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4-04-09 14:09

9. 믿음으로 의롭게 됨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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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9. 믿음으로 의롭게 됨

 

갈라디아서 3:1–14 

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6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는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의지력을 불태워 애쓰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먼저 주시고 그 말씀을 믿게 하심으로 구원하십니다.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다소 과격한 언어를 사용하여 그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1절에 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말합니다. 3절에도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고 합니다. 영어 성경은 ‘You foolish’로 번역했습니다. ‘미련하다.’ ‘바보스럽다’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미련한 것입니까? 의롭게 되기 위해 율법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율법 조항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 의지력을 불태워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2:16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과 율법주의

우리가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을 말합니다. 십계명을 근간으로 한 613가지의 계명입니다. ‘하지 말라’가 365개, ‘하라’가 246개입니다. 율법 자체는 선합니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바울이 어리석다는 하는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닙니다.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내 의지와 노력을 다해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 의로워질 수 있다는 믿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리석다는 한 것은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입니다. 바울이 이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했을 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죄 용서받고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것도 맞지만 율법도 함께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할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의로워진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이러한 가르침에 현혹되었고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떠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가슴을 치며 통탄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율법주의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타락한 죄인인가를 깨닫지 못하게 하여,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게 합니다. 내가 노력해서 의로워질 수 있다는데 굳이 십자가를 의지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너무나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1:6–8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상히 여기노라’는 표현은 순화된 표현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이렇게 말했을까요? 

갈라디아서 1:8–10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성도들을 복음에서 떠나게 한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일 것입니다. 너희가 받은 것은 복음을 말합니다.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강조하여 말합니다. 어조가 상당히 감정적이고 강합니다. 

 

“어떻게 바울이 저렇게 말할 수가 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야?”분명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덧붙입니다.  

갈라디아서 1:10

10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너희가 나를 욕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이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비난해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가르침에 속아 복음에서 떠난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또 너희를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도한 자들 또한 저주받을 만큼 잘못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장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떻게 은혜의 복음을 떠나서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이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증명합니다. 세 가지로 증명하는데,

그 첫 번째가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너희가 율법을 지켜서 성령을 받았느냐 아니면 믿음으로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

2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님을 모신 것을 말합니다. 너희가 성령님을 모신 것이 율법을 잘 지켜서냐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까? 그러면 그 성령님은 어떻게 여러분 안에 계신 것입니까?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려고 애쓰고 노력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인격이세요. 어떤 힘이나 에너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을 가진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모실 수 있었던 그 분이 우리에게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편에서 보면 일방적이고 불가항력적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처소로 삼으시고 임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임재하실 때 어떤 수단을 매개로 하여 오십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그냥 아무 때나 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말씀을 통해서 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선포될 때 또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 그것을 듣고 읽는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임하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고 말한 것입니다. 

무엇을 들은 것입니까?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 믿음을 갖게 하십니다. 이때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들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읽고 있는 말씀을 믿게 하십니다. 이 믿음을 통해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논리적인 순서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셨기 때문에 말씀이 들린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셨기 때문에 듣고 있는 말씀이 믿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수천 번 듣고, 성경을 수백 독 해도 성령님이 임하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논리적으로 잘 가르친다고 해도 성령님이 임하지 않으면 믿음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탁월한 설교자라 할지라도 믿음을 발생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임하면 아무리 어눌한 말투와 부족한 설교에도 믿음이 생깁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님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 가운데 성령님이 임하시면 믿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전도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는 자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또는 성경책을 읽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듣는 그 사람에게 성령님을 보내십니다. 말씀을 읽고 있는 그 사람에게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로마서 10:17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세상의 좋은 강연들이 많지요. 저도 명강사의 강연을 들으면 깨닫는 것도 많고요. 감동도 받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강연이라고 해도 성령님이 임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말씀을 듣고 읽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그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신학과 자매는 불신 가정에서 살다가 누군가 건네준 요한복음을 혼자서 읽다가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에요. 혼자 성경을 읽다가 마지막 21장에서 성령님이 임하신 것입니다. 성경이 믿어지고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다 믿어진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전달하는 사역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복음을 전할 수 없는 분들은 성경을 전달하세요. (제가 요한복음을 이렇게 구매해 놓았습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가져가셔서 전도용으로 사용하세요). 누군가 이 말씀을 읽을 때 믿음이 생겨요.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한 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을 때 임하십니다. 

 

두 번째 성령님의 능력을 행하는 것이 사람의 노력으로 된 것이냐 아니면 믿음으로 된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5 

5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만일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의 선한 노력으로 되는 것이라면 더욱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능력은 믿음을 통해서 역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통해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믿는 자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자유로운 사역입니다. 성령님은 그 누구를 통해서도 역사하실 수 있지만 특별히 믿음을 가진 자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간혹 목사의 기도를 받고 치유된 분들의 고백을 듣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성령님께서 저를 통해 치유하신 것이지 제 능력이 아닙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성령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꼭 목사만 성령님이 사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가진 그 누구도 사용하시어 능력을 행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교회의 질서와 권위가 세워질 수 있도록 능력을 행하십니다. 그 질서 속에서 목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4–5 

4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여기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은 치유, 방언, 예언이라기 보다는 복음을 믿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을 믿게 된 것은 성령님께서 나타나셔서 능력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이 전파될 때 실제로 신비한 능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로마서 15:18–19 

18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 그들을 믿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신비한 능력을 나타내셨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신이 떠나가도, 환상을 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비상은혜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이 일하시지만 비상적인 은혜가 필요할 때는 이러한 일들을 행하십니다. 이 모두가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어떤 노력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믿는 자들을 통해서 자유롭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15:18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로마서 15:18 

18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주도적으로 하신 일이고 나는 단지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여전히 성령님의 능력은 믿는 자들을 통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일반은혜뿐만 아니라, 기적을 통한 비상 은혜를 베푸셔서 믿음을 갖게 하십니다. 

 

불교 집안이었던 저희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복음을 들은 것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아버지에게 치유의 능력이 임했고, 또한 하나님의 주신 환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일반은혜와 비상은혜가 함께 임하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령님의 능력이 임한 것이 과연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인가? 우리 가정이 선한 일을 많이 해서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우리 가정에 임하셔서 말씀을 듣고 믿게 하심으로 일어난 일들입니다.

 

셋째,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6-14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갈라디아서 3:6 

6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그가 의로운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며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5:6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을 보면, 그가 과연 믿음의 조상인가 싶을 정도로 실망스러운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집안이 갈대아 우르지역에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고 그 땅을 너와 후손에게 주고 너를 복되게 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가나안땅에 들어갔지만,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도주합니다. 

 

또한 애굽 땅에서 아내의 아름다운 때문에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걱정하여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 결과 애굽왕 바로의 아내가 될 뻔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씨를 통해 자녀를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오랜 기간 자녀가 생기지 않자, 첩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자녀를 낳습니다. 이로 인해 가정에 불화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행위로 보자면 의로울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믿음이 흔들릴 때도 많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와 함께하심을 믿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조차도 그가 발휘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믿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죄충우돌 흔들렸던 아브라함의 믿음이 온전히 세워질 때는 99세 되던 해, 이삭이 태어났을 때입니다. 도저히 인간의 노력으로 잉태할 수 없는 때였습니다. 사라는 경수가 끊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침내 이삭을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비록 신실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하심을 그의 전 인생 가운데 반복적으로 체험함으로 비로소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믿음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믿음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신실하지 못해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어느순간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나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은, 내가 발휘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얼마나 믿을만한 분인지를 우리의 전생에 통해 반복적으로 체험하게 하셔서 마침내 믿음을 갖게 하시는 그 믿음 때문입니다. 

 

내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죄송한 것뿐인데,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내 손을 놓지 않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아브라함처럼 말입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우리도 누리게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3:9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큰애를 키우면서 힘든 부분이 많아요. 일기장을 보니까 이런 글을 썼더라고요. 나는 아무리 줄넘기를 연습해도 하나도 못 한다. 큰애는 다른 애들과 다르게 안되는 게 많아요. 지난주에도 엄마랑 앉아서 글씨 쓰는 것을 연습하는데 안되요. 선을 곧게 그리는데 안되요. 교정해야 할 행동도 많고 언어도 많아요. 그런데 아무리 혼나고 벌을 서도 자고 일어나면 다 잊어버려요. 안되는 것을 되게 하려니까 힘듭니다. 가장 힘든 것은 큰애 자신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 없어요. 그것은 불가능해요.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하면 삶이 고달파요.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긍휼히 여기세요. 왜 똑바로 못걷냐고 하지 않으세요. 우리는 영적 장애인으로 태어났어요. 똑바로 걸을 수 없어요. 똑바로 볼 수 없어요. 똑바로 말할 수 없어요. 

의롭게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비참한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의지와 노력으로 이 비참한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를 의지하고 붙들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의로움을 우리의 것으로 여겨주시고 이것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그치고 혼내도 반성하지 않던 큰애가, 여행 마지막쯤에, 엄마가 앉혀놓고 말합니다. “희수야, 엄마가 심한 말 해서 미안해. 네가 잘 안되는 거 알아. 네가 노력해도 잘 안되는 것 알아. 그래도 엄마는 너를 사랑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아이가 펑펑 울면서 말합니다. “엄마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빠 엄마 말 잘 들을게요. 제가 속상하게 한 것 죄송해요.” 물론 다음 날 아침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속을 썩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닫고 죄송하다는 말을 한 것은 벌세우고 채벌할 때가 아닙니다. 그래도 괜찮다는 그 말. 즉 은혜를 체험했을 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믿으로 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발휘한 믿음 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마침내 구원하십니다. 

 

에베소서 2:8–9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내가 발휘한 믿음 조차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입니다. 그러니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기에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감사와 찬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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