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핵심진리 4. 구원자를 준비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22:14
14.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기독교의 핵심진리 4번째 시간으로 “구원자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3주간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배웠고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의 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로 인류는 악과 고난 속에서 살면서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창세기 3장의 타락의 장면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쫒겨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에덴은 천사들이 두루도는 불검이 지키고 있어 다시는 창조때의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성경은 창세기 4장에서부터 인간의 타락이 어떠한 모습으로 확정되어 나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창세기 4장에는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가인과 아벨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낸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십니다. 그때 가인은 분노합니다. 그리고는 아벨을 들판에서 쳐 죽입니다. 과연 가인의 분노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누구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분노입니다.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는 하나님이라면, 그분이 창조주일 지라도 죽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 눈에 보이는 동생을 쳐 죽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이렇게 악한 것입니다. 창조주를 향하여 도끼를 들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의 모습을 직면하게 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너무나 마땅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죄의 역사는 과격하게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인류가 번성하고 문명을 이룰수록 그 파괴력은 점점 더 강력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6장에 와서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조 때에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보시며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들을 보시며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신 것입니다. 인류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를 물로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의 가족만을 살려내십니다. 그리고 노아의 가족을 통해 새로운 인류를 구성하십니다. 그러나 그들도 여전히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홍수의 심판을 기억하고 시날 평지에 모여 바벨탑을 쌓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문명을 개발한다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사 지면에서 흩어 버리십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모인 곳에는 죄가 과격하게 번성합니다. 문제 청소년들을 일대일로 만나보면 거의 대부분 착합니다. 그런데 두세 사람 모이면 과격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인류 가운데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그것은 한 인물을 불러내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와 계획 그리고 그 방법까지 소상하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는 원래 믿음의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가십니다. 그의 원래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 것 중에 하나가 거짓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사랑하는 아내라 할지라도 누이라고 거짓말하는 그것도 세 번씩이나 했던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의 연약함과 허물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연약한 자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가십니다. 그에게 약속하시고 그것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시며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임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믿음이 어느 정도 성숙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시험을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읽은 창세기 22장의 배경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시험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되어 이해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자, 또는 ‘여호와이레’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인생길에 앞서가셔서 준비하시니까 우리는 그 분께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식의 이해의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되겠지만 본문의 말씀은 그러한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이 본문을 기독교의 핵심진리로 소개하는 것은 이 말씀은 구약전체를 관통하여 이해하는 눈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성경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귀한 말씀을 잘 이해할 때 하나님의 구원의 그 놀라운 은혜를 깨닫기 때문에 오늘 본문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창2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본문은 아주 이상하고도 독특한 시험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이유에서 이 시험은 매우 독특합니다.
첫째, 인신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번제는 제물을 죽이고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당시 이방종교의 풍습 가운데 인신제사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단 한 번도 요구하시거나 받으신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명하신 것일까요?
두 번째, 번제로 드리는 장소입니다. 당시 아브라함이 살던 곳에는 많은 번제단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리아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산”이라고 정확하게 번제의 장소를 지정하셨습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삼일 길을 걸어가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무심한 명령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삼일 길을 걸어가면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번제의 장소를 모리아 땅으로 지정하셨을까요?
세 번째, 이삭에 대한 호칭입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삭을 호칭하시면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이삭이라고 말해도 될 텐데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무심함입니다. 그냥 이삭이라고 해도 마음이 찢어질 텐데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굳이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계속해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3절,4절입니다.
“3.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아브라함은 이러한 시험 앞에서 즉각 적인 순종을 결심합니다. 3절에 보면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 만큼 그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순종의 사람으로 연단되고 훈련된 것입니다. 그는 나귀의 등에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올리고 이삭과 함께 두 명의 종을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4절에 보니까 “제 삼일에” 삼일 길을 온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 장소를 멀리서 바라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번제의 장소에 대한 시선으로 우리를 주목시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멀리서 바라보았던 그곳을 우리도 주목하라는 의미입니다.
5절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이제 아브라함은 번제의 장소 근방까지 온 듯합니다. 이제 모리아산을 오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장소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이삭과 단둘이 그 산을 오르게 됩니다. 모리아산을 오르는 그들의 모습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이삭은 자신을 태울 번제단을 어깨에 짊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한손에 이삭을 죽일 칼을 쥐었고 또 한손에는 그를 태울 불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땀을 흘리며 한걸음 한걸음 죽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제 잠시 후면 아버지는 아들을 죽여야 합니다. 아들은 영문도 모른 체 아버지의 손에 죽임을 당하여 태워지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그때 아들이 아버지에게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이렇게 묻습니다.
7절입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삭은 번제할 양이 없음을 이상히 여겨 질문한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이삭의 너무나 당연한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옳은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그의 입술을 빌려 하나님의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이 대답이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분명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게 될 것입니다.
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 대답합니다.
9,10절입니다.
“9.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 아브라함은 왜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바로 그곳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관심이 이 장소에 고정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어깨위에 올려 졌던 번제단을 내려 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 쌓여졌을 때였습니다. 그 위에 다른 것도 아닌 이삭을 올려놓았습니다. 이삭은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자신이 아는 것은 내가 번제단 위에 올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오른손의 칼이 자신의 향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였습니다. 하늘로부터 급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11,12절입니다.
“11.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며 그의 칼이 멈추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주 이상하고 독특한 이 시험에 아브라함이 합격했음을 말씀하십니다.
13,14절입니다.
13.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브라함은 번제단에서 이삭을 내리고 수풀에 걸려있는 숫양을 가져가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그 양을 번제로 드립니다.
여러분! 이 이상하고 독특한 시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누구나 한번만 읽거나 들어도 잊혀질 수 없는 이 강렬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할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 축복받았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의 문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할 것인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14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기서 말하는 “오늘날”이라는 시점은 언제일까요.
창세기는 누가 썼습니까? 모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 책을 쓰고 있는 시점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사건으로부터 약66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한세대를 30년이라고 할 때 22세대가 지난 시점입니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모리아산을 바라보면서 뭐라고 했다고요? “여호와이레”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와 함께 그 산을 지날 때 자녀에게 “애야 이 산에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렸는데” 하면서 이야기를 계속 전수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곳을 “여호와이레” 무슨뜻입니까?
14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이레, 여호와이레”하면서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것을 입에서 입으로 전수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산에서 무엇이 준비된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제가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이삭의 질문에 아브라함이 했던 대답 기억하십니까? 8절입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바로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서 번제할 어린양을 준비하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준비하실다고요? “자기를 위하여” 어떻게요? “친히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 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렇게 “여호와이레”하면서 이 산에서 여호와께서 어린양을 준비할 것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 글을 쓰고 난후 시간이 흘러 440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솔로몬은 이곳에 성전을 세웁니다. 당시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성전문을 열고 들어가면 피 냄새가 진동하였습니다. 해마다 흠 없는 양과 소를 드려 자신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동물의 제사를 드리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수천수만 마리의 양과 소를 드려도 여전히 자신들의 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동물의 제사는 불완전한 제사여서 이것으로는 인류의 죄를 해결할 수 없음을 철저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의 죄를 해결할 완전한 속죄 제사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약220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한 선지가가 나타나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그는 바로 이사야입니다. 그는 이렇게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분! 이제 곧 메시야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야는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는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입니다. 멸치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징계와 채찍을 맞을 것이며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이 있은 후 221년이 흘렀습니다. 장소는 요단강가입니다. 한 사람이 회개의 세계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례요한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운집해 있었습니다. 그때 저 쪽에서부터 한 사람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가 가까이 오자 세례요한은 그가 누구인지 직감합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외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저기 걸어오는 저 분을 보십시오. 저분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그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대답했던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했던 그 어린양이 인류 역사 가운데 등장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했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메시야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3년 동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으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56절에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한복음에서 나의 때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보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2천 년 전의 사람인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천 년전 이삭이 그러했던 자신이 죽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갑니다. 그 곳은 바로 모리아 산이었습니다. 바로 이삭이 번제로 드려졌던 그 곳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인류의 구원의 방식, 구원자 그리고 그 장소까지 정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2천년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 사람,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위하여 준비하신 인류의 죄를 담당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실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사랑하는 독생자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독생자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당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구원을 이해할 수 없으니 이렇게 라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독생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아브라함의 심정을 조금이라고 헤아려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 편에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이루어진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아들을 죽이는 대가와 상처를 지불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구원받은 것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니까 그 정도는 해주셔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에 그 어떤 부모가 죄인을 위하여 자식을 죽이겠습니까? 그것도 자신을 향하여 칼을 겨주고 있는 자들을 위해 자식을 내어주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치르신 대가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연민의 감정을 원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성도들의 찬양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7장입니다.
9.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11.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우리가 이 땅에서 불러야 할 찬양 그리고 영원토록 불러야 할 노래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 구원을 이루신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세세토록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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