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 5. 복음은 자유케 합니다
갈라디아서 2:1-10
1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바울은 2장에서 예루살렘을 두 번째 방문했던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때 있었던 일을 통해서 자신이 전한 복음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1절에 보면 “십사 년 후에”라고 밝힙니다. 언제로부터 14년이라는 것입니까?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 후 14년입니다. 이때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말합니다.
바나바
바나바를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사도행전을 배울 때 등장했었죠. 바울을 발굴하여 이방인의 전도자로 세웠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사도로 세움을 받고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 때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회심한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소개했습니다.
사도행전 9:26–27
26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이때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거침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로 인해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생명이 위협받는 처지에 놓입니다. 이에 사도들을 비롯한 믿음의 형제들이 바울을 다소로 보냅니다. 다소는 바울의 고향입니다. 그곳에서 무명의 사역자로 10년 동안 사역합니다. 그러던 중 안디옥교회를 섬겼던 바나바가 찾아와 동역을 제안하였고 이때부터 함께 선교사역에 헌신하게 됩니다.
잠시 바울이 회심 이후 14년의 행적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1:16–19
16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바울은 회심 직후 아라비아에서 3년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이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신학자 대부분이 일치하는 의견은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가지며 앞으로 있을 복음 사역을 준비했을 것으로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면서 자신이 전할 복음의 내용을 정리했을 것입니다.
첫번째 예루살렘 방문
이후 예루살렘을 방문하는데 이것이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입니다. 이곳에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게 됩니다. 그가 처음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그다지 환영받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바울의 회심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26
26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이런 분위기에서 바나바가 바울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소개해 준 것입니다.
사도행전 9:27
27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그런데 바울의 초기 예루살렘 사역이 사도들이나 제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복음에 대한 열정은 있었지만, 사역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사도들이나 제자들과 협력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거침없이 사역했기 때문에 바울을 죽이려고 공모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바울만 위협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전체 교회에 위협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28–31
28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다소에서의 10년
이 기록을 보면 형제들이 바울을 데리고 다소로 보냈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든든히 서 가는데 유익했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할때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바울은 순결함은 있었지만 지혜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의 권면으로 다소로 보내졌던 것입니다.
성경은 바울이 다소로 보내진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이후 다소에서 10년 동안 있게 됩니다. 다소는 바울의 고향입니다. 이 기간에 무엇을 했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아마도 무명의 사역자로 본격적인 사역을 진행했을 것으로 봅니다. 다소는 헬라철학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아덴 다음으로 이름난 학문의 도시입니다. 큰 성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회당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후 바울이 이방인 선교를 할 때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선교방식은 다소에서 했던 사역의 연장선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바나바가 자신을 찾아와 안디옥교회 사역을 제안합니다.
사도행전 11:25–26
25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이렇게 해서 바나바와 바울이 동역하게 된 것입니다.
디도
다음으로 디도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디도는 누구일까요?
신약성경에 보면 디도서라고 있습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디도서 1:4
4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고린도후서 8:23
23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디도는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영적 아들이었습니다. 또한 동역자였습니다.
그는 바울이 전도해 제자 삼은 헬라인(그리스)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도를 상당히 신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여러 가지 문제 있을 때 바울을 대신해 교회를 방문해 문제를 해결합니다.
또한 바울은 지중해상의 큰 섬 그레데에 교회를 세우게 되는데 그곳을 떠나면서 남은 사역을 디도에게 맡깁니다.
디도서 1:5
5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후에는 디도는 달마디아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디모데후서 4:10
10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바울에게는 여러 동역자가 있었지만, 바나바와 디도는 혈육 이상으로 가깝게 교제했던 동역자였습니다.
이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두 번째 방문한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과 두 번째 방문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첫 번째 갔을 때는 바울 혼자였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교회의 환대를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자의가 아닌 타의로 예루살렘 사역을 하지 못하고 다소로 가게 됩니다.
바울의 두번째 예루살렘 방문
그런데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어떻습니까? 동역자 바나바와 디도가 함께 있습니다. 얼마나 든든했겠습니까? 이들은 다소에서 10년의 사역 후에 만난 동역자입니다. 이들과 4년을 동역했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바울도 많이 성숙해졌습니다.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동역자와 협력하여 사역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비둘기 같은 순결함과 뱀같은 지혜로운 또한 겸비했던 것입니다. 성숙한 사역자가 된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성숙함을 보여주는 것 중에 하나가 소개됩니다.
갈라디아서 2:11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이 일은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처음 예루살렘에 방문했을 때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에게서 다소로 갈 것을 권면 받았습니다. 그런데 14년 후에는 베드로를 책망할 정도로 영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울이 이 정도의 영적 권위를 가지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과 연관됩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물타기를 하는 자들과 단호히 배격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일관성, 단호함이 베드로조차도 책망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한 것입니다.
이를 알 수 있는 구절이 이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5
5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그들에게 한시도 복종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들이 누구일까요? 유대인으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들이 강요 또한 타협하자고 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할례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도가 유대교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천 년 내려오는 모세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무엇보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과 관련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시면서 너희 후손은 반드시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후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의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때 과연 할례를 행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따라서 할례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반면 나머지 사도들은 처음에는 갈팡질팡했습니다. 그 말이 맞기는 하지만, 할례를 받아도 나쁠 것이 없지 않으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할례 문제 때문에 계속해서 유대교와 마찰을 빚게 되면 오히려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니 지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이런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머물러 있던 중 오정쯤에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갑니다. 그곳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 하늘이 열리고 보자기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온갖 네발짐승들과 땅에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골고루 있었습니다. 이때 음성이 들려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먹을 수 없습니다.”
보자기에 담긴 것들은 구약의 율법에 부정한 짐승들이었습니다. 그랬더니 두 번째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이런 일이 세 번 있고 난 뒤에, 그 그릇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베드로가 이 환상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을 때 외국인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들을 따라가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한 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0:28–29
28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베드로는 그때까지도 이방인들을 접촉하는 것을 꺼렸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환상 중에 부정한 음식을 절대로 먹을 수 없다고 세 번씩이나 말합니다. 성경에서 세 번은 꼭 숫자를 의미하지 않고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완강하게 거부한 것입니다. 이방인을 접촉하거나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거나 하는 일을 부정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말씀하셨어도 말입니다. 그만큼 종교적 민족적 전통과 관습은 버리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시는데도 거부합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예루살렘 공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15:5–11
5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만일 그때의 환상과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없었다면 베드로는 할례 문제로 계속해서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 발언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첫 번째 총회였습니다. 이때 결정된 것이 구원과 할례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주 예수의 은혜로 받는 것이지 할례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주는 자유
오늘 본문은 그때의 사건 즉 예루살렘 총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총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때 헬라인(그리스) 디도를 함께 데리고 가는데, 그곳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디도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요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3
3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바울은 이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갈라디아서 2:5
5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복음의 진리가 훼손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이 부분을 타협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요? 그것은 복음이 주는 자유를 상실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2:4
4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이게 무슨 말입니까?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어떤 자유인가 하면,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사단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가 어떻게 우리를 속박합니까?
우리는 죄를 즐기며 살아갑니다. 실수가 아닙니다. 어쩌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를 즐깁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죄를 짓도록 만드는 사단의 계략도 있습니다. 사단이 우리를 주장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지배합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찾아오셔서 죄의 속박과 사단의 속박 아래 있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8:31–36
31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인데 예수님께 죄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이러한 자유를 우리 스스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정결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의지를 발휘하고 애쓰고 노력하면 거룩해지고 정결해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할례와 율법이었습니다.
할례를 행하면 부정했던 내가 거룩해져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율법을 잘 지키면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가 맞지만 할례를 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룬 구원에 할례를 하나 것 붙인다고 뭐가 그리 문제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루신 완전한 구원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업자금을 빌렸다가 부도가 나 결국 감옥신세를 지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여러분의 부모님이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대신 갚아 주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유의 신분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출소한 후에도 나온 이후에도 계속해서 돈을 갚으려고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 보십시오. 이미 부모가 다 갚았기 때문에 자유로운 신분으로 행복하게 살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려 산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부모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마지막으로 외치신 말씀이 있습니다. “테텔레스타이”입니다. 이 말은 당시 경제용어입니다. 완전히 지불했다는 뜻입니다. 죄에 대한 대가를 완전히 치루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죄의 심판을 완전하게 조금도 남김없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며, 무언가 열심히 해야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시고, 기뻐하시리라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완전한 구원을 헛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이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담대함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지 못하고 종교적인 열심을 통해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마침내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지난 수요일 의성이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수요예배가 있어 저는 참석하지 못해 아침에 일찍 사진 한 장 찍고 축하해 주었습니다. 꽃다발도 준비하고 옷도 말씀하게 입히고 머리에 젤도 발라주었습니다. 전날 의성이에게 뭐 먹고 싶냐고 하니 탕수육이 먹고 싶다고 해, 예배 후 달려가 탕수육도 함께 먹었습니다. 이후 의성이는 집근처 공부방에 갔습니다. 공부방이 끝나고 나서 이 녀석이 고운이네로 간 것입니다. 허락도 없이 간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괜찮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저희도 편한 김에 따로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이틀을 외박한 것입니다. 처음엔 괘씸했다가 나중에는 서운해지더라고요.
금요일 집에 왔는데 안아주지도 않았습니다. 눈치를 슬슬 보더라고요.
엄마가 “너 허락도 안 받고 외박한 것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이 집에 있을 수 없어” 말했지만
장난으로 받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저녁에 제가 의성이에게 옷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용서를 구하지 않는 이상 이 집에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운이네 가서 살어. 이 옷은 아빠가 사 준 것이니까 벗어. 다른 거 입어.”
막상 나왔는데 추웠습니다. “차는 희수, 형원이만 탈 수 있어. 너는 이제 우리 가족 아니야.”
걷는데 아이가 추워해서 무인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커피를 뽑아 놓고 말했습니다.
“너 왜 엄마한테 잘못했다고 안해?”. “모르겠어.”
“너 고운이네서 사는게 좋아?” “모르겠어.” 모르겠다는 말이 더 서운했습니다.
“만일 엄마한테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하면 집에 들어갈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여기 혼자 있어. 아빠는 갈 거야. 삼촌이 데리러 올때까지 기다려.” 아빠는 커피 다 마시면 갈꺼야.
그리고 카페를 나와 골목에 숨었습니다. 1초, 2초, 3초 있다가 의성이는 울면서 아빠를 찾았습니다. 아이 손을 붙들고 집에 왔습니다.
엄마를 보자마자 울면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엄마는 의성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성아, 만일 네가 사고로 한쪽 눈을 잃는다 쳐. 이모가 너에게 눈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야. 그러면 너를 낳아준 엄마가 눈을 줄 것 같아. 아니야.”
그 말에 아이의 동공이 흔들립니다. 자기는 그럴 줄 안 것입니다.
“아니야. 엄마만 너에게 눈을 줄 수 있어. 너는 엄마 아빠의 아들이야.”
아무도 엄마와 아빠 만큼 너를 사랑하지 않아.
엄마와 아빠가 지금까지 너를 키운 것은 하나님께서 의성이를 잘 키워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엄마 아빠는 너를 절대 포기하지 않아.”
그러고는 안아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언가 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완전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무언가를 덧붙이거나 추가할 것이 없습니다.
가장 불쌍한 것이 사랑받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자식이 사랑받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불쌍한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세요. 그 사랑을 변함이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자식은 사랑받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은혜가 감사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하세요.
내가 비록 부족하고 못났지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세요. 그 사랑 안에서 또한 담대하세요. 이것이 복음이 주는 축복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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