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02-11 13:55

1.기독교의 행함과 가르침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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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실황 전체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LGknmrEw3Vo

(화면이 선명하지 못한점 양해바랍니다) 

 

​사도행전 강해 1. 기독교의 행함과 가르침

 

사도행전 1;1-3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오늘부터 사도행전을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을 선택한 이유는 건강한 교회를 세워 감에 있어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설립과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세운 첫음 교회가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살펴봄으로 우리가 회복해야할 교회의 본질을 깨닫길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복음전파의 열정과 그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회복해야할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를 깨닫기 원하는 것입니다.

먼저 1절을 보면 이 글의 수신자에 대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데오빌로입니다.


저자는 누구일까요? 누가입니다.
“내가 먼저 쓴 글에는”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두 권의 책을 헌정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누가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1절-4절입니다.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데오빌로는 누가인가? 각하라는 표현을 통해 당시 로마 정부의 고위직에 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데오빌로라는 뜻은 ‘데오’ 신 또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죠.(판테온이라는 아파트는 신들의 집이라는 의미) ‘필로’는 사랑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데오빌로가 어떤 특정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들, 즉 일반 성도들을 행해 쓴 책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각하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특정인을 의미합니다.

 

그가 기독교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가에게 재정적 지원을 하고 누가는 연구하여 책을 쓰게 된 것입니다. 3절에 보면,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누가는 의사입니다. 의사들의 특징이 치밀하고 세밀하지 않습니까? 그는 기독교의 근원부터 자세히 살핀 것입니다.
그는 많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있으면서 체험한 것들과 나중에는 사도로 복음이 증거되는 일들 속에서 체험한 것들을 글로 남겼습니다.


지난 해 전교인 여름 수련회 때 저녁에 바울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 보시면 누가가 바울을 계속 찾아와 인터뷰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실제로 누가는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곳에 함께 하였고 그가 감옥에 갇힌 후에는 찾아가 만나면서 자신의 글에 담아야 할 내용들을 정리했던 것입니다.

먼저는 누가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까지를 담은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통해서 예수님의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을 통해 복음이 증거되는 과정을 담은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누가복음에서는 데오빌로를 향하여 각하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도행전에는 쓰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데오빌로가 누가복음을 읽고 기독교로 완전히 개종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기독교의 평등사상에 영향을 받아 이제는 각하가 아니라 형제가 된 것입니다.

 

누가가 복음서를 쓰면서 주목한 것이 무엇인가?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누가복음이죠.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가르치심이 먼저가 아니라 행하심이 먼저입니다. 행하심과 가르치심입니다. 기독교는 행함을 통해 믿음을 증명합니다. 행함이 가르침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모든 것은 행함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만일 행함이 없이 가르치셨다면 그 가르침은 공허한 울림으로 끝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시기 전에 먼저 행하셨고 또 가르치신 것은 온전히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은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던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침을 뱉고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시기만 하셨다면 2천년 동안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탁월한 강사들의 영상을 보면 감동을 주기도 하고 웃음을 주기도 합니다. 또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깨달음도 얻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이 우리 삶을 바꾸지 못하는 것은 행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이 가르친 대로 행동하는가?

 

고1때 만난 국어선생님은 시인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인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고상한 인격과 성품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학기 그분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결론내린 것은 그분이 쓰신 시와 보여주신 행동이 전혀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와 삶의 부조화였습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뉴질랜드에서 배웠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웠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선교사님이나 목사님도 있지만 일반 성도님들도 있었습니다. 삶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특별한 제자훈련 프로그램이나 성경공부 모임도 없이 그저 주일에 한번 예배드릴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의 삶은 신실했습니다.

제가 경험했던 교회는 많은 가르침들이 있었습니다. 제자훈련 1,2,3,4,단계, 기도훈련, 묵상훈련 등 많은 가르침에도 정작 삶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이것입니다.
신앙이란 가르침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신실한 사람들과의 인격적 만남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두제자를 부르실 때 무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만남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 만남 속에서 3년 동안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배운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삶이 자신의 가르침과 조화되지 못했다면 그들은 벌써 떠났을 것입니다.

 

전에 한번 아내와 크게 싸운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내가 했던 말이 이것입니다.
“나 이제 당신 설교 안 들어”  

우리의 행함이 신실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가르침을 하여도 소용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가 삶을 통해 가르친 것만 남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기억할 때 가르친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기억합니다. 가장 힘든 순간에 부모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했던 행동을 기억합니다. 아! 우리 부모님은 그때 기도하셨어. 그리고 기도하는 것이죠.

 

누가가 주목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가?
우리는 행하기 위해서 가르침을 받습니다. 배움의 목적은 행하는 것입니다. 영어를 배우는 목적은 영어를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어로 된 글도 읽고 말도 하기 위해서입니다. 수영을 배우는 목적은 수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지루한 배움의 과정을 통해 실제로 그 일을 하게 될 때 의미가 있는 것처럼, 기독교의 가르침의 목적은 행하는 것입니다. 지적 깨달음이나 감동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2: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헬라어로 행함이라는 단어는 ‘페리파테오’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보니까 “걷다”라는 의미가 “행하다”는 의미보다 조금 더 강합니다.


그러면서 떠오른 말씀이 있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5장에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라고 말합니다. 에녹이 누구입니까?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간 사람입니다. 
노아는 창세기 6:9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동행은 “함께 걷다”(walk with)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으로 행하는 것은 결국 함께 걷는 것인데 누구와 함께 걷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함께 걷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것입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호흡을 맞추어 걸어가는 것 이것이 결국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그들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행함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와 같이 자기 유익을 따라 살지 않는데 그렇게 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번에 엄집사님 가족이 장례를 치우었는데요. 영정사진 곁에 꽃 장식을 소박하게 하셨더라고요. 모든 절차를 소박하고 간소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 속에서 행동하는 것들이 곧 우리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부조화를 일으킬 때 위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에의 모습과 가정과 직장에서의 모습이 다를 때 위선입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지난 1월1일부터 11일 까지 전국 19세 이상 성인남녀 1000면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엊그제 발표하였습니다. 한국교회 전반에 대한 신뢰조사에서 신뢰한다고 답한 사람은 31.8%였고 신뢰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63.9%였습니다. 30대와 40대에서는 신뢰하지 않는다는 답변이 74%였습니다. 한국사회는 전반적으로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복음전도가 어렵게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행함을 보고 복음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과 동일한 것을 추구하고 삶의 방식이 동일하니 기대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실망에는 기독교에 대한 기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기독교인들은 우리와 달아야 하지 않느냐는 기대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서 말하는 온 백성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을 말합니다.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의 삶에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행함이 결국 복음에 힘을 실어준 것입니다. 그 결과 구원 받은 사람이 날마다 더해갔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말로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믿지 않는 가족들이 여러분의 말이 아니라 삶을 주목하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복음은 반드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작던 크던 변화가 있습니다. 그 변화는 급진적이기도 하고 점진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변화가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복음이 문제가 있든가 아니면 내가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예배와 배움이 일상적 삶의 신실함과 거룩함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맙니다.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고전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두 번째로 누가는 예수의 가르침에 주목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셨을까? 그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3절에 후반절에 보면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번째 외치셨던 말씀이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우리가 잘 아는 산상수훈도 천국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팔복도 천국에 대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 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주기도문도 천국에 대한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마태복음 13장 전체는 천국에 대한 비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가르치신 것도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사도들은 어떠했을까요?
<행 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가르친 것도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행 19: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사도행전은 이렇게 마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8:30-31>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이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의 핵심이 바로 천국 즉 하나님 나라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설교시간에 몇 번 언급된 것 같은데요, 이것은 장소적 의미나 천국의 화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받을 때 하나님 나라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왕으로서 좌정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통치 속에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 가운데 찬양과 경배를 받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첫 창조 때의 모습은 온전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온전한 행복과 기쁨이 충만했던 그곳이 인간의 타락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썩고 더러워진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렇게 좌절된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마지막장이 창조 때의 아름다움이 회복되는 것으로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의 역사를 과연 누가 이루시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악의 문제와 인간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이 땅에서부터 우리가 영접하고 살아갈 때 천국의 삶이 시작됩니다. 비록 이 땅을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거류민과 나그네처럼 살아갑니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어수선 합니다. 이미 중국의 사망자수는 720명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미국은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수가 1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세계 곳곳이 바이러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호주는 작년9월부터 시작된 산불로 인해 서울의 100배 이상의 면적이 불타버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올겨울 대부분의 기온이 영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소망 없는 세상에 소망을 두기 시작하면 삶의 고단해집니다. 마치 이곳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면 안됩니다. 그러면 욕심과 이기심이 우리 삶을 지배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서 이 땅에 잠시 왔다 갑니다.


제가 좋아하는 천상병시인의 귀천이란 시입니다.
<귀천>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믿음의 사람이었던 천상병시인은 이 땅에서의 삶을 소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소풍처럼 사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기에 이 땅에서의 삶을 소풍하듯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예배해 두신 영원한 집이 있어 죄많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영접해 주시겠네”


영어가사의 후렴은 이렇습니다.
Come home, come home,
집으로 돌아와요, 집으로 돌아 오셔요

Ye who are weary, come home;
지쳐있는 그대들 집으로 돌아 오셔요

Earnestly, tenderly, Jesus is calling,
열심히 부드럽게 예수님이 부르셔요.

Calling, O sinner, come home!
오, 죄지은 자들이여, 집으로 돌아오라 부르셔요.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고향이며 우리의 집입니다.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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