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 21. 십자가만을 자랑하라
갈라디아서 6:11-18
11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갈라디아서 마지막 시간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그동안 대필자가 편지를 쓰다가 이 부분부터는 직접 펜을 들고 쓴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 편지를 보내는 것은 상당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미리 쓸 것을 머리에 정리해 놓고, 간략하고 함축적 용어를 사용하여 작은 글씨로 썼습니다. 당시는 메모하거나 저장할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머리에 기억하고 체계화해 말로 전달하는 기술이 발달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전화번호를 10개 이상 외우는 분은 별로 없으실 겁니다. 그러나 핸드폰이 보급되기 전에는 10개 이상 외우는 것은 보통이었습니다. 활자나 종이가 없던 시절에는 기억과 구전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던 것입니다.
유시민작가가 서울대 경제학과 시절 옥중에서 작성한 항소이유서가 200자 원고지100장에 달하는데 퇴고를 하지 않고 한번에 쓴 글이라고 합니다. 미리 머리에 작성할 내용과 구조를 담고 작성한 글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라디아서야 6장에 불과하지만 로마서의 경우 16장입니다. 그 긴 내용을 미리 머리에 넣어놓고 낭독하면 대필자가 쓰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보면 편지 마지막에 안부인사를 쓰고 있는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로마서 16:22 (NKRV)
22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더디오가 로마서를 대필하다가 바울의 허락을 받고 이 부분을 첨가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서신서들을 읽을 때 이러한 것을 염두하고 읽으면 훨씬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신서는 한번에 읽는 것도이 좋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오늘 마치게 되면 집에 돌아가셔서 한번에 6장까지 읽어보세요. 30정도 소요될 것입니다. 분명 큰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친필로 마지막에 쓴 내용은 무엇일까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에 대해 마지막 경고하면서 그렇게 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12절에 뒷부분을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이라’. 13절 마지막에 보면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율법 지킴을 통해 의로워지려고 하고 또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은 십자가로 말미암는 박해를 면하려 하기 위함이다. 또 너의 육체를 자랑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시 십자가를 전하면 박해를 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아름다움의 상징입니다. 여성들은 귀걸이나 목걸이로 착용합니다. 십자가는 평화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여러분의 꿈에 십자가가 보였다면 어떻겠습니까? 분명 좋은 꿈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 십자가는 잔혹한 처형 도구였습니다. 십자가형은 사람을 매달아 죽이는 처형방식입니다. 로마가 고안한 역사상 가장 잔혹한 처형방식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자국민에게 십자가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국가에서 반역죄나 살인 등 잔혹한 죄의 경우에만 십자가형으로 처형했습니다.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게 되면 건강한 청년의 경우 일주일 정도 매달려 있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죽어가는 동안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온갖 고통을 다 겪게 된다고 합니다. 단두대에 목 베어 죽는 것은 잠깐의 고통으로 끝날 수 있지만 십자가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은 인간으로서 가장 비참하고 참혹한 죽음입니다.
옷이 다 벗겨진 채 나무에 달려 온갖 수치와 고통을 당하다 죽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짐승들의 밥으로 버려지게 됩니다.
이러한 처참한 사형 방식인 십자가를 떠올린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을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땅에 들어가 지켜야 할 율법 가운데 하나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21:22–23 (NKRV)
22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임으로 그 시체를 약속의 땅에 두어 더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군가 나무에 달려 죽었다면 당연히 저주받은 자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을 때 당시 모든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로 여겼습니다.
이런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전파한다는 것은 정신 나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전파하는 자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미친 사람 취급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죽은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전파하는가?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죽이는 일을 자청하여서 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라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전했을 때 그를 돌로 쳐 죽이는 자들 가운데 증인으로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8:1 (NKRV)
1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행전 8:3 (NKRV)
3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바울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라고 믿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것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변화된 것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가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 하늘로부터 강력한 빛이 비쳤습니다. 바울은 직감적으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땅에 엎드렸습니다. 이때 소리가 들립니다.
사도행전 9:4 (NKRV)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 앞에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으로 불타 올라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오기 위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묻고 계십니다. 바울은 순간 굉장히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충성하는데 왜 하나님은 나를 박해하냐고 하실까?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내가 알고 믿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묻는 것입니다. 자신 앞에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신가? 그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9:5 (NKRV)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 생생한 체험을 복음을 전할 때마다 간증했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간증합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아그립방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도 이 체험을 간증을 합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 후 광채로 말미암아 눈먼 상태로 3일을 보내게 됩니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먹지도 마시지도 못합니다. 3일 동안 바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구약성경을 되새겼을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메시야가 될 수 있는가?를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그때 그는 스데반이 죽기전에 했던 설교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성경 전체를 요약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신실하게 일하셨지만 너희가 거부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한 민족을 이루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지만 너희가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보내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하였지만 그들까지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죽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기던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했고 그 곁에 인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광분하여 스데반을 성밖으로 끌고가 돌로 쳐 죽입니다. 그가 죽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본 사람이 바울입니다.
사도행전 7:57–8:1
57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1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바울은 눈이 먼 상태로 스데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가 죽기 전 보았던 인자, 메시아를 바울도 보았습니다. 그분은 다름 아닌 십자가에 죽은 예수였던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환상이나 꿈이 아닙니다. 바울은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확실한데, 그 저주는 자신이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은 것이란 사실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십자가 만이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는 동시에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후 바울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1:22–24 (NKRV)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2:1–2 (NKRV)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갈라디아서 지역에서도 십자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복음에 응답하여 나온 자들이 갈라디아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유대로부터 온 사람들이 다른 복음을 가르친 것입니다. 십자가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통탄해합니다.
갈라디아서 3:1 (NKRV)
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사건은 너무나 명백한 사건이었고 그 사건은 하나님의 저주받은 사건이었으면, 그 저주는 우리 죄로 인해 저주를 대신 받으신 사건이었고, 그것을 믿음으로만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인데, 그것이 너무나 확실한데, 누가 너희를 꾀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만으로 충분한데 누가 십자가외에 무엇을 더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십자가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활동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사랑인데 어떻게 예수 믿는 자들만 구원하시는가 라고 도전합니다. 예수를 믿지는 않지만 착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 여러 갈래인 것처럼,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여러 가지 다 주장합니다. 불교를 통해, 이슬람을 통해, 힌두교를 통해, 참선을 통해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믿고 불교도 믿습니다. 예수님도 믿고 모하메드도 믿습니다. 예수님도 믿고 여러 신들을 동시에 믿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는 이유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받는 박해를 면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고작 구원의 길이 그것이냐고 조롱당할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좀 더 고상하고 고차원적인 방법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는 끊임없이 십자가를 부끄러워했습니다.
중세교회는 십자가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상한 종교의식과 다양한 선행체계를 세우고 이를 지켜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십자가가 부끄러운 것입니다.
오늘날도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좋은 프로그램, 화려한 예배당, 청중을 압도하는 찬양, 그리고 훌륭한 목사를 전합니다.
유대인들이 구했던 표적을 자랑하고 헬라인들이 구했던 지혜를 전합니다.
사람들이 왜 십자가를 전하지 않을까요?
13절에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할례받은 육체를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됨의 외적 표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랑하기 좋죠. 할례는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선행은 자랑하기 좋습니다. ‘우리교회가 사회에 얼마를 기부했습니다.’ 얼마나 자랑하기 좋은가요? 율법, 선행, 외적 종교 행위는 자랑하기 좋습니다. 40일 금식기도 3한 목사. 자랑하기 좋죠. 참 신령한 목사님인가 보다 여겨집니다. ‘기부금 1억’ 자랑하기 좋습니다. ‘선교사 100명 후원’ 자랑하기 좋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도들이 십자가를 전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업적과 공로를 선전합니다. 십자가를 자랑하기는커녕 부끄러워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탄 지하철에 한 청년이 올라타 십자가를 전한다면 여러분은 어떠시겠습니까? 아멘이라고 답하십니까? 아니면 부끄러워하십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6:14 (NKRV)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의 자랑은 십자가 밖에 없었습니다. 교회의 자랑은 십자가 밖에 없어야 합니다. 성도의 자랑은 십자가 밖에 없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우리의 희생과 헌신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10 (NKRV)
10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성도는 자신에게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은 압니다.
내가 이룬 성과나 업적 공로가 내 지혜와 노력의 결과라면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고, 기회를 주셨고, 건강을 주셨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말로만 하는 고백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6:15 (NKRV)
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다.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과거의 내가 죽고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단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많이 불렀던 찬양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찬양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6:17 (NKRV)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바울은 십자가를 전하는 것 때문에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십자가를 전하면 고난을 당합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전하면 고난을 받게 됩니다. 왜 그런가요? 십자가를 전하기 위해서는 왜 예수님이 저주를 당할 수밖에 없는가를 전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전할 때 필연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비참한 죄인임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최근 개척한 젊은 목사님과 교제하던 중 자신이 초등학교 앞에서 전도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아이들에게 예수님이 너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어라고 전했습니다. 아이는 핸드폰으로 엄마에게 전화해 ‘엄마 여기 어떤 아저씨가 나보고 죄인이래.’
경찰과 함께 온 엄마는 멱살을 잡으며 “누가 내 아이한테 죄인이라고 했어?” 그런데 그 옆에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목사님의 말씀을 끝까지 경청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위축되지 마십시오. 우리가 십자가를 전할 때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로마서 1:16 (NKRV)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또 십자가를 전하는 일이 괴로운 것은 사단이 이 일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십자가 복음이 능력인 것을 잘 압니다. 십자가를 전할 때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전하지 못하도록 온갖 교묘한 수법으로 방해할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노라”
갈라디아서 6:17 (NKRV)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흔적’이라는 단어는 원어로 ‘스티그마’입니다. 공동번역은 ‘예수의 낙인’으로 번역했고, 새번역성경은 ‘예수의 상처 자국’이라 번역했습니다. 내 몸에 예수라는 낙인이 찍혔다는 것은 나는 예수의 것이다 라는 의미이고, 예수의 상처 자국이라고 할 때는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을 나도 받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문맥상 예수의 낙인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하나님 자녀의 낙인으로 믿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에게 예수의 낙인이 찍혀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라는 낙인은 성령님의 임재입니다.
고린도후서 1:22 (NKRV)
22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에베소서 1:13 (NKRV)
13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성도들에게는 예수의 것이란 낙인이 찍혀 있는데, 그것은 성령님의 임재입니다. 내게 예수의 낙인, 즉 성령님의 임재가 임했는가를 어떻게 확인합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단지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 앞에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당시 노예들의 몸에는 주인이 찍은 낙인이 있었습니다. 주인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영광스럽게 여겼고 기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삶을 주관하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십자가에게 죽었고 내 안에 사신 예수 그리스도는 내 삶의 주인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가장 큰 영광이며 기쁨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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