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 19. 가르치는 자, 가르침을 받는 자
갈라디아서 6:6
6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에 포합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6 (NKRV)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고 했고,
갈라디아서 5:25 (NKRV)
25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그리고 성령으로 행할 때 교회 공동체에서 성도의 죄를 범한 성도나 연약한 성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6장 1절에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신령한 너희는” “성령을 따르는 너희”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세 가지 권면을 하는데 이 또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에 포합됩니다.
1)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6절).
2)육체를 위하여 심지 말고 성령을 위하여 심어라(7-9절).
3)기회가 있는데로 믿음의 가정들을 잘 섬기라(10절).
입니다.
이 중 첫 번째 권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지금 교회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살펴보았던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난 상황은 교회 공동체 가운데 발생한 상황을 말합니다. 또 서로 짐을 지라는 것도 교회 내에 연약한 성도의 짐을 지라는 것입니다.
이 편지는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에 보낸 편지라고 해야 더 정확합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몇 교회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각 교회들은 이 편지를 돌려가며 읽었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편지나 이메일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편지를 써서 전달할 때 상당한 돈이 필요했습니다. 편지지는 가죽으로 만들어서 상당히 비쌌고 인편을 통해 전달했기 때문에 이 또한 상당한 재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편지는 최대한 절제되고 간결한 용어로 정리해서 썼습니다. 직접 펜을 들어 쓰지 않고 머릿속에 정리된 내용을 말하면 대필자가 옮겨 적었습니다. 글씨도 최대한 작게 썼습니다.
갈라디아서 6:11 (NKRV)
11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6장 10절까지는 대필자가 옮겨적었다가 11절부터는 바울이 직접 펜을 들고 쓰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편지가 전달되면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시간에 낭독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여기 모여 있는 것처럼, 갈라디아 성도들이 모여 있는 시간에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인 편지가 낭독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염두하고 본문을 대하면 훨씬 그 의미가 잘 다가올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
“가르침을 받는다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갈라디아교회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있었고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있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첫 번째는
1.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 대한 중요성입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선교, 구제, 교제도 중요하지만, 그 중심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일이 우선입니다.
교회의 시초부터 가르침은 교회의 가장 우선되고 본질적 사역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42 (NKRV)
42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교제, 떡을 뗀다는 것은 성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교제, 성찬, 기도는 교회의 너무나 중요한 사역입니다. 이를 위해 성도들이 모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역 이전에 사도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고, 성찬하고, 기도에 힘쓴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의 주된 사역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5:42 (NKRV)
42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사도행전 15:35 (NKRV)
35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사도행전은 이렇게 마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8:31 (NKRV)
31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이렇게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교회가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본질적인 사역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구제하는 일로 인해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이 소홀해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때 이러한 결정을 합니다.
사도행전 6:2–4 (NKRV)
2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여기 “접대”는 구제 사역을 말합니다. 이 사역으로 인해 사도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명을 세워 이 일을 맡기게 됩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6:7 (NKRV)
7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졌고 예루살렘에 제자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말씀 사역이 중요한 것은 교회의 모든 사역이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배, 선교, 구제, 양육, 교제 등 각 사역은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예배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구제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양육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교제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과 행위의 권위는 오직 말씀뿐입니다.
2.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소명을 받고 자격을 부여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말씀 사역은 교회의 본질임을 확인했습니다. 이 중요한 사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명을 받은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소명이란 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사역자로 부르신 사람만 이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잘 가르친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사역자로 부르신 사람들이 합니다.
로마서 12장에는 성도마다 은사가 다르다고 하면서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12:6–8 (NKRV)
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섬기는 은사가 있는 성도가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성도가 있습니다.
위로하는 은사가 있는 성도가 있는 것처럼,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성도가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4:17 (NKRV)
17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디모데를 파송한 이유는 말씀을 가르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고 바울은 이것을 점검하고 확인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서 이렇게 편지합니다.
디모데전서 1:3 (NKRV)
3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라고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다른 교훈이 교회에서 가르쳐지지 못하도록, 오직 하나님 말씀만을 에베소교회에 가르치기 위해서 였습니다. 즉 디모데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바울이 검증한 말씀 사역자였습니다.
바울이 그에게 쓴 첫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13–16 (NKRV)
13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14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15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16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바울은 말씀 사역자인 디모데에게 전념할 것을 말하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입니다. 무엇을 읽는 것입니까? 하나님 말씀입니다. 권면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읽고 묵상한 것으로 권명하고 가르치는일에 전념하라고 합니다. 그럴 때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그 자격을 검증받은 사람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믿음이 좋다고 해서 가르치는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러한 소명과 자격을 검증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 교회들의 모임인 총회가 이것을 검증합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자들은 신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몇 단계의 검증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가르치는 자, 즉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한전도사님이 내일 강도사시험을 보러 갑니다. 신학교에 들어갈 때 제가 추천서를 써 주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신학계속 추천서를 써서 노회에 올렸습니다. 해마다 검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도사 시험을 통해 다시 한번 총회 목사님들이 검증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강도사가 됩니다. 강도사란 강도 즉 교회에서 가르칠 수 있는 소명과 자격을 검증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쓴 두 번째 편지에서는 이렇게 엄하게 명합니다.
디모데후서 4 (NKRV)
1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목사가 가장 힘써야 하는 것이 바로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서 4:11–12 (NKRV)
11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를 언급합니다. 목사와 교사를 함께 묶어 언급하는 이유는 목사가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사역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다고’ 하는데 그가 누구입니까? 그 윗 구절에 보면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삼으셨다”라는 것은 ‘주셨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직분은 주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직분이 아니라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주신 직분입니다.
목사가 이 사역을 바르게 감당할 때 성도들이 온전해 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목사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이 온전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
다음으로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십니다.
“함께 하라”는 원문으로 보면 ‘코이노네오’입니다. ‘함께 나누다’ ‘공급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가 쓰인 곳을 보면,
로마서 12:13 (NKRV)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물질을 공급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로마서 15:27 (NKRV)
27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영적인 것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라는 것은 영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을 나누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일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재정적으로 섬김을 말할 것입니다.
말씀 사역자들은 돈을 목적으로 사역하지 않습니다. 말씀 사역 자체가 하나님의 부르심이기에 사명감을 가지고 사역합니다. 중대형교회의 목사님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목사님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역을 하는 것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우는 일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때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가르치는 자가 생활에 염려하지 않도록 좋은 것을 나눠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9–10 (NKRV)
9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성도들의 재정적 공급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7 (NKRV)
7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고린도전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9:13 (NKRV)
13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바울은 말씀 사역자들이 교회를 통해 재정의 공급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면서, 구약의 제사업무를 담당했던 자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을 말합니다. 그들은 기업이 없었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각 지파가 드린 제물로 채움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말씀 사역자들은 기업이 없지만 성도들의 드린 헌금을 통해 채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원리로 최근 논의되고 있는 목사의 이중직을 반대합니다. 목사는 사례가 아무리 적어도 성도들의 헌금을 통해 생활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선배 목사님들이 해왔던 것처럼, 쌀독에 쌀이 없어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목사의 야성이고 멋입니다. 목사의 간증은 대부분 하나님의 물질로 채워주신 일들이거든요. 이중직을 통해 재정을 충당할 수 있겠으나,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지 권장할 사항은 아닙니다. 사도바울도 텐트를 만들며 자신의 사역비를 충당했지만 특별한 상황에서 잠시 동안 한 것입니다. 목사는 아무리 적어도 성도들의 헌금으로 생활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때 성도들은 말씀 사역자가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도록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눠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5:17–18 (NKRV)
17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18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는 목사를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한 것처럼, 말씀 사역을 하는 일꾼들이 사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갈라디아서 마지막에 이러한 권면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갈라디아 교회의 말씀 사역자들이 물질로 인해 어려움을 당한 것 같습니다. 사실 목사가 돈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말씀 사역자가 생활로 인해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하면 말씀 사역에 힘을 내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계속되면 교회가 힘을 잃게 됩니다.
바울도 말씀 사역을 하면서 이러한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네가 돈 벌려고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그 동기까지도 의심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역자를 가장 절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9:3–14 (NKRV)
3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우월하지도 않고, 인격적으로 낳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셨다는 것과 은사를 주셨다는 외에는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나친 기대를 해서도 안 됩니다. 행여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불신하거나 비판적 자세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적을 두기 시작하면 내 영혼이 메마르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 사역자를 통해 영의 양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정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의 자세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믿어야 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편지하여 감사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 (NKRV)
13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말씀 사역자를 통해 가르침을 받을 때 그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말씀 사역자가 성경 말씀을 바르게 전한 것을 전제합니다. 이것이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우리 교회는 저 보다 더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지식적으로 뛰어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신앙도 저 보다 더 좋은 분들이 많으십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이 제가 성경을 바르게 전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면 그 말씀이 영의 양식이 되어 여러분을 성장시키고 강건하게 할 것입니다.
목사의 설교는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님들은 목사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만일 성경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면 하나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벗어난 말씀을 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베뢰아 성도들이 좋은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7:11 (NKRV)
11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성도들이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상고했다는 것은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찾아보았다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들의 바른 자세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일 설교를 듣고 집에 돌아가셔서 목사의 설교가 과연 성경적이었는지는 살펴보셔야 합니다. 만일 성경적이었다면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버리셔야 합니다.
좋은 말씀이다, 은혜롭다 정도가 아닙니다. 목사의 설교가 성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으로 듣고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저를 통해 자신의 뜻을 여러분들에게 전달하고 계십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여러분보다 많이 더 나아서가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제가 전하는 말씀이 성경적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셔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듣고 믿으시고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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