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 8.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
갈라디아서 2:15–21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서가 강조하는 것이 ‘이신칭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믿음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죄 용서받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묻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집니다. 이 자유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악한 사단의 속박으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이전에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었습니다. 악한 사단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습니다. 평생을 죄와 사단에 종노릇 하며 살던 우리였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어떠했나요? 사주팔자, 운명에 갇혀 살지 않았습니까? 집안에 우환(憂患)이 생기기라도 하면, 조상의 묫자리가 잘못되었나? 생각하고, 자녀들 결혼 앞두고 사주팔자 보고, 이사라도 할라치면 손 없는 날 계산하고, 그랬던 우리입니다. 과연 우리가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나요?
그렇지 않더라도 죽음이 주는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살았습니다. 바쁠 때는 잘 모르지만 여유가 생기면 생각이 많아지죠. 삶이 무의미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합니다. 자기 연민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바쁘게 살아보기도 하고, 여행을 가기도 하고, 이런저런 취미생활을 해보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외롭고, 허무하고, 우울할 때가 많습니다. 이 모두가 죄와 죽음이 주는 허무입니다.
복음은 이러한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이 행복은 돈이나 명예가 주는 일시적 행복과 다릅니다.
복음은 먼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복음은 나를 변화시킵니다.
한때 복음이 나의 환경을 변화시킨다고 강조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건강해 지고, 사업이 잘됩니다. 자녀가 형통하고 모든 문제에서 해방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처방일 뿐 복음이 주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허무에 갇혀 있던 사람이 비전과 소망을 품게 됩니다.
원망과 한숨에 빠져 있던 사람이 기쁨과 감사의 사람이 됩니다.
돈과 명예 쾌락을 추구했던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합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이 섬기고 베푸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복음으로 변화되면 우리 주변도 바뀌기 시작합니다. 촛불이 어둠을 밝히듯이 나에게 있는 빛이 주변을 밝힙니다. 먼저 나를 통해 가정이 변화됩니다. 직장이 변화되고, 내 주변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원망하고 후회했던 일들을 오히려 감사하고,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이 기대하며 소망하게 합니다.
그 결과 건강해지고, 사업이 잘되기도 하며 삶의 얽혀있던 문제가 해결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복음이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소망의 사람이 되고, 감사의 사람이 되고, 사랑의 사람이 되는가를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신앙이 출발합니다.
1.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에세 죽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 매여 있는 나입니다. 사단의 속박 아래 있던 나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욕망의 지배에 이끌려 살던 나입니다.
회심 전의 바울 자신을 가리킵니다.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롭게 되려고 했던 자신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 정결하게 되고, 의롭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깨달은 것은, 외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 같은데, 자신의 내면은 변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위선이요, 외식이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척, 정결한 척, 할 수 있었지만 속사람은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죄의 본성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당연히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살인한 행위만 살인이 아니라 미움도 살인이라고 하셨거든요. 간음한 행위만 간음이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에서는 행위만을 가지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생각과 동기 또한 죄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비춰보니 자신은 살인자요, 간음한 자임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행동을 바꾸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강한 의지와 노력으로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마음은 그렇지 않아요. 노력해도 안 됩니다. 생각이나 마음은 의지와 상관이 없습니다. 분노, 미움, 음욕과 같은 것은 그냥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생각과 마음의 영역도 행위와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완전하고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은 완전합니다.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외적 행위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 즉 내면까지도 보십니다.
여러분, 거룩해지려고 애쓸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내가 거룩해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워지라고 할수록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겉은 포장할 수 있지만 우리 속까지 포장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결혼해서 아내와 살면서 큰소리를 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싸운 적도 거의 없습니다. 이 정도 인격과 성숙함이라면 목사로서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애들 키우면서 거의 매일 고함을 지르며 살아요. 눈을 뜨면서 잠들기 전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분노합니다. 처음에는 저 자신에게 얼마나 실망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깨달았습니다. 내가 별거 아니구나! 목사라고 별거 없구나.
제가 목사가 되었다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친다고 죄인인 내가 달라진 게 아니더라고요. 그동안 나를 분노하게 하는 자극이 없었을 뿐이지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인 거예요.
그동안 새벽기도 얼마나 했겠어요. 찬양 인도를 얼마나 했겠어요. 설교를 얼마나 했겠어요.
이 정도 하면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안 돼요. 안 됩니다. 우리의 죄성이 얼마나 끈질긴지 몰라요.
만일 새벽기도 하는 정성으로 매일 헬스클럽에서 운동했다면 보디빌딩 선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외향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 내면은 지긋지긋하게 바뀌지 않습니다.
안 됩니다. 불가능해요. 아무리 의지력을 불태우고 노력해도 악한 본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면 외부적 자극이 없는 수도원에 들어가 경건에 힘쓰면 좀 바뀔까요?
젊은 수도사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경건에 힘썼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기도로 시작하고 시편 찬송을 부르면 종일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에 떠나지 않는 문제는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에서 배운 대로 고행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에 따라 1511년 로마 라테란성당의 ‘스칼라 산크타(Scala Sancta)’라는 거룩한 계단을 오르며 고행했습니다. 이곳은 28개의 대리석 계단으로서 ‘빌라도 계단’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당시 이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오르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루터는 라틴어로 된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한 계단씩 오르면서 맨 위에 까지 도달하고자 안간힘을 썼습니다. 나중에는 피멍이 들었습니다. 루터는 죄 사함 받기 위해서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기쁨이나 평강도 없었고 구원의 확신도 없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강의를 위해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연구하던 중 깨달은 것이 바로 이신칭의입니다. 우리가 죄사함 받고 의로워 지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구나. 이후 그는 행위구원을 가르친 교회를 대항해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여러분 바울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적이 있나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두 강도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레위기 1장의 속죄제사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죄인이 자신의 죄를 사하기 위해, 흠 없는 소나 양을 잡지 않습니까? 이때 안수를 합니다. 안수를 통해 자신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합니다. 그리고 짐승을 잡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전가 받으시고 속죄 제물이 되어 죽으신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나와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심판 받으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저주의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심판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임과 동시에 우리의 죽음이기도 합니다. 그때 죄인인 나도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 죄가 도말 된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때 죄인이었던 나도 죽은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내 죄가 십자가에게 완전히 도말 되었습니다.
2.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후 승천하시어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권자가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우리의 주권자가 되셨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십니다.
로마서 8:9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님입니다.
고린도전서 3:16
16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요한1서 4:13
13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한복음 14:17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으로 거하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모신 자들입니다. 이전에는 악한 영의 지배를 받았지만 이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정결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함께 거할 수 없습니다. 빛이 어둠이 공존할 수 없듯이 하나님이 죄인과 함께 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도말하여 정결하게 했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는 분노하고 미워하고 음란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도 완전히 도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2:3
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암으로 투병하시는 자매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이전부터 계속 기도했던 자매입니다. 저희를 보자 한참을 웁니다. 그날 저녁 처음 만난 것이었습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고 영접기도를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배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영접합니다. 지금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나의 구주가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저는 이미 그 자매 안에 성령님이 계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날 죄인이었던 자매는 죽었고,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셨다고 확신합니다. 그 영혼은 반드시 천국에 갈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존재가 변화됩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 우리의 본성이 바뀝니다. 죄인의 본성에서 의인의 본성이 됩니다. 죄를 탐하고 즐겼던 우리가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죄를 짓는 것이 더 힘들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더 힘들어집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을 그리스도께서 이끌어 가십니다. 보십시오. 그동안 내 뜻대로 산 것 같잖아요. 내가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여 여기까지 온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 오셨어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와 동행하시고 인도하시면 마침내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로마서 8:30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이렇게 변화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첫째,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며 살아야 합니다. 이 믿음은 단지 처음 신앙에 입문할 때 고백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믿고 고백해야 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날마다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확신에서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로마서 5:8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8:35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로마서 8:38–39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이 사실을 확신하고 믿게 되면 힘과 용기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지금 비록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나에게 좋은 것들을 주실 것이다. 라는 확신입니다.
두 번째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십자가에 죽은 예수는 인권운동을 하다 죽은 유대인 청년이 아닙니다. 민족 해방운동을 하다 죽은 열사가 아닙니다. 그 분은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분이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여러분 곁에 계신 분들은 성자 예수님 죽기까지 사랑하신 분들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죽는다면 그 보다 더 큰 사랑의 증거가 어디있습니까?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기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이를 위해 죽기까지 성부께 순종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진노를 한몸에 받으시며 그 고통을 참아내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그 구원의 은총을 믿고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존귀히 여기시며 거룩하고 정결하게 하사,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이러한 성삼위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위한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두 가지 요소는 바른 지식과 확고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예수님을 주셨다는 지식 이것을 확고하게 신뢰해야 합니다. 지식만 있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확고하게 신뢰해야 합니다. 그 신뢰가 우리의 삶을 강하고 담대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믿음에서 흔들리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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