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핵심진리 3/죄의 결과/2015.11.1.
창세기 3:16-19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기독교의 핵심진리 3번째 시간으로 <죄의 결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의 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 분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것에 반하여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자신을 위하여 살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단지 열매를 하나 먹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고 살아가겠다는 의지적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바로 “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죄는 히브리어로 ‘하마르티아’인데 이것은 과녁을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그 목적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아노미아’인데 이것은 불법이라는 뜻입니다. ‘아노미아’는 법이 무시하거나 파괴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자기 스스로가 법의 설립자요 집행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선과 악의 판단주체가 내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 원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죄로부터 인간의 모든 죄가 발생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원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간혹 아기들의 예쁜 눈망울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아기들이 죄가 있을 수 있나요?” 물어봅니다. 또는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 묻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기들일수록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아기들이 엄마를 배려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아기들일수록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치원 아이들이 싸울 때 어떻습니까? 한 대 때리고 도망가면 가서 두 대 때립니다. 두 대 맞은 아이는 세대 때립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상처받는 것에 대하여 참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보복하려고하기 때문에 더 큰 보복을 막기 위하여 상대가 눈을 상하게 했으면 눈을 상하게 하는 것으로 싸움을 끝내게 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사랑으로 가득차 있기에 자기를 무시한 것, 상처 입힌 것, 인정하지 않는 것 등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기쁨으로 순종했던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는데, 이제는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죄로 말미암아 어떠한 결과가 주어졌는지를 보여줍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창세기 3장을 통해 인간의 죄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
첫 번째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8-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죄를 범하고 난후 인간의 첫 번째 행동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0절에 보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이 두려운 것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이 두려운 것입니다. 죄가 없을 때 인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그 분께 예배하는 것,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으로 부터의 분리로 인해 인간은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죽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서 분리되어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인간은 원래 영생하는 존재였습니다. 영생이란 영원히 사는 시간적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뿌리 뽑힌 나무는 죽은 나무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진 생명력으로 어느 정도 살 것입니다. 그래서 나뭇잎도 있고 열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뿌리 뽑힌 나무가 산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있을 때는 신적 생명을 공급받아 영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은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도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진 생명력으로 잠시 살뿐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죽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이 계속해서 병들고 나약해지는 것입니다. 질병이라는 것도 죽음의 증상입니다. 감기에 걸리면 기침이 나고 열이 나는 증상이 나타나듯이 우리가 죽음에 걸려있어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가 죽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20대의 아름다움과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일지라도 꽃이 시들어 떨어지듯이 잠시 뿐입니다.
두려움, 불안, 결핍, 좌절
또한 하나님의 지혜에서 분리되어 두려움과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원래 인간에게 두려움이나 불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된 인간은 지혜가 제한되어 한치 앞에 일도 알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늘 두려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근원으로 분리되어 불안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기들이 어머니로부터 분리될 때 불안을 느끼는 것처럼, 창조주로부터 분리된 인간은 그 내면에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불안이 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힘이 제한되어 있기에 실패와 결핍을 맛보며, 그의 사랑이 제한되어 있기에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자원의 제한
이렇게 생명, 지혜, 힘, 사랑 등의 제한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의 자원도 제한되었습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석유의 경우 앞으로 50년 안에 고갈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물입니다. 석유는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고 해도 물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지구의 70%가 물이지만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물은 1.27%밖에는 안 됩니다. 세계적으로 3000여개의 강이 두 개 국가 이상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으며 이 강을 중심으로 세계 인구의 35-40%가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도나우 강은 17개국을 거쳐 흐르고, 콩고 강과 니제르 강은 11개국, 나일 강은 10개국, 아마존 강은 9개국에 거쳐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북한강과 임진강 북한과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만약 수자원 확보에 문제가 발생하여 악화될시 에는 여러 국가에서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분쟁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1967년에 발생한 6일 전쟁은 시리아가 요르단 강 상류에서 물길을 차단하자 이스라엘이 전면적으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나일 강을 중심으로 에티오피아와 이집트가 갈등관계에 있고, 중국은 메콩 강을 두고 미얀마,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과 갈등관계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나라도 가뭄이 계속된다면 물을 둘러싸고 지역 간에 갈등이 일어날 확률이 높습니다. 이러한 자원의 고갈도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왜 유치원 때부터 그렇게 영어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도 자원의 부족 때문입니다. 자원은 제한되어 있고 그것을 차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으니까 인류가 약육강식, 적자 생존하는 동물적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회적 강자가 되기 위해 어릴 적부터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사이의 단절
두 번째,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 사이에도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11절과 1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기 보니까 아담이 자신의 죄의 원인을 하와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라고 말함으로 죄의 원인을 하나님에게 전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만큼 인간이 악해 진 것입니다. 원래 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관계였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의 첫 만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이끌어 오실 때에 아담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리고 이 둘은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남녀가 부부가 되어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자녀를 생산하고 양육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세워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해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약함을 채우는 방식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스스로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결혼을 통하여 하나가 되어 온전해 지는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인데 왜냐하면,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31.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32.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남녀가 결혼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이 큰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합니다. 즉 결혼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좀 더 자세히 다루게 될 텐데요, 여기서 아셔야 할 것은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함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드린 사랑과 교회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하고 순종하는 아름다운 관계를 깨달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자리가 어디인가 할 때 그것은 부부사이입니다. 이것이 되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위선이고 가식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는 곳이 어디인가 할 때 그것은 먼저 가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그것은 남편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가 또는 아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부부 사이에는 서로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당신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남편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고백이고 아내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감추어야 하는 존재
그래서 성경전체에서 보여주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중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가 바로 남편과 아내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신랑이고 우리는 그분의 신부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가서 같은 경우 진한 사랑의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우리가 나누는 사랑의 진한 표현인 것입니다. 이처럼 태초의 인간에게는 서로를 향한 희생과 헌신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범한 후 어떻게 됩니까?
3장 7절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들은 서로를 향하여 자신을 감추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2장 25절을 보십시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그들은 서로를 향하여 아무른 거리낌도 부끄러움도 없었습니다. 온전히 서로를 오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후 자신의 몸을 감추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이제 서로가 죄로 인하여 감출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장 사랑했던 관계에서 이제는 감추어야 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과 감정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오픈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감춰야 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또 16절을 보시겠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죄로 말미암아 여자에게는 임신하는 고통이 크게 더해졌습니다. 원래는 임신의 기쁨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이 더해진 것입니다. 또한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여기서 “원한다”. 그리고 “다스린다”라는 단어는 모세 5경에 딱 두 번 등장하는데 이곳과 4장 7절입니다. 4장 7절을 보시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가 너를 원한다는 것은 죄가 지배하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너는 남편을 원한다는 것은” 아내가 남편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남편도 아내를 다스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지배하려고 하는 싸움이 사실 모든 가정의 뿌리 깊은 문제 아닙니까?
이렇듯 죄의 결과 인간 사이가 분리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이웃과의 끊임없는 싸움 그리고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땅의 저주
세 번째 죄의 결과는 땅의 저주와 일입니다.
17-18절입니다.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죄가 없을 때 인간에게 있어 일이라는 것은 기쁨이었습니다. 일 자체가 목적이었습니다. 아담의 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대신하여 통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창조세계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즐거움을 만끽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과학자들의 일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우주에 내재되어있는 법칙과 질서를 발견하여 그것을 개발하고 적용함으로 문명을 이룹니다. 그것은 굉장한 기쁨일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 일을 해야만 먹고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이제 제한된 자원 속에서 문명을 계발해야만 살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의술을 개발해야 했고, 한정된 자원 속에서 과학을 발전시켜야 했습니다. 죄악이 난무한 세계 속에서 교육과 법을 개발하여야 그나마 과격한 죄의 확장을 막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그러한 노력의 결과 땅이 우리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러한 인간의 노력은 결국 더욱 더 악한 결과만을 초래했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연장의 꿈이 실현되고 있고, 과학의 발전은 여러 가지 자원들을 만들어 내었고, 인간을 시공간의 제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핸드폰 하나만 있어도 세계 어느 곳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지구 온난화라는 더 큰 재앙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과학은 더욱 발전되겠지만 이는 오히려 더 큰 재앙을 몰고 올 것입니다. 이것은 끊을 수 없는 악순환인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쫒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룹 즉 천사와 두루도는 불 검을 에덴동산에 돌게 하셨습니다. 즉 인간은 다시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금 그 순수했던 아름다운 에덴으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이후에 죄의 역사가 얼마가 강하게 일어나는 가를 보여줍니다. 4장에 가인은 아벨을 살해하는 동족 살해의 끔찍한 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노아의 시대 죄는 관영하여서 하나님이 물로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그는 위기 때마다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세 번이나 속이는 죄를 범합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그는 애굽 사람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는 살인 교살 죄와 간음죄를 범한 죄인이었습니다. 성경은 결코 죄의 문제를 소홀하게 취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떻습니까?
입에 담기에도 끔찍하고 잔혹한 죄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한때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차,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의 죄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처절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독일의 나치가 저지른 아우슈비츠 대학살을 기억합니다.
1937년에 일어난 난징 대학살에 대한 글을 인터넷에서 옮겨 왔습니다.
<20세기는 참극으로 점철된 세기였지만,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이 함락된 뒤 일본군이 저지른 학살은 전시에 민간인을 상대로 자행된 단일 대량 학살로는 최악의 야만적 범죄로 손꼽힌다.
항구 도시인 상하이를 함락시킨 마쓰이 이와네 휘하 일본군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수도였던 난징으로 진군했다. 장제스는 후퇴하면서 시가지를 초토화할 것을 명했다. 이에 대해 일본군은 양쯔 강 계곡에서 중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것으로 응수했고, 12월 13일, 난징 시가 저항 없이 투항하자 전례가 없는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중국군 병사들이 목표였지만, 곧 민간인들까지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들을 어린아이건 노인이건 가리지 않고 강간해 2만~8만 명의 여성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형 방법도 집단 총살, 참수, 생매장, 십자가에 매달기, 혀에 매달기 등 다양했다. 갓난아기를 공중에 던진 뒤 총검으로 찔러 꿰어 죽이는가 하면 가족을 죽이기 전에 근친상간을 강요했다. 서방의 선교사들과 언론인들이 이 끔찍한 만행의 증인이었다. 독일 지멘스사(社) 상하이 지사장이었던 욘 라베는 난징 시 서쪽 외곽에 안전구역을 설정하여 서양인은 물론 수많은 중국인의 목숨을 구했다. 학살과 집단 강간은 1938년 2월까지 6주 넘게 계속되었으며, 약 30만 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전 후 마쓰이와 두 명의 중장이 전범으로 교수형을 당했지만, 그 외에는 거의 책임 추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 정부는 일본군이 난징에서 저지른 짐승만도 못한 범죄에 대해 일본 정부에게 공식 사과와 배상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지만, 일본은 여전히 난징 대학살을 부정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난징 대학살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2009. 8. 20., 마로니에북스)
이것이 인간입니다. 저들과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일까요? 교육이 바뀌면 해결될까요? 경제가 좋아지면 해결될까요? 종교인들이 하듯이 “내 탓이요” 운동을 하면 사람들이 달라질까요?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만 정확하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의 죄 하나 다스리고 이기지 못하는데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게 죄의 문제의 해결책은 없습니까? 과연 에덴으로 돌아갈 길은 없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오직 십자가로 나아가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십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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