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08-31 11:54

76. 내가 선택한 주님의 길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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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76. 내가 선택한 주님의 길

 

사도행전 21:1–16

1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15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한 바울은 이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본문에는 그 여정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우리가”라고 시작되죠.  

“우리가”는 누구를 포함하고 있다고 했죠. 저자 누가입니다. 

비교적 치밀하게 기록하고 있는데요, 

지도를 보면서 확인하겠습니다. 

 

#지도/ 바울의 3차 선교

고스 -> 로고 -> 바다라 -> 베니게로 배를 갈아타고요. 

구브로를 향하여 가다가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 도착, 여기서 짐을 풉니다. 

여기서 칠일을 머물며 제자들을 만납니다. 주일을 함께 보내기 위해 7일을 머물렀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있었던 중요한 사건을 소개하죠. 그것은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 행을 만류한 것일까요? 가면 붙잡히게 되고 고문당하고 투옥되고 결국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로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눈물의 작별을 하고 떠납니다. 

 

두로를 떠날 때의 모습도 참 감동적입니다. 

사도행전 21:5–6 

5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바울이 교제했던 사람들은 제자들과 그의 가족들이었습니다. 밀레도에서는 에베소의 장로들과 눈물의 작별인사를 나눴다면 두로 에서는 제자들과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까지도 전송하러 나온 것입니다. 이들은 이 순간이 바울과의 마지막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함께 교제했던 가족들, 마치 전쟁터로 떠나는 아버지를 마중하듯 그들은 눈물의 작별을 합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아니 기도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바닷가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이 장면을 머리에 그려보면 참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아이들까지도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바울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요? 결박과 환난이 있음을 알았기에, 그것을 막아달라기 보다는 담대하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 기도가 바울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함께 무릎을 꿇은 제자들과 그의 가족들은 참된 사명자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21:6 

6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사명의 길을 향해 떠나는 바울과 선교일행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두로의 제자들.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와 사명이 달랐습니다. 어떤 이들은 선교의 사명으로 어떤 이들은 집과 일터에서의 사명으로, 각자가 주어진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사람이 있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배를 타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배를 타고 가야합니다. 

여러분, 어떤 자녀는 집을 떠나 사명의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가야 할 사명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은 집과 일터에서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배를 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바울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아니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의 집을 소망하며 결국 그곳으로 갑니다. 바울은 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억지로가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선택한 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울이 가야 할 사명의 길이 핍박과 고난의 길임을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두로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를 알았고 바울의 길을 만류했습니다. 

이제 두 번째 그의 길을 만류하는 사건이 소개됩니다. 

장소는 가이사랴입니다. 이곳에서 빌립을 만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21:8

8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이라고 소개하는데, 원문에는 집사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냥 일곱입니다. 이 부분은 이미 말씀드린바가 있죠. 초대교회 일곱 집사를 뽑은 것이 아니라 그냥 일곱의 일꾼을 선발한 것입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빌립입니다. 8장에 보면 그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기록되었습니다. 이후 사라졌다가 오늘 본문에 등장한 것입니다. 그는 가이사랴에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았던 것입니다.  

 

처음 빌립이 전도의 사명을 감당할 당시,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바울의 소문만 들었을 뿐이지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만큼 교회를 박해하고 핍박했는지 빌립은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과 함께 일꾼으로 섬겼던 동료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그 자리에 바울이 있었던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후 그가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복음 전도자가 되었던 것도 들었을 것입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바울을 이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의 집에 머물 때의 일입니다. 한 선지자가 바울을 찾아옵니다. 유대로부터 온 아가보입니다. 아가보는 당시 잘 알려진 선지자입니다. 사도행전 11장28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바울을 찾아 온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닥칠 일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인 퍼포먼스를 통해 예언합니다. 

 

사도행전 21:11 

11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두로의 사람들에 이어 두 번째로 확실한 예언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동안은 음성으로 들었다면 이번에는 영상으로 본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바울이 붙잡혀 수족이 결박당하고 이방이의 손에 넘겨진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손에 넘겨진다는 것은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사형집행권은 로마정부에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빌라도를 비롯한 이방인들의 손에 의해 로마의 사형제도인 십자가형으로 죽지 않았습니까? 바울도 결국 그러한 방식으로 죽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추측컨대 선지자 아가보는 바울에게 일어날 일들을 환상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이에 바울이 예루살렘에 오기 전에 빨이 알려 주어야겠다고 판단하고 빠름 걸음으로 왔던 것입니다. 

 

바울은 두 번째로 예언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그래, 성령님께서 이렇게 두 번씩이나 말씀하셨으니 가지 말라는 뜻이구나!” 이렇게 이해되지 않습니까? 두로의 제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듣지 않으니, 이번에는 아가보를 통해 말씀하셨구나. 그러면 가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바울의 동료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1:12 

12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누가를 비롯한 동료들과 빌립을 비롯한 가이사랴의 성도들도 바울을 만류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빌립의 네 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도 예언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보십시오. 네 딸까지 포함하면 세 번의 예언입니다. 세 번은 완전수거든요. 이 이상 확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사도행전 21:13 

13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자신에게 닥칠 일들을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20:22–24

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예루살렘에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가 언제부터 이것을 알았을까요?

우리는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로 갈 때 혼자 걸어 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13 

13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바울이 무엇 때문에 혼자 그 길을 걸어가고자 했을까요? 그는 드로아까지 오는 동안 각 성에서 성령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 아가보가 예언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예루살렘에서의 결박과 환난을 보여주셨다면 그것은 가지 말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알고도 가라는 뜻일까요?

 

바울은 이 부분을 결정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홀로 앗소까지 걸어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묻고 결정할 때 이 부분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에게 장래일을 알려 주실 때가 있습니다. 꿈이나 환상이나 어떤 직관력을 통해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또는 살아온 경험과 지혜를 통해 너무나 확실하게 예측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결정은 나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니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기로 결정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을 만류한 사람들은 잘못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분명 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계선교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 일을 진행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성취되거든요. 성경에 나와 있는 예언가운데 단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뜻을 보여주고, 억지로 그 자리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또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강제로 막지 않으십니다. 간혹 어떤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덜미를 붙잡고 목사의 자리에 세우셨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세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십니다. 인격적으로 대우한다는 것은 우리의 판단과 결정을 존중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십니다. 그것이 사랑이거든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판단하고 선택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선악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수도 있고 사단의 뜻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판단과 선택이 인간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탁월성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단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아버지는 유산을 챙겨 집을 떠난 탕자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유산을 다 탕진하고 허랑방탕하게 살아도 종들을 시켜 그를 붙잡아 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스스로 설득되기 전까지는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아들을 포기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아들이 집을 나간 날부터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동네어귀에 서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판단과 선택을 존중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할지라도 그 길을 존중하십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심판받지 않기 위해서입니까? 지옥가지 않기 위해서입니까? 아니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설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강제하거나 강압하지 않고 설득하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너희를 사랑하는데 이 사랑을 너희가 받겠느냐? 하신 그 사랑에 설득되어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기쁨으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길이 비록 환란과 핍박일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갑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판단과 자발적 선택입니다. 

 

자, 이제 바울에게도 돌아와 봅시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결박과 핍박에 대한 예언을 듣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만류하며 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습니까? 

사도행전 20:23–24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오늘 본문에는 뭐라고 말합니까?

 

사도행전 21:13 

13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이 길을 억지로 갔을까요?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심판받을 것이라고 두려움으로 갔을까요? 하나님의 뜻이니 무조건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길이 가장 영광스럽고 가치있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앗소까지 홀로 걸어가며 이러한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서원기도로 태어났습니다. 시집살이에 시달린 어머니는 두 딸을 낳으시고 더 힘들어 지셨습니다.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기도하고 제가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전도사님 손을 붙잡고 독립문 앞에서 예수 믿으세요 라고 외쳤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늦은 나이 아버지께서 신학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교회를 개척하시면서 막연했던 목회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번도 목사의 길을 가지 말아야 겠다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목사가 되지 말아야지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께서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 꼭 목사가 아니어도 되지 않는가? 하시며, 마음이 흔들리셨습니다. 

결국 저는 일반대학진학을 지원하였고 결국 낙방했습니다. 

 

그때 친구들과 신촌에서 거의 매일 술을 마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술에 취해 연세대 앞에서 화곡동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친구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 신학대 가야겠다.”

“진짜? 너 국문과 가서 선생님 되겠다며?”

아니 목사 될 꺼야? 그러면서 그때 이런 말을 했어요. 

“목사가 어려운 것 모르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게 살아도 괜찮아”

 

신대원의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목사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 규모 있는 교회의 목사님들을 생각합니다. 자신들도 졸업하고 목사가 되면 그러한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목사하면 작은 전셋집, 습한 지하교회, 10명 남짓한 성도들, 자녀들 학비에 한숨 쉬는 모습, 이런 것이 목사였거든요. 그래서 제가 “목사될 거야”라고 한 것은 알지만 그 길을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평탄한 길로 가고 있지만 말입니다. 

저는 목사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영광된 길이라고 믿습니다. 제 인생을 가장 가치 있게 의미있게 사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로는 우리 앞에 놓여진 길이 어렵고 힘든 길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지 말라는 뜻이기 보다 각오하고 준비하라는 뜻일 때가 많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결혼하는 것 보다 편하고 쉬운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혼을 선택했습니다.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이 자녀를 낳는 것 보다 편하고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를 낳았습니다. 

자녀를 한명 낳아 키우는 것이 두명 세명 낳아 키우는 것보다 편하고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세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쉽고 편한 길 보다는 의미있고 가치있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은 여전히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떠셨나요? 내가 선택한 길을 후회하십니까? 

 

이것만큼은 빼앗기도 싶지 않아 했던 것들을 자녀들을 위해 포기해야합니다. 내 자신을 점점 잃어가고 누군가의 남편, 아내, 아빠, 엄마로 살아야 합니다. 아내와 의성이의 생일이 같습니다. 얼마 전 생일파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의성이만 축하받았지 아내는 축하받지 못했습니다. 이제 생일까지도 의성이에게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저녁 아내는 지금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성도들은 나에게 이익이 되는 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또 손해가 된다고 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옳은 길을 선택하는 자들입니다. 이 길이 옳은 길이라면 비록 희생과 손해가 뒤따르지만 그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 이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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