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4-02-02 14:48

4. 복음_ 평강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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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4. 복음3_평강

 

갈라디아서 1:3 

3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복음 세 번째 시간으로 평강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항상 ‘은혜와 평강이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라고 인사를 합니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단어에 복음이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복된 소식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또한 평강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입니다. 평강은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결과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받는 것이고 평강은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누리는 것이 평강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왜 평강이 없는가? 

2.평강은 어떻게 임하는가? 

3.평강을 누리는 비결은 무엇인가?

 

1.왜 평강이 없는가?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주신 평강을 누리고 계십니까?

‘평강’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것이 원만하여 마음에 걱정이 없는 상태입니다. ‘평안’, ‘평화’로도 번역됩니다.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모든 것이 원만하여 마음에 걱정이 없는 상태.’ 과연 가능할까요?

 

제 인생 가운데 이러한 순간이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남들에 비해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지만 저 또한 크고 작은 걱정과 염려들은 항상 있습니다. 어릴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교회 일에 대한 걱정, 자녀들에 대한 염려, 앞날에 대한 불안은 늘 있습니다. 몸이 좀 안 좋으면 혹시 큰 병은 아닐지 하는 건강에 대한 염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평강을 간절히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평강을 바라지만 평강을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가정은 가정대로 직장은 직장대로 어려움과 문제들이 항상 있습니다. 외적으로 모든 것이 안정된 순간이라도 내적으로 불안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심리적인 공포와 답답함으로 인해 저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도 평강을 간절히 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평강을 기원하는 것은 우리 삶에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평강은 우리의 노력으로 쟁취하거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을 짓누르는 어려움이 사라져도 평강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잠시 평안한 때를 보낼 뿐 또다시 염려와 근심, 불안과 두려움은 찾아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우리에게 평강이 없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거나 친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강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내가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 주어집니다. 올바른 관계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있는 것입니다.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있을 때 평강이 임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아무리 돈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갈등을 겪고 있다면 그 가정이 평안할 리 없습니다. 가정의 평안이 부부 사이의 관계에 있듯이, 내 삶의 궁극적인 평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옵니다. 

 

하나님과 평강한 상태에서 우리는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외부적인 조건들이 아무리 잘 갖추어져도 예를 들어, 돈도 있고 건강하고 자녀들이 잘 자라줄지라도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면 평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으면 평안합니다. 

 

우리에게 평강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잘못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불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핍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무한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보기도 하고, 바쁘게 움직여 보기도 하지만, 인생의 허무함이 몰려올 때는 우울감에 빠져 몇 날을 시달려야 합니다. 

 

남들처럼 돈도 모아보고, 여행도 가고, 취미생활도 해 보지만,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결핍이 항상 있습니다. 이전 저런 노력을 해 보아도 변하는 것이 없으니 불안함은 가중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길 기뻐하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기쁨을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단의 속삭임에 속아 은혜의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박차고 나간 탕자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품을 떠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며 순종하는 삶이 싫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지 않고 내 욕심을 채우며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죄는 사람을 때리고 도둑질한 것만이 아닙니다. 죄의 근본에는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를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배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고 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습니다. 하나님도 내가 인정해야 하나님입니다. 내 주관과 판단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 분의 말씀도 내가 판단합니다. 

결국 죄는 자기 중심성입니다. 

사단이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던졌던 질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정말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은 에덴의 모든 것을 먹게 하셨습니다. 단 에덴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에덴에서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만 누리는 것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 자유는 마음대로 살아가는 방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임을 선악과를 통해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물음으로 마치 하나님을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맘대로 조정하는 분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사단의 교활함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짐으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판단할 자유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가 판단하여 옳으면 순종하고 싫으면 불순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불경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판단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판단의 자리에 섰을 때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깨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열매 하나를 먹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불순종하는 그 중심에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합니다.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합니다.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를 사랑합니다. 상대가 자기를 채워주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선행을 한다고 하지만 자기만족입니다. 선하게 살아간다고 하지만 자기 의로움이고 종교심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기 중심성의 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기적이야”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내가 가장 이기적입니다.

 

이러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 아버지 집을 떠난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았을까요? 내 인생 행복해지고 꽃길만 걸었을까요? 

인간 삶의 모든 참혹함이 이것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에게서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죽음에 걸리게 되었고 죽음의 증상인 각종 육체적, 영적, 심리적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강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자기 중심성의 죄로 말미암아 이웃과의 관계 또한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합니다. 상황이 좋을 때는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닥치면 이기적입니다. 상대방을 내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사람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 갈등이 확장되어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기적인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은 치열합니다. 비열합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경쟁에서 이탈됩니다. 속이고 속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힘듭니까? 불안하고 두려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불안장애, 공황장애, 우울증, 공포증, 대인 기피증은 누구라도 걸릴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평강입니다.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내 마음에 평강이 임하길 원합니다. 아침에 밝게 비치는 햇살처럼 내 삶이 밝아지길 소원합니다. 

 

2.어떻게 평강이 임하는가?

평강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될 때 찾아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있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죄의 담이 무너질 때 평강이 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노력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복음 첫 번째 시간에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심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1:4 

4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그 결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 우리가 회복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14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에베소서 2:16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로 인해 막힌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그 분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너무나 복된 소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큰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이사야 53:5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허물로 인해 찔림을 받고, 우리 죄악 때문에 상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창세 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우리가 범죄하여 타락할 것을 아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죗값을 치를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9:6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평강을 가져오시는 왕께서 아기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분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일부러 나귀를 타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말을 타는 것은 군사적 왕의 상징이지만 나귀를 타신 것은 평화의 왕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9:9–10 

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겸손의 왕께서 화평을 전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임했습니다. 그 결과 이웃과의 관계도 평화가 임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오셨습니다. 이때 첫 번째로 하셨던 말이 이것입니다. 

 

요한복음 20:19–21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께서 두 번씩이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행여나 그들이 상투적인 인사말로 여길까 봐 그러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평강이 임했음을 알게 하시려고 그러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임한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복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궁극적인 평강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로마서 5:1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0–11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여전히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긴 했지만, 죄의 영향력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완전한 평강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여전히 삶의 어려움 속에서 불안하고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3. 어떻게 평강을 누릴 수 있을까?

그 비결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사람은 일용직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 노동시장에 갔고, 고용된 사람들은 하루치 임금을 받아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사다가 가정에 돌아갔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공친 날은 굶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염려는 대부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30–31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임을 믿지 않으니까 자꾸 염려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고 또 채워주시는데 왜 내일 일을 불안해하고 염려하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십니다. 

 

믿음이 작아질 때 염려와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은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시고 가장 좋은 것들을 주실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7–11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신데 왜 기도하지 않고 불안해하고 염려하냐는 것입니다. 구하면 주실 것이고, 찾으면 찾아낼 것이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터인데 왜 기도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 악한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것 주고 싶어 하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 주시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평강을 누린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인해 막힌 담을 허무셨기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해 나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16 

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빌립보서 4:6–7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는 비결은 기도에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에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 평강이 없었던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돌봐주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살려고 발버둥을 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평안한 것은 내가 노력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쉬지 못합니다. 평강을 누리지 못합니다. 

 

내 삶이 여기까지 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평안이 임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단 한 순간도 중단된 적이 없습니다. 평강을 누리는 것은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이끌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 기도의 자리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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