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 7. 외식의 유혹에서 벗어나라
갈라디아서 2:11–14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갈라디아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잘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한자로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두 개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첫 번째는 지난 시간 살펴보았던 사건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입니다. 그때 헬라인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받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이 되는 것은 할례를 받았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타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두 번째 사건이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베드로가 안디옥교회에 있을 때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할 때 유대인 강경파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를 황급히 떠나 외식했던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아무리 사도일지라도 복음의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이방인 교회 중에 대표적인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들이 모인 교회라면 안디옥교회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입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박해를 피해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집니다. 이때 안디옥으로 모여들었던 성도들이 이미 헬라화된 유대인뿐 아니라 순수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함으로 교회가 탄생하게 되는데, 바로 안디옥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곳에 세워진 교회를 돕기 위해 바나바를 파송했고, 바나바는 얼마 후 다소에 있던 바울을 청해 동역하게 됩니다.
이곳에 베드로가 온 것입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고 하셨고, 그때 이방인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따라가 복음을 전한 이후부터 달라집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공회가 열리고 이방인의 할례문제가 안건으로 올라왔을 때,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니 할례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완전히 달라진 것일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유대인의 종교적 관습과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안디옥교회를 방문합니다. 이방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시 예배는 성만찬과 함께 행해졌습니다. 성만찬은 식사와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한 식사가 정확히 성만찬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식사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경우 식사를 할 때 정해진 정결법을 지켰습니다. 먹는 음식과 먹는 방법을 철저하게 정해진 규율에 따라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정결하게 먹어야만 한다고 배우고 지켰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라는 성경의 말씀을 음식 정결법을 행함으로 지켜왔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부정함을 넘어 죄악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시 음식 정결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11
11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음식 정결법을 잘 지킨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정결한 음식을 먹는다고 정결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 뿐만 아니라 율법도 그렇습니다. 율법의 조항들을 잘 지킨다고 정결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겉은 깨끗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 속의 더러움까지 깨끗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깨끗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을 때입니다.
레위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정결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속죄제사입니다.
레위기 1:1–9
1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3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4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6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8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어떻게 하면 속죄가 될 것이라고 합니까? 소나 양으로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절차를 보면 이렇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이 흠 없는 소나 양을 가지고 회막 문으로 가져갑니다. 회막문 앞에서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그리고 나서 제물을 잡습니다. 이때 제사장은 피를 그릇에 받아 제단 사방에 뿌립니다.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뜹니다. 제사장은 각을 뜬 제물을 번제단에 올립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일반 도살과 속죄제사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안수입니다. 안수는 누가 합니까?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잘 보시면 속죄제사의 주도적인 역할은 죄를 지은 사람이 합니다. 제물을 가져오고, 죽이고, 가죽을 벗기고, 제물을 토막내고, 내장을 꺼내고 하는 일은 제사장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합니다. 제사장은 옆에서 피를 받아 뿌리고, 제물을 번제단에 올리고 하는 일을 합니다.
이 과정이 전혀 아름답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혹합니다.
어릴 적 큰할머니께서 사시는 안동 월전리를 간적이 있습니다. 설 연휴였습니다. 밖에서 놀고 있는데 아이들이 뛰어가는 것이 보여 따라갔습니다. 동네에서 돼지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돼지의 머리를 창살로 찌르고 찔러도 죽지 않았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돼지를 계속해서 죽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 충격적이라 도망치듯 할머니 집으로 왔습니다. 저녁 식사 때 돼지 수육이 밥상에 올라왔습니다. 저는 참혹했던 그 장면이 떠올라 도무지 먹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죄제사를 드릴 때 그 장면은 참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수였습니다.
안수가 빠지면 일반 도살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안수를 통해 내 죄를 제물에 전가합니다. 그리고 제물을 잡는 것입니다. 한 번에 죽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찌르고 또 찌릅니다. 피가 튀고 짐승이 날뜁니다. 죽은 줄 알았던 짐승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참혹한 과정을 통해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정결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속죄제사가 죄인의 죄를 완전히 사하고 정결하게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제사는 일시적인 효력만 있을 뿐입니다. 제사를 지내고 돌아가면 또 다시 죄를 범합니다. 그러면 또 다시 짐승을 가져와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짐승을 드려야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정결해질까요?
사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예표 합니다.
그것은 앞으로 있을 완전한 속죄 제사의 예행연습이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완전히 사해지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사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어린양 예수님께 전가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해마다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았습니다.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를 함께 먹으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임을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십자가가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제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이 사건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모르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십자가 사건이 나의 죄를 사하고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나의 죄를 사하고 나를 정결하게 하고 나를 구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나의 구원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안수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죄를 어린양 예수님께 전가시기는 안수를 해야 합니다. 그 안수가 무엇일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어린양 예수가 나의 죄를 짊어지고 속죄제물이 되셔서 죽으셨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집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제물에 안수하고 죽이고 각을 뜨고 번제단에 사름으로 그 향기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기로 하셨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우리 모두의 죄를 사하시기로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결하게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16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 정결하게 되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종교적 행위를 잘해서가 아니라, 또는 선한 행위를 많이 쌓아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조금의 타협함도 없어야 합니다. 만일 이것을 부정하거나 타협하게 되면 그는 저주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이루신 속죄제사를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라고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7–9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베드로도 이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 성도들을 만나 기쁨의 교제를 나눴고 그들과 함께 식사한 것입니다. 그는 이전까지 행했던 음식 정결법에 더 이상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정결하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기쁨의 교제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 이런 소식을 전해줍니다.
“지금 야고보 사도께서 보낸 사람들이 오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 총회장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보다 더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라면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강경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할례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베드로가 이 소식을 듣자 먹던 음식을 내려놓고 황급하게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강경파 유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이런저런 말을 듣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들과 함께 정결법을 지키지도 않고 음식을 먹었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에 알려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이런 일로 괜한 추문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바나바도 있었습니다. 바나바도 유대인입니다. 베드로가 그 자리를 뜨니까 바나바도 갈팡질팡 한 것입니다. 바나바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유대인들도 흔들렸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 사건을 듣고 몹시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지적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14
14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복음에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르게 행하는 것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전히 유대교의 관습과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해졌습니다.
너희가 복음의 진리를 알고 있다면 바르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타협하지 말고, 복음이 주는 자유를 믿고 담대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강경파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해야 옳습니다. “우리가 정결하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정결법을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어 자유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나를 비롯한 형제들이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고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는 담대하지 못했습니다. 정죄당할 것이 두려워 그 자리를 뜬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우리끼리 누가 낳고 누가 못하고 하지만 하나님 보실 때는 다 더러운 죄인입니다. 그런 우리가 정결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비난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정결하게 된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난하는 그 죄들이 우리 안에 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1–3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율법주의가 무서운 것이 이것입니다. 항상 비판의 자리에 있습니다. 평가자의 자리에 있습니다. 자기 안에 더 큰 죄악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들통나면 감당하지 못합니다. 인권과 민주화를 외쳤던 정치인들 가운데 자살한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들은 늘 비판자의 자리에 있었는데 막상 권력을 가지니까 자신이 비판했던 부끄러운 일들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들통나니까 감당하지 못하는 거예요. 자기가 정의롭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중 누구도 누구를 비판하거나 비난할 만큼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베드로가 외식에 빠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종교적 전통과 관습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의 자유를 맛보았지만, 평생을 지켰던 율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최근 저는 찬송가를 영어로 부르는 것에 빠져 있습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이라는 찬양의 영어 버전을 찾다가 여성합창단이 부른 것이 있어 보게 되었습니다. 하얀색 드레스를 멋지게 입었고, 솔로는 빨간색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너무나 멋있게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조금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모두의 표정이 웃고 있는데 너무 부자연스러웠습니다. 마치 북한의 어린이 합창단이 김정은주석을 찬양하는 듯한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그 합창단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이단이었습니다.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지만 그 소리와 표정은 조작해 낸 것과 같았습니다. 이것이 외식입니다. 즉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런 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시면서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외식입니다.
갈라디아서 2:13
13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런 척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지 않은데 좋은 척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그런 분 있었어요. 저희 집에 오셔서 자신이 사모님을 위해 기도하는데, 어떤 할머니가 보인다는 거예요. 그 할머니가 태의 문을 닫고 있어서 아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도 많이 하고 있으니까, 사모님도 기도 많이 하시라고 합니다. 그 분이 지금은 교회 안다녀요. 외식한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척, 기도 많이 하는 척 한 것입니다.
여기 빠지면 자유가 없어요. 그런 분들 옆에서 안타까워요. 그렇게 안해도 되거든요. 하나님 앞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있어도 됩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연약하면 연약한 대로, 실수하면 실수한 대로, 자신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 연기를 합니다. 외식은 원어로 ‘휘포크리시스’인데,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위선이라는 단어가 나왔어요. 그렇게 살면 피곤해요.
바울이 강하게 책망합니다.
갈라디아서 2:14
14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쉽게 말하면, 베드로 당신도 이방인과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정결한 척, 거룩한 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죄인입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바나바도 다 죄인입니다. 여러분이 존경하는 조용기목사님, 옥한흠목사님, 하용조목사님도 죄인입니다. 저도 죄인이고 이곳에 있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우리가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된 것도, 착해서 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연약함을 보게 될 때 실망하지 마세요. 우리가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여러분 곁에 사람이 여러분을 실망시킬 때도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나 나나 다 죄인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죄인이라 그래요. 교회 다니니까 그마다 그 정도인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원래 이 모양입니다. 또 예수 믿는다고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성장하긴 하지만 더딥니다. 큰 고난과 연단을 받으면 조금 성장합니다. 그것조차도 없으면 교만해요.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까? 있는 모습 그대로 사세요. 교회에 오셔서 가면 쓰지 않으셔도 돼요. 사람의 평판에 갇혀 복음의 자유를 잃어버리지 마세요.
갈라디아서 5:1
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애쓰고 노력한다고 정결해지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됩니다.
로마서 8:1–2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33–34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가 서로를 정죄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죄가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또는 죄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세요. 그러면 된 것입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셔야 해요. 과거에 지은 죄에 더 이상 얽매여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놓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계속해서 넘어집니다. 부끄러운 잘못도 저질러요. 그럴 때 마다 십자가를 붙드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외식으로 가면 안되요. 착한 척, 거룩한 척 하다가 교만해 집니다. 남도 속이고 자기도 속습니다.
오히려 죄짓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겸손해집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 말씀 속에서 담대해지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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