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 20.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갈라디아서 6:7–10 (NKRV)
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동안 성령을 따라 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령을 위해 심으라고 합니다. 성령을 심는 것과 육체를 위해 심는 것을 비교하면서 말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두 개의 내용입니다. 첫 번째는 성령을 위하여 심으라는 것입니다. 7-9절입니다. 두 번째는 믿음의 가정을 잘 섬기라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먼저 성령을 위하여 심으라는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심고 거두는 농사 원리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열매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기 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열매입니까?
본문에 보니까 영생을 추수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영생을 기대하면서 성령을 위하여 심지 않으면 영생을 거두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심고 거두는 원리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당연한 원리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렇지 못한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떤 성도들입니까? 성령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 영생을 기대하는 성도들입니다.
성경은 그런 성도들에게 강하게 경고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갈라디아서 6:7 (NKRV)
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스스로 속이는 자/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
자기를 속이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령을 위해 심지 않으면서 영생을 기대하는 성도들입니다. 갈라디아서의 맥락에서 보면, 율법을 통해 의로워져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선한 행위를 많이 쌓아서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속고 있습니까? “나는 의로운 사람이다”라고 속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다 보니까 자신이 의인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선행을 많이 하다 보니까 의인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좋은 사람일까요? 선한 행위를 많이 한 사람은 선한 사람일까요? 의로운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일까요?
여러분들이 판단할 때 저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야 라고 하는 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저 사람은 선한 사람이야 라고 하는 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저 사람은 의인이야 라고 하는 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무엇을 가지고 선함과 의로움을 판단합니까? 대부분 눈에 보이는 행위들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 사람. 폐지 줍는 할머니의 손수레를 밀어준 학생. 아파트 폐기물에서 수천만 원의 돌을 주워 돌려준 경비원. 자살하려는 사람을 죽지 말라고 붙들어 준 여고생. 우리는 그들을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참 좋은 사람이야, 선한 사람이야,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사는 세상에서 이타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세상은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과연 그들은 의인들일까요?
저는 그분들의 행위를 평가절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과연 의인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율법을 잘 지키면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거룩한 행위를 많이 하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사실을 철저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로마서 5:12 (NKRV)
12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우리는 서로를 비교하면서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하다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시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로마서 3:10 (NKRV)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시편 14:2–3 (NKRV)
2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의 시선에는 다 치우쳐 있고, 다 더러운 자들이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선하다, 착하다, 의롭다는 기준은 우리가 세운 것이지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런 죄인들이 선행을 베풀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죄가 흐려지거나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죄인이어서 선행으로 죄를 덮는다고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흑인은 흑인이고, 백인은 백인입니다. 흑인이 화장한다고 백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백인이 화장한다고 흑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은 죄인입니다. 아무리 선행으로 우리 겉을 포장한다고 해도 죄인이라는 본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는 특별히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로워지려고 하는 자들에게 경고합니다.
갈라디아서 2:16 (NKRV)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예배, 찬양, 헌금, 구제, 기도 등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행위들입니다. 누군가 새벽을 깨우며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있다면 그분은 경건한 분입니다. 주변에 어려운 이웃을 위해 구제하며 섬기는 분들은 사랑이 많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많이 한다고 해서 의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들 가운데 이러한 기독교적 행위들을 잘 지키고 이행함으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선하거나 의롭거나 신실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안타깝지만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경건하고 거룩한 성도들은 자신이 얼마만큼 비참한 죄인인지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빛 되신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수록 자신의 더러움이 너무나 선명해져 고개를 들 수 없는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비유를 통해 이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9–14 (NKRV)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두 종료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제사장들만이 지켰던 거룩한 행위를 일상의 영역에서 실현하려고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누가 보아도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신앙을 자주 책망하셨습니다. 이유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이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여기 보면,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사람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다른 사람을 멸시합니다.
누가복음 18:9 (NKRV)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나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멸시합니다. 나는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야, 나는 구제를 많이 하는 사람이야. 나는 금식을 많이 한 사람이야. 그리고 실제로 이들은 기도, 구제, 금식을 철저하게 합니다.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의롭다고 착각하는 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23:25–28 (NKRV)
25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겉모습은 거룩한 행위로 포장했을지는 모르지만, 그 속에는 온갖 죄악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자기가 의롭다고 믿는 사람은 모든 경건의 행위가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사람을 향하고 사람을 의식합니다. 바리새인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것도 잘 보이는 곳에서 기도합니다.
마태복음 6:1 (NKRV)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예를 드시는데 구제, 기도, 금식입니다.
마태복음 6:2 (NKRV)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5 (NKRV)
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16 (NKRV)
16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하나님앞에서 귀한 경건의 행위들이지만 이것이 사람을 향하고 사람을 의식하게 될 때 외식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자기가 의롭다고 믿는 사람의 특징은 영적 우월감이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18:11–12 (NKRV)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이런 분들의 특징은 비판적입니다.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에 티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죄임 됨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 달라며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둘을 비교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빠지지 말아야 할 함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스스로 속이는 자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신앙생활을 오래 하시고, 열심을 가진 분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이 함정이 치명적인 이유는 교만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교만에 빠지면 다른 사람의 권면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여 돌이키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야고보서 1:26 (NKRV)
26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스스로 속이는 자들은 바로 이와 같이 스스로 의롭다고 믿습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믿습니다. 성경을 이들을 향해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6:7 (NKRV)
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기 때문입니다. 서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업신여긴다.’(무크테리조)라는 단어의 의미가 ‘경멸한다.’ ‘코웃음을 치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행위라고 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궁극적으로 자기 의로운 행위를 자랑하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빠질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이고 심각한 수준의 죄입니다.
오히려 세리처럼 죄를 범했으면 부끄러워하던가 회개라도 할 텐데,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의지하는 자들은 결국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조차도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통탄해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인지를 더욱 깊이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더 겸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수록 심령이 더욱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비참한 죄인임을 자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조차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마서 7:19–24 (NKRV)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이 솔직한 우리의 고백이 아닙니까? 누가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자기를 속이는 자는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육체에 심는 자를 말합니다. 여기서 ‘육체’라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갈라디아서에는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NKRV)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시는가? 우리 안에 영으로 계시는데 그 분이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릅니다. 이전에 내가 죽고 내 안에 성령님께서 영으로 계셔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시는데 이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성령님을 따라 삽니다.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 살게 됩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성령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 애씁니다.
갈라디아서 5:16 (NKRV)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라는 것은 우리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거하시기 전에 우리의 상태입니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자기 만족과 이익을 위해 삽니다.
갈라디아서 5:19–21 (NKRV)
19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 상태에서 행하는 우리의 모든 애씀과 노력이 바로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선행일지라도 아니면 종교적 경건일지라도 육체를 위해 심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섞어질 것을 거둡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만족과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추구하며 삽니다. 그들이 맺는 열매는 영생입니다. 비록 손해 보는 일이라도 하나님이 뜻이라면 그 길을 갑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러한 삶을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선행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선행입니다.
갈라디아서 6:9 (NKRV)
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왜 이러한 삶에 낙심할까요?
내게 별로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데, 비난과 조롱을 받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합니다. 오해를 당합니다. 손해 보는 일이 많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낙심욉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치고 낙심을 경험하지 않은 분들이 없습니다.
주의 일에 충성하는 사람들 치고 낙심을 경험하지 않은 분들이 없습니다.
대부분 낙심은 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정성껏 섬겼던 사람들에게서 옵니다.
낙심은 한번 경험하고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는 내내 찾아옵니다. 저는 아직도 낙심에 적응이 안 돼요. 낙심했다가 회복하고 일어나면 또 낙심할 일들이 찾아옵니다.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됩니다.
낙심이 반복되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만하자. 그만 상처받고 싶고, 그만 오해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 하십니다.
낙심이 되는데 어떻게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포기하고 싶은데 어떻게 버티며 계속해서 주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열매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무엇을 거두는 것입니까? 직접적으로 영생을 거둡니다. 누구의 영생일까요? 자기뿐만 아니라 내가 섬기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비록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성령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일들을 통해 결국 영생을 거두십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기대하며 심으라는 것입니다.
시편 126:5–6 (NKRV)
5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베드로전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1:3–4 (NKRV)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거듭난 성도들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산 소망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소망일 것입니다. 산 소망은 썩지 않습니다. 더럽지 않습니다. 쇠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품은 대부분의 소망은 썩고, 더럽고, 쇠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산 소망을 기대하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먼저는 성령을 위해 심으셔야 합니다. 거듭난 성도들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셔야 합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만 겪는 고난이 아닙니다. 주의 길을 걷는 자들이 겪는 고난입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날이 곧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