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03-17 16:02

6.마지막 제비뽑기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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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zR3rDWIiXF4 

 

사도행전 강해 6. 마지막 제비뽑기

 

사도행전 1:15–26
15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사도행전 강해 6번째 시간입니다.
120명의 성도들이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기도이후에 그들이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12번째 사도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전에 한번 언급 드린 바와 같이, 12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중요합니다. 구약에 12지파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것처럼, 신약에도 12사도는 신약성도 전체를 대표합니다.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교회가 시작하면서 12라는 숫자를 맞추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12명의 사도를 세웠는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11명도 아니고 13명도 아닌 12명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 있음을 잘 알았던 것이죠. 120명도 우연한 숫자가 아닌 것이죠. 

 

기도가 끝나자 일어선 것은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지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제자로서 그것도 수제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이미 이때부터 지도자로서의 위치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중 한 사람이었던 가롯유다가 결국 예수를 팔고 자살하여 죽은 사건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시편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이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이후에 구약성경을 다시금 정독했을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한 메시아인가 그러면서 그동안 깨닫지 못한 수많은 진리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가롯유다가 예수를 판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자살하여 끔찍하게 죽게 된 것 까지도 이미 예언되었음을 발견합니다.

베드로는 시편109편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다윗이 쓴 악인을 향한 저주시입니다. 이 시가 예언이 되어 가롯유다에게 임한 것입니다. 8절에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12번째 사도를 세워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그 사도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있어야 됨을 말합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의 공생에 기간 동안에 항상 함께 있어던 제자여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뿐만 아니라 부활을 목격한 자여야 했습니다. 이것이 사도의 자격이었습니다. 

 

120명의 성도는 11명의 사도를 중심으로 어떤 사람이 사도의 자격인 있는지를 검증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두 명의 후보자를 지명합니다. 첫 번째는 요셉입니다. 그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입니다. 바사바라는 뜻은 안식의 아들입니다. 안식일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유스도는 영어로 Justus입니다. 많이 들어보지 않았습니다. Justice 의롭다는 의미죠. 요셉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 것은 아마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에 반해 맛디아는 별다른 소개가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을 놓고 과연 누가 합당한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결정하겠습니까? 만일 민주주의라면 투표를 통해 결정할 것입니다. 공산주의라면 지도자가 결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120명의 성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결정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왜 그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12번째 사도를 결정했을까?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자 하는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왜 그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사도를 선발하였고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12명의 사도는 주님께서 선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입니다. 제자들과는 다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사도들은 그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입니다. 따라서 12번째 사도는 예수님께서 선택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승천하시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그 뜻을 물어야 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물을 때 가장 적합한 방식이 무엇일까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제비뽑기였던 것입니다.
제비뽑기는 구약 때부터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사용했던 방식이었습니다.  
이 방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기 28장입니다. 대제사장은 에봇이라는 옷을 입고 가슴에 흉패를 가슴에 붙입니다. 흉패에는 판결주머니가 있고 그 안에 우림과 둠밈을 넣습니다. 모양이나 재질이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대체로 매끄러운 돌로 추정합니다. 국가에 중대사를 결정할 때 이 돌을 꺼내어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우연한 일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일의 결정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달려있다는 신앙에서 출발한 제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잠언 16:33
33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제비뽑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정복하고 땅을 분배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제비뽑기를 통해 나타난 결과는 결국 하나님의 응답으로 여겨져 모든 관련자들의 순종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잠언 18:18 (NKRV)
18제비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하게 하느니라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희교회가 소속된 대한예수교 장로회는 총회장 선거에서 제비뽑기방식을 선택한 적이 있었습니다. 2001년부터 2018년까지 제비뽑기 방식으로 총회장을 선발한 것은 다름 아닌 금권선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선거를 전후해서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방식은 이렇습니다. 먼저 자격을 심사하여 후보자를 몇 명으로 압축해 놓고 마지막에 제비를 뽑다 결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2018년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만일 금권선거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 다시 이 방식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비뽑기는 그 결과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맡긴다는 믿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제비뽑기의 결과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생각과 의도를 배제하기 위한 방식이었던 것이고 그 결과를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온전히 순복할 수 있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사사기 20장에 보면 군사들을 선발할때도 제비를 뽑았습니다. 사무엘상 10장에 보면 왕을 선발할 때도 그랬습니다. 성전에서 노래하는 자, 문지기 등 성도의 봉자자를 선택하거나 성전의 직무를 할당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대상24:5, 25:8)

 

이러한 긍정적인 결정을 할 때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결정을 할 때도 이 방식이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간의 범죄 사건을 밝혀낼 때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 실패하지 그 원인이 누군가가 전리품을 도둑질한 것에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제비를 뽑게 되었고 그 결과 유다지파의 아간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요나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로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랐고 하나님께서는 큰 바람을 일으켜 배를 흔드셨습니다. 배에 탄자들이 과연 누구 때문에 이러한 일이 생겼는가 할 때, 그들이 선택한 방식 또한 제비뽑기였고 그 결과 요나가 뽑혔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사도를 선발함에 있어 제비를 뽑는 장면을 읽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제비뽑기는 사람의 생각과 의도를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세우기 위하여 선택된 방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은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해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제비를 뽑아야 할까요?
우리 자녀가 대학을 선택함에 있어 어느 학교를 가야 할지 제비를 뽑아야 할까요?
여러분들이 이사를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또는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 제비를 뽑아야 할까요?
청년들이 이 사람이 결혼상대자로 합당한지 아닌지 제비를 뽑아야 할까요?

놀라운 것은 성경에서 제비를 뽑는 장면이 이곳에 마지막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제비를 뽑지 않았습니다.
왜 일까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무엇 때문에 사도들은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더 이상 제비를 뽑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이 사건이 이후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 이후에 성도들은 더 이상 제비를 뽑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그의 성도들에게 확실하게 밝혀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뜻을 보여주시는가?
우리 이성의 생각과 판단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뜻은 신비적인 방법으로 깨닫는다는 생각입니다. 꿈이나 환상 또는 신령한 분의 예언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생각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갈 결정을 합니다. 이러한 결정을 할 때 꿈이나 환성을 보지 않았습니다. 또는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제비를 뽑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결정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자기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수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결정을 한 것은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그의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에베소 성도들이 모여 바울을 붙잡고 말리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0:23–24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성령께서는 바울에게 네가 가는 각 성마다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으로 가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정은 바울 스스로 한 것입니다. 그곳에 복음이 필요하다고 결정한 것은 바울의 이성적 생각이었고 합리적 판단이었습니다. 

 

21장에 가면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와서 성령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네가 그 곳에 가면 결박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그 말을 듣고 선교일행이 바울을 말립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1:13 
13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성령님은 그곳에 환난과 핍박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가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 결정은 바울이 스스로 해야 했던 것입니다. 선교일행은 그렇다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라고 결정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럴지라도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취해야할 하나님의 뜻을 묻고 순종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큰 틀에서 그분의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떻게 알려주셨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성경은 큰 틀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마치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그 곳으로 가면 환란과 핍박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 틀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삶의 길을 결정합니다. 바울이 그럴지라도 예루살렘으로 간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뜻을 알려주고 무조건 따라야 하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으셔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결정하는 인격적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선악과를 만드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선악과를 바라보며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격적 존재로 창조하셨기에 우리의 결정을 존중하십니다. 그러기에 선악과를 먹기로 결정한 아담의 결정을 막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기쁨과 감사함 가운데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강제하거나 강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설득하시고 또 설득하셔서 스스로 굴복될 때까지 설득하십니다.
그 설득이 마침내 십자가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며 너희를 구원하기를 기뻐한다는 것을 십자가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로마서 5:8 (NIV)
8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위하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에 굴복되어 손들고 주앞에 나온 것 아닙니까?

 

사도행전는 성령행전이라고 할 만큼 성령님의 실제적인 인도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때의 모습처럼 성령님의 음성에만 기울이고 있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당시는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와 인도하심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뜻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성령님께서 기록하신 성경으로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 안에서 순종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꿈이나 환상이나 신령한 분의 예언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 뜻 안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때와 같은 성령님의 직접적인 간섭과 인도하심은 더 이상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성령님께서는 꿈과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는 비상시에 주시는 은혜입니다. 긴급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야 할 때 이러한 방식으로 역사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상은혜를 계속해서 의존하는 것은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상은혜도 말씀 안에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이지, 평소에 전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지내다가 어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비상은혜를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러 가다가 길을 돌려 서쪽 마게도냐 지방으로 게 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6:6–10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먼저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게 하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했는가? 7절에 보니까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어디로 가야할지를 스스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7절 후반부에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비두니아로 가는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의 노력을 애썼다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무언가 일이 잘 안풀렸던 것입니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비두니아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애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아닐 때 성령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밤에 환상가운데 마게도냐 사람이 서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장면을 봅니다.
그때서야 바울은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구나 라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하나님께서 막으십니다. 처음에는 환경으로 막으시다가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환상으로 통해서라도 막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막으실 때까지는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전에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처음 듣는 것처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가정이 입양을 결정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일입니다.
저는 당연히 성경을 통해 입양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결정함에 있어 아내는 확실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주동안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한주가 흐르고 아침식사를 하면서 여느때처럼 아내에에 물었습니다.
잘 잤어? 좋은 꿈 꿨어?
순간 아내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황홀한 얼굴로 저에게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확신이 없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꿈에 아이를 보여주세요. 라고.
그런데 지난밤에 가운을 입은 목사님이 아기를 안고 자신에게 오는데 뒤로는 수많은 성도들의 무리들이 서있더랍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안겨주더랍니다.
저희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곧장 입양 사무실로 달려갔고 얼마후 희수를 가슴에 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성경을 통해 압니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기를 소원합니다. 그러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때때로 신비한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제비를 뽑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성경이 우리 손에 들려 있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에게 오늘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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