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71. 하나님께서 길을 막으실 때
사도행전 20:1–12
1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3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4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5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6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7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바울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에베소의 큰 소요사건도 그를 흔들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과 로마 그리고 스페인으로 가고자 한 계획을 흔들림 없이 진행합니다.
먼저 지도를 보면서 3차 선교여정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바울의 3차 선교여행
지도를 보시면 왼쪽에 장화모양이 ‘이탈리아’입니다. 로마가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중간지역에 ‘아가야’가 보일 겁니다. 이곳은 현재 ‘그리스’입니다. 헬라라고 부릅니다. 아가야 위쪽으로 마게도냐가 보일 겁니다. 이곳에 데살로니가와 빌립보가 있지요. 그리고 에베소가 있는 지역이 ‘아시아’입니다. 가운데 해엽이 ‘에게해’입니다. ‘에게해’를 중심으로 아가야의 고린도, 마게도냐의 빌립보, 아시아의 에베소 이 세 지역이 선교에 있어서 거점입니다. 이 세 곳을 기억하시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1절에 마게도냐로 가지요. 그 다음 어디로 갑니까? 2절에 헬라입니다. 아가야지역이죠.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하면 누가 기억납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이곳에서 3개월 동안 사역을 진행합니다. 이때 로마서를 쓰게 되죠.
그 다음이 어디입니까? 3절에 보면, 배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하지요. 수리아가 어딥니까? 수리아 안디옥. 이방인 교회가 처음 시작된 곳입니다. 이곳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고린도에서 배타고 이곳으로 가고자 했는데 못갑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0:3
3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바울을 죽이고자 혈안이 된 유대인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수리아로 가는 배에 잠복해 있었을 것이고 이것을 알아챈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뱃길이 아니라 도보를 선택합니다.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합니다. 배를 타면 빠르고 쉽게 갈 수 있었지만, 도보로 이동함으로 먼 길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여정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계획한 길이 막혔을 때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길이 막혔다고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쪽 길을 막으실 때는 다른 길을 여십니다. 그 길로 갔던 것입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아시아의 에베소를 선교하려고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길이 막혔습니다. 정확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바울은 확실히 성령님께서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도행전 16:6–7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2차 선교 여행 때 안디옥을 출발한 바울은 다소에서 더베 루스드라를 거쳐 에베소가 있는 아시아지역에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무시아에서 비누니아로 가고자 할 때도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막으셨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학자들의 의견은 이때까지 바울이 선교의 내공이 쌓이지 않았다고 봅니다. 우상숭배가 강력했던 에베소를 선교하기 위해서는 연단과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게도냐지역을 먼저 가게 하시고 충분한 숙련된 후에 에베소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늘 하나님의 뜻은 우리보다 지혜롭고 선합니다. 바울이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뱃길이 막혔을 때도 당황하지 않고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있었음을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항상 열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언제라도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시는 길로 가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여시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최선이라는 것은 언제나 내 수준에서의 최선이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기대와 생각 이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1, 2차 선교를 통해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뱃길이 막혔을 때 당황하기 보다는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를 물었을 것입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이것입니다. 빨리 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돌아가더라도 천천히 가더라고 하나님을 뜻을 이루는 것이구나.
3절에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라고 말하고 있죠. 이때 그는 단지 돌아가는 길만 작정한 것이 아닙니다. 이 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20:4–5
4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5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여기 소개된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익숙한 이름은 디모데밖에는 없지요. 아리스다고는 누굽니까? 지난주에 등장했습니다. 에베소의 데메드리오가 소동을 일으킬 때 연행된 바울의 동역자지요.
사도행전 19:29
29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아리스다고는 골로새서에서도 등장하는데요,
골로새서 4:10
10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나와 함께 갇혔다고 하죠. 바울이 어디에 갇힌 것입니까? 로마 감옥입니다. 골로새서는 바울이 로마감옥에 있을 때 골로새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할 때까지 함께했던 동역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데살로니가의 유대인 출신인데 개종한 후에 바울 사역에 동역한 것입니다. 그가 로마감옥에 바울과 함께 투옥된 것으로 보아 바울의 3차 선교여행 내내 함께 한 것입니다.
두기고가 등장하는데 누구일까요?
바울이 로마감옥에 있을 때 쓴 편지가 골로새서도 있지만 에베소서도 썼습니다. 이 편지를 에베소교회와 골로새교회에 전달한 동역자가 바로 두기고입니다.
에베소서 6:21–22
21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22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아리스다고는 함께 갇혔지만 두리고는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를 에베소교회와 골로새교회에 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골로새서 4:7
7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다음으로 드로비모는 누구일까요?
드로비모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인 디오데후서에 나오는데요.
디모데후서 4:19–20
19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20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유언서신입니다. 순교 전에 마지막으로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쓴 편지거든요. 당시 디모데는 에베소교회를 목회하고 있었고요, 바울은 로마감옥에 2차 투옥된 상태였습니다. 당시 드로비모가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아, 선교여행도중 병든 것으로 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 지역에서 선발된 중요한 사역자들입니다. 바울은 이들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고자 한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드린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워지자 각 교회에서 모금한 헌금을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혼자서 이 일을 하기 보다는 각 지역을 대표하는 사역자들과 함께 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길을 돌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이들은 바울과 선교여정을 함께 하면서 각자가 하나님의 일에 다르게 쓰임 받고 있음을 봅니다. 어떤 이는 복음을 전하다 함께 투옥되고, 어떤 이는 바울의 편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의 목회지에서 목회를 합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부름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사역을 했지만 중요한 것은, 한마음과 한뜻으로 주의 일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역의 역동성이 다져진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정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뱃길을 막으신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 혼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 교회로 가는 것이 쉽고 빠르죠.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일을 혼자서 하는 것이 편하고 쉽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달랐던 것입니다. 함께 동역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동역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독불장군처럼 혼자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하는 것입니다.
동역은 서로의 연약함을 보완하거든요. 또 각자의 은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 줍니다. 1+1=2의 결과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결과를 맺게 하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함께 동역해야 합니다. 물론 어려움도 있습니다. 각자의 생각과 일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두세 사람 이상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족으로 묶으신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교회가 공동체로 모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각자의 부르심과 은사에 맞게 주의 일을 하면서, 그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나누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공동체시거든요. 성부, 성자, 성령님이 하나입니다. 그 안에서 누리는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담 홀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와를 창조하여 둘을 하나로 묶으신 것입니다.
교회는 공동체로 일할 때 파워풀 합니다. 여러분 부부도 한마음이 되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나갈 수 있거든요. 공동체가 주님 안에서 하나 될 때 강력해 집니다. 그래서 사단의 가장 대표적인 공격이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3
1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바울의 선교여행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여행을 해 보면 서로의 연약함이 많이 드러나거든요. 배낭여행하는 청년들 중에 처음에는 두세 명이 함께했다가 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함께 여행하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나게 되거든요. 성숙하지 않으면 싸우고 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바울은 이미 바나바와 동역할 때 2차 선교여행에 마가를 데리고 가야 하는 문제로 크게 싸우고 헤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동역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두세 사람이 아닙니다. 일곱입니다. 어려운 일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들과 동역하면서 혈육보다 더 끈끈한 친밀함을 느꼈고요. 사역의 기쁨을 누립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 여정을 통해 맺은 끈끈한 동역의 관계가 순교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바울이 순교한 이후에도 이들은 각 지역교회에서 바울처럼 말씀사역에 전념합니다. 그들은 흩어져 있었지만 주님 안에서 하나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한쪽 길을 막으실 때 다른 길을 여셨고 그 길을 통해 원하셨던 동역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길을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이때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돌아가게 하실 때가 있지요. 이때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 되지만 나중에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 그래서 그때 그 길을 막으셨구나.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길을 막으신 이유가 무엇일까? 다른 길로 가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도하며 발견해야 합니다.
2010년 저와 아내는 아버지의 병환으로 뉴질랜드 사역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내는 백석대 신학과에 복학했고요 저는 사역을 쉬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사역지를 알아보던 중 사랑의 교회에서 어린이교제와 찬양음반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부서가 있었는데 이곳을 지원하였습니다. 최종 두 명으로 압축되었고 마침내 합격이 되었습니다. 아내가 뉴질랜드 교회에 있을 때 키즈클럽을 기획하고 운영했었는데 그 때 참 행복해 했습니다. 한국으로 오게 될 때 그 사역을 놓고 오는 것이 많이 아쉬웠거든요. 그런 중에 사랑의 교회 전문사역자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이것으로 위로해 주시는가? 했습니다. 그리고 부서장님과 마지막 면담을 하러 갔습니다. 저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면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내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입니다. 들어보니 그해 그 부서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부서들을 정비하면서 그 부서를 정리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왜 자꾸만 아내의 사역의 길이 막히는 것일까? 당시에는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압니다. 만일 그 사역을 했다면 이렇게 교회를 개척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요, 여러분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희수와 의성이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형원이도 만나지 못했겠죠.
아내가 사역적으로 성공했을지는 모르지만, 가정이 주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길을 예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길이 막혔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음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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