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핵심 진리 2.인간의 타락/2015.10.25.
창세기3:1-7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기독교의 핵심진리 두 번째 시간으로 “인간의 타락”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3장을 나누게 될 텐데요,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모든 문제의 뿌리가 바로 인간의 타락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한 동의하지 않으면 그 해결책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가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해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3장은 우리에게 문제가 무엇인지 말해줍니다. 우리가 창세기 3장을 바르게 이해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깨닫게 됩니다. 물론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창세기 3장에 대해서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시간은 그동안 알고 있던 지식들을 종합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창세기 3장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3장은 인류의 타락의 역사적 사건을 다룬 장입니다. 실제적으로 역사 가운데 인간이 하나님 앞에 타락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기록함에 있어 그 방식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뱀이나 동산 중앙의 나무나 옷을 입음과 벗음, 생명나무 길을 지키는 두루 도는 불검 등은 상징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을 차근차근 살피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인류가운데 죄가 들어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기원
먼저 우리는 사단이 어디서부터 기원되었는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1절에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사단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중에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단이 하나님과 대등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한 신이 있고, 악한 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악한신은 하나님과 대등한 관계로서 그 능력과 권세가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사실을 알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단을 더 이상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피조물 중에 하나가 반역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악한 피조물을 창조하였는가? 선하신 하나님에게서 어떻게 악한 신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 하더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간교한 피조물을 창조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문을 살펴보면 이 “간교”라는 단어가 “지혜롭다”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총신대 유재원 교수는 모세오경을 원어로 해석하였는데 그곳에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지혜롭더라” 또 이 단어가 쓰인 다른 곳을 보면 “슬기로움”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잠언 12:23절에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 잠언 14:18절에는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그러니까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긍정적으로 쓰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악한 것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창조된 피조물중 하나가 반역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인간의 타락 전에 지혜롭게 창조된 천사가 타락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어떤 반역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뱀이 이제 여자를 유혹합니다. 뱀은 사단의 상징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가 유혹하는 방식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러분! 이 질문 하나로 하와는 무너집니다. 우리가 이 질문에 숨겨진 사단의 의도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창세기 2장 16-17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다 누리게끔 하셨습니다. 단시 한 가지 금지 시키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선악과는 먹지 말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간혹 전도하다 보면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셔서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로 창조하셨는가 하는 질문도 합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렇습니다.
선악과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을 구분 짖는 어떤 경계선과도 같습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바라보면서 창조주의 말씀에 순종해야 되는 존재로 늘 인식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고 우리는 그 분께 순종해야 하며 경배해야 되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또한 그 분께 의존되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장치였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경배하며 의존된 존재로서 살아갈 때 에덴동산의 모든 것들을 다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을까?
두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즉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중에 인간이 가장 탁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을 택할 수도 악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자유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단지 로봇과 같을 것입니다. 단지 명령에 복종하는 단순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 존재를 하나님은 굳이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순종하기를 원하셨고 또한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정교하게 로봇을 만들지라도 그것을 보면서 “정말 사랑스럽다, 너로 인하여 기쁘구나”하는 마음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유의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탁월한 존재는 판단과 선택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탁월함은 그 반대의 측면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선하고 아름답지만 만일 악해지려고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악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는 선하든 악하든 거기서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러나 개는 소보다 더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개보다 더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습니다. 평범한 성인은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천재적인 성인은 어떨까요? 그렇다면 천사는 어떨까요? 이것이 바로 탁월함을 가진 피조물의 특징입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입니다. 가장 탁월한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선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할 수도 있고, 가장 악한 모습을 하나님을 모독할 수 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인간 창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가진 그 자유의지로 선을 선택하고 자발적인 순종과 경배를 통해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며 그로 말미암아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단의 기만적 질문
그런데 이러한 존재가 사단의 질문 하나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 질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마치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존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에덴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지 말하고 했니?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니? 너의 자유를 빼앗고 네가 잘 되고 행복한 것을 그렇게 못마땅해 하는 분이 아니니? 라는 의도가 이 질문에 교묘하게 깔려 있습니다.
이 질문의 간교함은 바로 하나님을 마치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존재로 그리고 있고, 또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진리이고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 드린 바가 있습니다. 사단의 전략이 먼저 인간의 생각의 영역을 휘집어 논다는 다는 것입니다. 하와에게 질문을 던져놓고 창조주를 판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하와는 이렇게 해야 옳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다 누리게 하셨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분께서 주시는 풍성한 삶을 마음껏 누리게 하셨어. 그런데 너는 지금 하나님을 마치 나의 행복을 가로막는 분으로 만들고 있어. 이 악하고 더러운 사단아 물러가라”
그런데 하와는 그렇지 하지 않았습니다. 2-3절입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이미 하와는 사단의 유혹에 반은 넘어간 상태입니다. 하와의 대답을 다시 한 번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과 우리가 읽었던 2장 16-17절 말씀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먼저는 17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지금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고 말합니다. 하와는 생각해 보니까 “그래 하나님이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어” 지금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이 순간 이미 하와는 하나님이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막아서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17절에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뭐라고 합니까? “죽을까 하노라” 말씀에 대한 약화요 타협입니다. 엄위하신 창조주의 말씀을 과장하고 약화시킨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단은 기세등등해 졌습니다. 이미 하와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4절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전복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고 사단은 순종하지 않아도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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