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 13.
갈라디아서 4:8–20 (NKRV)
8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2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오늘 본문은 “그때에는”이라고 시작되고 있습니다. 9절에는 “이제는”이라고 말합니다.
“그때”는 언제입니까? 8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할 때입니다. “이제”는 언제입니까? 9절에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바 된 때를 말합니다.
‘그때’는 구원받기 전이며 ‘이제’는 구원받은 후입니다. ‘그때’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을 때이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때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을 때이고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아래에 있을 때입니다.
바울은 “그때”와 “이제”를 구분하면서 왜 그때로 돌아가려 하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율법을 지켜 구원받으려 하는 것은, 그때로 돌아가려는 것이라고 답답한 마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1. 그때
그때는 구원받기 전 우리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미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를 통해 정리한 세 가지 내용을 복습해 보면,
에베소서 2:2–3 (NKRV)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했습니다.
왜 이렇게 살았을까요? 왜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이렇게 살고 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8절)
여러분, ‘그때’와 ‘이제’를 구분할 때 그 기준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욕심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누리고 축복된 삶을 살아갑니다.
9절에 보면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좌우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무엇일까요?
1) 머리로 이해하고 지식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다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12세가 되기 전 모세 오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늘 성경을 읽고 배우고 암송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 그중에 엘리트 계급인 사두개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2:29 (NKRV)
2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을 모른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유대인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입니다. 또한 성경 지식에 해박한 바리새인 랍비였습니다.
요한복음 3:1 (NKRV)
1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와 거듭남에 대한 주제로 대화하던 중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10 (NKRV)
10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니고데모는 성경에 능통했지만, 성경을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엘리트 유대인 사두개인, 성경 선생인 니고데모, 그리고 바리새인, 모두 당대의 성경 박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성경 지식을 많이 알고 이해한다고 해서 또 그것을 가르친다고 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학교 교수 중에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영국, 독일, 미국의 뛰어난 신학교에서 성경을 공부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누군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잘 가르친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학문은 어떤 분야에 해박한 지식이 있으면 그것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아도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인격적인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경험과 체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인격적 존재는 머리로 알 수 없습니다. 관계를 맺고 친분을 쌓아가며 이런저런 경험을 공유하면서 그 사람됨을 알아갑니다. 인격체는 공부해서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으로 알아갑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저에 대한 지식 100가지를 써서 주고 여러분은 그것을 읽고 이해하고 암기한다고 해서 저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에요?” 물어보아 수백 가지의 대답을 듣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링컨에 대한 위인전을 읽었다고 해서 링컨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이순신에 대한 위인전을 읽었다고 해서 이순신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분들은 특별히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누군가의 역사와 업적을 꿰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 학문에서는 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 교수님이 링컨 전문가야 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성경에서 안다고 할 때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안다(그노시스)’는 것은 실제로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교제하며 경험과 체험을 공유할 때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잉태할 것을 예고합니다. 이때 마리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누가복음 1:34 (NKRV)
34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는 이미 요셉과 약혼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요셉과의 성적결합을 말합니다. 여기서도 ‘안다’는 표현이 경험과 체험을 동반된 지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교제하면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잠언 1:7 (NKRV)
7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하나님에 대해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19 (NKRV)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알고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어떻게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느냐는 말씀 중 나온 것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지만 순종하지 않는 것처럼, 너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순종하지 않는다면 귀신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거나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알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창조주께서 자신을 알려 주시기 전에 우리 스스로 하나님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바른 지식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는 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신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낸 신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만든 신들은 대부분 인간 이성과 경험의 한계를 초월하지 못합니다. 대부분 설명이 가능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신은 창조주가 아닙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주를 알 수 없습니다. 바퀴벌레가 컴퓨터를 이해하지 못하듯, 사람은 창조주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길 기뻐하셨습니다.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두 가지 방식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리신 것입니다. 알리셨다기보다 드러났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한 광대한 우주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이 광대한 우주보다 더 크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그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우주가 완벽한 조화와 질서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꽃 한송이에 담긴 그 완벽한 질서와 조화 그리고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안식월 이동할 때는 주로 에어 비엔비 숙소에 묵었습니다. 자기 집의 한 칸을 숙소로 제공하는 곳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면 입구에서부터 주인의 세밀한 정성과 느껴집니다. 깔끔하게 정돈된 주방, 신선한 우유와 시리얼, 아이들을 위한 DVD와 게임 세트, 향기가 퍼지는 화장실 등.
주인이 어떤 분인지 대략 짐작이 됩니다. 마지막 묵었던 집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편안했습니다. 퇴실하면서 만나보니 크리스천이셨고 입양가정이었습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얼마나 힘들었냐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주인의 손길이 만든 것을 통해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은 불완전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 지식이 우리를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알 수 있도록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에 개입하시고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이 기록을 남김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자기 뜻을 알리시기 위해 특정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꿈이나 환상 그리고 음성을 들려주셔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 기록을 모은 것이 바로 성경책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책에 자신의 성품과 뜻 그리고 행하실 일들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오직 성경 외에는 자신을 알리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을 읽어야만 합니다. 성경을 벗어나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신 것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잘 알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알려 주신 것을 바르게 이해하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과 의도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 이해와 경험의 수준에서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면 자의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각자가 이해하고 싶은 방식으로 성경을 이해하게 되고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섬기게 됩니다.
또한 부패한 우리의 인격으로는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없습니다.
성령님이 임해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부패한 우리 인격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허락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경은 오직 성령님이 임한 사람만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그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성령님이 저자의 경험, 지식, 생각, 개성, 감정 등 모든 것을 주관하셔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성령의 감동, 또는 성령의 영감이라고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3:16 (NKRV)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베드로후서 1:20–21 (NKRV)
20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쓴 것처럼, 이것을 이해하는 것도 성령님의 감동을 한 사람만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령님이 임해야만 성경을 이해하게 되고 믿게 됩니다.
갈리디아서를 쓴 바울은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을 몰랐고 하나님도 몰랐습니다. 왜일까요?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성령님이 임하자 성경을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하나님을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아셨구나”
갈라디아서 4:9 (NKRV)
9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때 그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찾으러 오셨고, 나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셨고,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믿게 하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영원토록 나와 동행하시며 나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십니다. 이것이 나를 아신 것입니다.
바울에게 이전까지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이고 친밀한 아버지와 같은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긴 했으나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랑은 인격적 친밀함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기에 창조주와 피조물이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알게 되자 하나님께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 친밀한 속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자유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어떤 것도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율법을 잘 지켜야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나를 사랑하신 사랑은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이라는 사실, 죄인인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이라면 나의 연약과 허물을 긍휼히 여기시고 덮어주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알게 되자 너무나 기뻤고 벅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하나님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알려 준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차근차근 성경을 가르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의 역할은 동일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고 사랑하도록 하는 일이 목사의 일입니다. 단지 지식으로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 삶 속에서 나를 자유하게 하시고, 나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내 삶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전달하는 일이 목사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이 하나님 때문에 살아갈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알도록, 하나님을 통해 위로와 치유를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호세아 6:3 (NKRV)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왜 호세아는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했을까요?
호세아 6:6 (NKRV)
6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을 모르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제자만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서 제사만 열심히 지낸 것입니다. 바울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동일한 말을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모르니까? 율법에 있는 절기들을 지키느라라고 열심을 내고 있구나.라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우리가 내는 모든 열심과 헌신이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을 내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바른 경배와 순종의 삶을 살게 됩니다. 억지가 아니라 감격과 기쁨으로 헌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는 그것을 자유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를 향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에베소서 1:17–19 (NKRV)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눈을 밝히셔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크심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