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81. 담대함의 이유
사도행전 22:30–23:11
30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1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10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1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강해 81번째 시간입니다.
본문은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안토니아요새에서 심문받던 바울은 채찍질을 당하려 할 때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죠. 당시 로마시민권자들은 정식재판을 받기 전까지는 어떠한 처분도 받지 않았고, 또한 판결에 불만이 있는 경우 황제에게 상소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알게 된 이상 그의 신분을 보호해야할 책임이 생긴 것입니다.
천부장은 성전 앞에서 일어난 소요에 대해 정확히 무슨 일 때문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바울을 애굽의 테러리스트로 오해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이 안토니아 요새의 층대에서 유대인들에게 변증할 때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히브리말로 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천부장은 바울을 안토니아요새의 영내에서 보호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를 열어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고자 했습니다.
사도행전 22:30
30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산헤드린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기관입니다. 총70명으로 구성되었고요, 대제사장이 의장을 맡고 제사장, 서기관, 장로가 회원입니다. 대부분의 제사장은 사두개인들이었고요, 서기관들은 바리새인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에서는 주로 율법을 해석하고, 종교재판을 주관하고, 성전의 치안을 유지하는 등의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죄인들에게는 벌금형과 태형을 선고할 수 있었고요, 심지어 생사여탈권까지 가지기도 했습니다.
천부장이 이 회의를 소집할 수는 없었고요, 대제사장에게 공회를 열러 재판할 것을 부탁한 것으로 보입니다. 드디어 바울은 정식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물론 종교재판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당시 상황을 머리에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70명의 공회원들 앞에 바울이 섰습니다. 대제사장은 구별된 옷을 입고 가운데 있고 주변으로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둘러서 있습니다. 유대사회에 명망있는 대표들이 모인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불려나온 것만 해도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이제 재판이 시작됩니다. 먼저 바울의 변론입니다.
사도행전 23:1
1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바울의 진술가운데 전해지는 느낌이 어떠합니까? 당당하지 않습니까? 자신감이 넘칩니다. 그들의 기에 눌려 위축된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주목하여 바라보면서, 형제들아! 라고 호칭합니다. 사실 이 호칭은 부적절합니다. 존경하는 대제사장님 그리고 의회원 여러분, 이렇게 해야 맞습니다. 바울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깨닫고 난 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형제요 자매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대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형제인 것입니다.
그 말에 공회원들의 심기가 불편했을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이어서 말합니다.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이 말이 끝나자마자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 곁에 있는 사람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합니다.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가 느껴지십니까? 70명의 유대의 최고 권력자들과 바울의 한판 승부가 벌어진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의 입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 상당히 불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입을 치라고 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경외하고 섬기는 그 하나님을 그리스도 이단자가 섬겼다고 하니 용납하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미 바울은 신성모독자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습니다. 일단 프레임에 갇히게 되면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이 프레임으로 해석되어지거든요.
그들은 바울이 공회원들을 무시하고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입을 맞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입을 치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바울은 이렇게 대꾸합니다.
사도행전 23:3
3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바울이 대제사장을 향하여 한 말입니다.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 졌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을 향해 회칠한 담이라고 했지요. 회칠한 담은 위선자를 의미합니다. 속은 탐욕으로 인해 더럽고 썩었지만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는 사람을 일컬어 회칠한 담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아나니아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아나니아가 세 명 등장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아나니아, 그리고 바울의 눈을 뜨게 한 경건한 유대인 아나니아, 그리고 대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그는 주후47년에 임명되고 58년에 물러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가 거만하고 성미가 급한 성격의 인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에게 돈을 갈취하고 로마에 뇌물을 상납했던 탐욕적이고 부패한 종교인이었습니다. 그의 친로마적 성향으로 인해 나중에 유대인들이 봉기할 때 성전하수구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너를 치친다는 바울의 말이 성취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껏 한 번도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실 것이다. 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분노하여 얼굴이 붉어지고 손발이 떨렸을 것입니다. 공회원들도 충격을 받기는 마찬 가지었습니다. 그들은 분개하여 바울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3:4
4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하나님의 대제사장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이같이 도전하는가? 그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도전 아닌가? 라는 말입니다.
이때 바울이 의외의 대답을 합니다.
사도행전 23:5
5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의견을 다르게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바울이 대제사장을 못 알아 봤을까? 대제사장은 입는 옷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구별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됩니다. 존 스토트는 바울이 육체의 가시 안질이 있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또 이 회의는 정기회의가 아니라 비공식회의였기 때문에 정복을 입을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못 알아보지 않았겠는가. 라고 해석합니다. 다른 의견은 바울이 대제사장을 알고 있었지만 탐욕적이며 위선의 탈을 쓴 그를 대제사장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봅니다.
“아, 대제사장이셨습니까? 제가 몰라 뵙습니다. 라는 조소가 담겨있다고 해석합니다.
저는 두 번째 의견을 지지합니다. 하나님의 세우신 대제사장답지 않다는 것에 대해 돌려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뭇 태도를 바꿉니다.
“기록되었으되 너희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바울은 출애굽기 22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위의 권세에 순종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음을 사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보면서 어떠십니까? 바울이 이 재판을 쥐락펴락 하고 있습니다.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까?
바울의 한마디 한마디 말에 공회원들은 쩔쩔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산헤드린공회를 흔들었던 바울은 이 말로 균열을 일으키고 마침내 분열시켜 버립니다.
사도행전 23:6–7
6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공회원들의 구성이 어떻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까? 대제사장, 제사장, 서기관, 장로라고 했죠. 제사장들은 대부분 사두개파이고, 서기관은 주로 바리새파였습니다. 사두개파는 상류층 귀족들과 유능한 엘리트로 구성된 작은 그룹으로 출발했습니다. 종교적인 일보다 정치적인 일을 좋아했고, 로마의 집권 세력과 긴밀하게 결탁해 있어서 대부분 부유했습니다. 이들은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였고, 예언서나 성문서를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영감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내세를 거부하고 오로지 현세를 중시했습니다. 이들은 사람이 죽을 때 육체와 함께 영혼이 소멸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사후 세계나 죽은 자의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오경에 이러한 구절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바리새파는 평신도 경건운동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제사장 그룹에서 지켰던 율법과 제의를 일반성도들도 철저히 지켜 성결하게 살자는 경건주의 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엄격하게 율법을 준주하고 회당을 조직해 율법교육을 힘썼습니다. 그러나 형식주의, 율법주의, 극단적인 분리주의, 그리고 권위주의적 특권 의식에 빠져 예수님으로부터 질타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구약성경 전체를 받아들였고 영혼의 존재, 사후세계, 부활 등을 믿었습니다.
이와 같이 두 개의 상반된 신학을 가진 분파가 산헤드린 공회에 공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먼저 자신이 바리새파의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죄수로서 재판받는 이유가 죽은 자의 부활 때문이라고 언급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 3:5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뿐만 아니라, 바울은 이방지역을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파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방의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성전에 이방인과 함께 들어갔다는 오해 때문에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은 바리새인들이 믿는 신학과 전혀 충돌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두개파에게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 문제가 대두되자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간에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치 우리의 국회나 청문회에서 야당과 여당이 격렬하게 싸우는 모습과 같았을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이 말 하나로 산헤드린 공회는 파행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3:8–10
8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10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바울의 말 한마디에 회의장은 격렬한 싸움터가 되었고, 천부장은 바울이 행여 다칠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영내로 데려오게 했습니다.
보십시오. 바울이 얼마나 안전하게 영내로 들어오는지 말입니다. 군인들의 호위를 받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하나도 상하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받았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바울의 담대함입니다. 그가 이렇게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대인의 최고 권력기관, 그리고 최고의 권위 앞에서도 주눅 들거나 위축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침작함과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바울은 절대주권자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바울은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신뢰하고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주권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세상의 권력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삶은 결국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시며, 나를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 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삼상2:6).
사무엘상 2:6 (NKRV)
6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예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2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
이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 있음을 믿기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간혹,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담담한 분들을 봅니다. 돌아가신 분이 부모일 때도 있고 남편 또는 아내일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식일 때도 있습니다. 그 절망 앞에서 마음이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기대와 소망으로 가득차 있는 분들을 봅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그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아 들여야지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니까요.”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절망적인 상태를 새롭게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노력이 실패했을 지라도 하나님은 창조의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기에 그 하나님을 소망하며 기대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선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지금은 당장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반드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듯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선하신 주권과 섭리를 믿을 때, 어떠한 절망과 고통의 순간에도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대제사장의 권위에 휘둘리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바울의 담대함의 이유는 성령님의 인도함 때문입니다.
바울을 보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지혜로웠습니다. 그의 말은 칼같이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웠습니다. 대제사장의 위선을 들추어낼 때는 날카롭다가도,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했다고 할 때는 부드러웠습니다. 부활의 문제를 제기하여 공회를 균열시키고 분열시킨 그 지혜는 탁월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마태복음 10:16–20
16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바울은 뱀 같이 지혜로웠고 비둘기 같이 순결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와 함께 하신 성령님께서 주신 지혜였던 것입니다.
뉴질랜드 세인트 헬리어스 교회의 청빙 제안을 받고 아내와 함께 면접준비를 했습니다.
두 분의 장로님께서 면접을 하셨는데, 전날 영어로 이런저런 문장을 외웠습니다.
한분의 장로님이 반대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무척 긴장되었습니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하나 걱정이 앞섰습니다.
목사님 실에 들어가니 목사님과 두 분의 장로님이 앉아계셨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목사님은 워낙 즉흥적인 분이시라 저희를 청빙할 예산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일을 벌이신 모양입니다. 그러니 장로님들이 반대할 것이 당연했습니다.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당신들은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자라지도 않았고, 영어도 유창하지 않은데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아내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잠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런데 이때까지 떠듬떠듬 하던 영어가 갑자기 술술 나오면서 제가 이런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로님,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대화는 말로만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은 말뿐만 아니라 영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말에는 부족하지만 아이들을 잘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영과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 말을 할 때 아내가 저를 보며 감동을 받는 눈치였습니다.
이후 저희는 세인트 헬리어스 교회에서 사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익명의 성도님께서 저희의 사례비를 충당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누군지 모릅니다. 또 바다가 보이는 방 세 칸의 2층 집도 마련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저희의 지혜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지혜롭게 말 하도록 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할 수 있는 것도 저의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공회에서 지혜롭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께서 해야 할 말을 주신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자녀들이 이와 같은 지혜를 받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실 때 내 능력이상의 지혜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날 밤, 심신이 지친 바울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23:11
11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이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을까요?
주님은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을 로마에까지 가게 할 것이고 그곳에서도 나를 증언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날, 산헤드린에서의 일들은 앞으로 있을 로마에서의 증언을 위한 리허설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공회 가운데 있었던 주님의 은혜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동일한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담대하라.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과 성령님의 인도 이 두 가지가 바울을 담대하게 한 것처럼. 우리도 이 신앙으로 절망과 고통의 순간 담대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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