에 걸려 위태해신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염려, 그리고 복음 전파에 대한 염려와 교회에 대한 염려, 그 외에도 일상생활에 대한 염려 등 여러 가지 염려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선 “염려하지 말라고”고 말합니다. 그것은 염려가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 그리고 그 결과로 기뻐하는 삶을 막고 있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가족에 대한 염려, 진로에 대한 걱정, 사업에 대한 염려, 노후에 대한 걱정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말씀을 통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 초등학교 아이가 염려하고 있습니다. 내일 미술 준비물을 가져가야 하는데 살 돈이 없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행여 깡패를 만날지 걱정합니다. 아빠가 아이를 보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애야 염려하지 마라” 이 말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빠가 필요한 준비물 사준다는 것입니다. 내일 학교 가는 길에 동행해 준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믿음
결국 우리가 염려하지 않고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두렵고 염려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 약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을 신뢰할 만큼의 나는 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 인생을 내가 주도하고 책임져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불안하고 걱정되는 것입니다.
결국 내 삶을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인도하시며 붙잡고 있음을 믿지 못할 때 염려가 생깁니다. 그래서 염려는 불신앙입니다. 염려가 많고 근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성경의 좋은 예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큰 광풍과 파도를 잠잠케 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큰 광풍이 일어나서 파도에 배가 부딪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당시 제자들은 대부분 뱃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풍랑을 헤쳐 나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은 몹시 피곤하신 터라 배의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외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때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 말씀이 떨어지자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 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의 무서움의 이유가 바로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는 것을 실제로 목격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어떤 믿음인가 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만유를 통치하시는 분임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그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향하여 외친 외침이 “선생님이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의 반응을 성경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도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막4:41)”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두려움은 다릅니다. 풍랑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말씀 한마디로 자연을 복종시킬 수 있는 분에 대한 경외감이었습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삶의 상황이 우리를 두렵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염려와 근심에 빠집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의 상황에 누가 함께 계십니까? 주님이 계십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항해 길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주님을 선생님 취급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말씀 해주시는 선생님, 나보다 인생의 경험이 많으신 선생님 정도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로 예수님을 만유의 주권자로 믿는다면 염려할게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배에 함께 하신다면 그 배는 결코 파선하지 않습니다. 안전하게 목적지 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문제는 내가 그 주님을 믿느냐 못 믿느냐의 문제입니다. 믿으면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면 염려하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입는 기본적 필요가 채워지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평생 그것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주님은 먼저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십니다. 당시 이 말씀이 산에서 선포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하늘에 날아가는 새가 보였던 것 같습니다. “공중에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 첫 번째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이것들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저 날아가는 새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너희들을 그냥 두시겠냐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귀한 자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핏 값을 주고 산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께서 반드시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러니 염려할 것이 무엇입니까?
두 번째, 주님께서는 이번에는 제자들의 시선을 백합화를 향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자”
솔로몬의 옷보다 아름다운 백합화지만 시들면 결국 아궁이의 불쏘시개로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것을 아름답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하물며 너희가 백합화보다 귀하지 않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결국 여기서도 주님께서 염려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32절인데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사 자녀들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이러한 영적진리위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임을 믿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분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무엇이 두렵고 어떤 것이 염려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막연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 어떤 신념이나 자기 확신도 아닙니다. 말씀위에 세워진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것이 있을 때 비로소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
두 번째, 기도할 때 염려가 사라집니다.
6절에 보면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바울은 염려하는 대신에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뢰야 하는가? 우선 “모든 기도와 간구로”아뢰라고 합니다. “기도”라는 말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모든 행동을 다 포함하는 보편적인 의미를 가진 말이고, 두 번째 나오는 “간구”는 우리의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우리의 염려거리들, 소망하는 것들, 해결되어야 할 문제,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구할 것들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마7장)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는 이는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 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염려가 생길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간청해야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몰라서 구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응답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주셔도 되지만 기도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염려가 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는 할수록 그 크기와 무게가 커집니다. 염려는 씨앗과 같아서 우리 마음에 심겨지면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위축시키시고 절망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염려가 찾아오면 곧바로 기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거나 아니면 그 문제가 이겨낼 능력과 지혜를 주십니다. 우리 삶에 염려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너희중에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마6:27)”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 염려만 합니다. 그럴 때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느끼는 문제의 크기만큼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바윗덩어리 같았던 문제가 어느 순간 탁구공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데 자신감이 생깁니다. 문제에 맞설 힘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심리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니 염려 앞에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기도할 때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했습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헤아려 보고 그것을 기억하여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 이전까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체험했지만 염려의 씨앗이 심겨지면 은혜는 사라지고 염려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한가지 한가지 떠올리다 보면 어느 순간 염려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하고 감사함으로 아뢰면 그 결과 우리에게 이러한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7절에 보면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그냥 하나님의 평강이 아닙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곧 우리의 이성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놀랍고도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 평강이 우리에게 어떻게 임하는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방법으로 임합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것은 군사용어입니다. 마치 수도방위사령부가 서울을 옹위하여 외적으로부터 방어하듯이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마음과 생각입니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내 의지와 반대로 향할 때가 많습니다. 염려하지 않고 싶지만 염려가 되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불안해하고 싶지 않지만 계속해서 불안한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 마음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두 분의 권사님을 모시고 심방을 간적이 있습니다. 약1시간 정도의 거리를 차를 몰고 간 것입니다. 외국에 있다가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되었기에 권사님 한분이 제가 운전하는 것이 미덥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운전하는 동안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등을 곧추세우고 긴장하고 계셨습니다. 빨간 불이 켜지면 “스톱! 스톱!”을 외치시고 조금 빨라질라 싶으면 “천천히! 천천히!”를 외치셨습니다. 다른 권사님은 저와 함께 대화도 나누시고 경치도 즐기시면서 그렇게 목적지까지 도착하였습니다. 이 두 분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분은 한 시간 동안 염려하며 불안해하며 그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다른 권사님은 편안하게 그 시간을 즐겼습니다. 두 권사님의 이러한 차이는 과연 어디서 비롯되었을까요? 그것은 운전자를 신뢰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 시간을 염려하고 불안해하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기뻐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우리 삶의 운전대를 붙잡고 계신 분을 얼마만큼 믿고 신뢰하는냐의 문제입니다. 나는 실수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항로에 운전대를 붙잡고 계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결코 실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 분을 믿으시고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주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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