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91. 신앙의 항해 3
사도행전 28:1–10
1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3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5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7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8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9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10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사도행전 강해 91번째 시간입니다.
표류하던 배는 한 섬에 걸리게 됩니다. 배에 있던 276명의 사람들, 그들은 헤엄을 치고, 널빤지를 타기도 하여 모두 육지에 올라갑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한 사람도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고 구조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멜리데 섬에서 있었던 몇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어떠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 가운데 주는 첫 번째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1. 우리의 인생은 표류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설명하겠습니다.
#지도 <바울의 3차 선교여행>
이들이 도착한 섬은 멜리데 섬입니다. 멜리데섬은 시실리 섬 밑에 있는 현재의 몰타섬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알렉산드리아호는 광풍에 밀려 표류했지만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탈리아에 거의 가까이 온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배를 이곳까지 이끌고 간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럴 때가 있지요. 광풍에 밀려 표류하는 것처럼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을 잃어버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디론가 밀려가는 때가 있습니다.
청년의 때는 저마다 꿈꾸는 행복한 미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학졸업하고 나니 취업해야 하고, 취업하니까 결혼해야 하고, 결혼해 아이가 생겨 키우다보니 어느새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가고 독립할 때가 된 것입니다. 내가 의도한 것도 결정한 것도 아닌, 현실에 밀려가는 삶속에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주어진 현실은 그것을 하기에 녹녹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지금의 나는 내가 결정하고 선택한 길로 온 것이 아니라, 현실에 밀려 밀려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래서 늘 마음 한구석에는 이루지 못한 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제대로 살아왔는지 또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지 이제 무언가를 꿈꾸고 기대하기에 너무 나이든 것은 아닌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것은 우리 인생은 주님의 원하시는 길로 가고 있고 이 길의 끝에는 주님께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현실에 밀려 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붙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내 삶을 주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 분의 약속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때로는 우리 자녀들 보면서 염려될 때가 있지요. 하나님께서 저들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까? 신앙을 버리지는 않을까? 이상한 사람 만나 결혼한다고 하면 어떡하지? 뉴스에 안 좋은 사건과 사고 소식을 접하면 두려움이 엄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여기까지 이끌고 오셨다면 우리 자녀들의 삶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신앙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배에 있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내 자녀를 더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주님께 우리의 자녀를 맡겨드립시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먼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아기 모세를 갈대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띄워 보낼 때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기가 죽을 것도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의 딸을 만나게 하셨고 애굽의 궁궐에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나의 삶도 우리 자녀들의 삶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배가 표류하여 모두가 절망하고 있을 때에 바울만큼은 소망을 가졌던 것은 주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언제나 돕는 손길을 예비해 주십니다.
섬에 올라간 그들은 매우 지쳤습니다. 비가 오고 있었고 날씨도 추웠습니다. 만일 그대로 있었다면 저체온 증에 걸려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섬에 있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달려 나와 불을 피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8:2
2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만일 원주민들이 이들을 발견하고 불을 피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체온이 35도 이하로 떨어지면 몸떨림 현상이 오다가 34도 이하가 되면 술취한 듯한 비정상적인 행동을 합니다. 외부자극에도 무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다 32도 이하로 떨어지면 의식을 잃고, 심방박동과 호흡이 느려집니다. 28도 이하가 되면 심페정지가 옵니다.
그러니까 추운 날씨에 찬 물에서 나온 사람은 빨리 옷을 벗기고 모닥불로 몸을 말리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곳이 무인도였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땅으로 올라오자 마자 불을 피워 몸을 녹였다는 것은 누군가 그날 아침에 배가 파선되는 것을 보았고 사람들이 뛰어내려 바다로 올라오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신속하게 사람들을 모아 불을 피운 것입니다.
원주민들이 특별한 동정을 했다고 하죠. 또 우리를 영접했다고 합니다.
원주민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디언 같은 원주민이 아닙니다. 당시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는 타문화권의 사람들을 바바리안, 즉 원주민으로 불렀습니다. 그 섬에 사람들의 특별한 환대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놀랍지 않습니까? 폭풍 가운데서도 살려주신 주님께서는 추위 가운데서도 지켜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낮에는 태양이 뜨거워 도무지 행군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름기둥으로 태양을 가려주십니다. 밤에는 춥고 동물의 위협이 있으니까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돕는 사람들을 보내주십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도왔습니까?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을 통해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위해 그동안 수없이 많은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믿음의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본문의 사건처럼 말입니다.
만약 그때 그분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시편 46:1
1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때 그 분의 도움은 하나님의 손길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 동안 제가 받았던 특별했던 환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뉴질랜드 여행 중에 시골에 있는 아담한 교회에 들렸습니다. 그때가 성탄절이었습니다.
성탄절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할머니 대여섯 분이 전부였습니다. 저희와 교제했던 청년 부부와 함께 참석했습니다. 나름 성탄을 맞이하여 이곳저곳 장식을 하셨는데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정감이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할머니들은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여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두 부부가 참석한 것이 좋으셨는지 활기가 있었습니다. 케이크와 샌드위치, 초콜릿 등 풍성한 식탁이 준비되었습니다. 음식이 너무 풍성해서 만약 우리가 참석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넓은 원형식탁에 둘러앉아서 먹는데 별로 말씀들이 없으십니다. 오랫동안 침묵에 익숙해 있는 듯 했습니다. 그때의 들었던 설교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할머니들의 그 포근했던 환대는 지금도 제 마음에 따듯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지난주에 계속해서 제 머리를 떠나지 않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것의 소망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가 세상에 소망을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얼마 전 한 집사님과 교제 중에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업을 하고 싶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삶의 소망이 없는 청년에게 무언가 소망을 주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은 점점 절망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마치 표류하는 배처럼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진 세상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교회가 세상에 소망을 주는 공동체로 설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것입니다. 환대의 공동체입니다.
세상에 소망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환대함으로 기쁨을 주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환대함으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3.삶에 닥친 어려움의 원인은 '무엇 때문'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어려움입니다.
바울은 원주민을 도와 땔감에 쓸 나무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불에 던져 넣을 때였습니다. 나무묶음 사이에 있던 독사가 나와서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원문의 표현은 바울의 손에 매달린 것입니다. 팔을 문 상태로 매달려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매달려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본 원주민들은 놀랐고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사도행전 28:4
4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인식을 보여줍니다. 뱀에게 물린 것을 보니 신의 심판을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죽음의 바다에서 살아나긴 했지만, 결국 뱀에게 물려 죽게 됨으로 신의 심판이 실현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익숙한 인과응보입니다. 또는 불교 용어인 업보라는 개념도 있습니다.
그릇된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이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삶에 닥친 어려움을 이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내가 겪는 고난과 어려움은 잘못한 행위에 대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보면서 그가 겪는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요한복음 9:2
2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후천적인 맹인이라면 자신의 죄 때이라고 하겠지만, 선천적인 맹인이라는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 라는 물음입니다. 부모인가 아니면 당사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은근히 이러한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무언가 잘되면 내가 하나님께 충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내가 무언가 죄를 지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도들이 어려움 가운데서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돌이켜 보고 겸손의 기회로 삼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어려움이 죄에 대한 징벌은 아닙니다.
이러한 인과응보의 법칙으로는 우리가 당하는 삶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어떻게 허물 많고 연약한 저를 목사로 세워주시고 주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 베푸신 은혜를 보면 하나님은 인과응보를 초월하십니다.
구약의 욥기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바로 하나님은 인과응보를 초월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의인이었고 그 신앙이 신실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한 고난은 처철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신실한 믿음의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이러한 인과응보의 갇혀 삶을 해석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9:3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무엇 때문이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죄 때문이 아니라, 미래에 하나님이 하실 일을 위하여 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을 무엇을 위하여 뱀에 물리게 된 것일까요?
그 이후에 전개되는 내용이 그 해답을 줍니다. 원주민들은 바울이 살인자이기 때문에 결국 뱀에 물려 죽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조금도 상함이 없이 온전했습니다. 그러자 이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사도행전 28:6
6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당연히 독사에게 물려 죽어야 하는데 여전히 살아있는 것은 그가 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바다에서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독사에게 물려도 살아난 것은 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후에 섬의 최고통치자 보블리오를 만나게 됩니다. 3일 동안의 파티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을 비롯한 그의 동역자 누가와 아리스다고도 함께 갔을 것입니다. 비록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보블리오에게도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독사에 물려도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먼저 바울을 신뢰하게 되었고 그러기에 그가 전하는 복음도 신뢰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다 내 잘못과 실수 때문만은 아닙니다. 또 과거에 저질렀던 죄에 대한 징벌도 아닙니다. 우리가 고난의 원인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과율에 갇혀 자신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실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바울을 호송한 백부장 뿐만 아니라 배에 탄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풍랑 속에서 보여준 바울의 모습때문일 것입니다. 풍랑의 위기는 그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삶에 찾아온 어려움들은 무엇 때문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에 걸려 누워있는 것을 알게 되고 안수하여 병을 치유합니다. 이것으로 인해 보블리오가 얼마나 감사 했겠습니까? 그는 복음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능력 또한 체험한 것입니다.
이 소식은 섬 전체에 삽시간에 퍼지게 되었고 많은 병자들이 바울에게 오게 됩니다. 그들에게도 치유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성경은 멜레데 섬에서의 3개월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사도행전 28:10
10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비록 죄수의 신분으로 멜리데 섬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최고의 대접을 받았고, 모든 필요를 공급받았으며 로마까지 가는 여정에 소요되는 모든 물질을 공급받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까지 가는 길에 동행하셨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결코 외롭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주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들로 날마다 감사와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항해도 이와 같은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 주님을 더욱 믿고 신뢰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