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07-27 11:01

72. 기쁨을 나누고 위로하는 공동체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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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72. 기쁨을 나누고 위로하는 공동체.

 

사도행전 20:6–12

6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7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두 개의 장면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바울의 선교여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둘째는 드로아에서 있었던 집회에서 유두고를 살린 사건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기쁨을 나누고 위로하는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먼저 바울의 선교여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린 것처럼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합니다. 뱃길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바울을 죽이고자 혈안이 된 유대인들로 인해 마게도냐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 여정에 각 교회에서 선발된 사람들이 함께 동역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0:5 

5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그리고 바울은 닷새 후에 드로아에 도착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0:6 

6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그렇다면 여러분! 바울이 무엇 때문에 동역자들과 함께 드로아로 가지 않고 닷새를 지체했을 까요? 

이 부분이 참 흥미로운데요, 먼저 드로아가 처음 등장했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나십니까?

바울의 2차 선교여행입니다. 바울이 아시아지역, 특히 에베소에 복음을 전하려고 했다가 길이 막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사도행전 16:6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결국 드로아까지 가게 됩니다. 드로아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죠.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청하여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봅니다. 하여, 배를 타고 마게도냐 지방으로 건너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16장 6절을 다시 보시면,

성경저자는 바울과 선교일행을 ‘그들’이라고 표현하거든요. 그러다가 빌립보지역으로 들어갔을 때를 보십시오. 

 

사도행전 16:11–12 

11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그들에서 우리로 바뀝니다. “우리”라는 것은 누구를 포함한 것입니까? 사도행전의 저자를 포함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입니다. 누가가 마게도냐로 건너갈 때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바울이 마게도냐로 건너가는 배 안에서 누가를 만났고 이때 회심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마게도냐 지방 특히 빌립보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가 세워질 때 누가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까? 누가입니다. 

 

다시 20장으로 돌아오십시오. 

사도행전 20:5–6 

5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6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여기서도 ‘우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6절에 보면,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는 무교절에 빌립보에 누가 있었다는 것입니까? ‘우리’라고 하는 것을 보니까 바울이 누가와 함께 있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세워질 때 바울 곁에 누가가 있었지요. 누가에게 있어서는 첫 사역지인 셈입니다. 그러니 이곳은 누가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기쁨을 나누는  공동체

바울에게 있어서도 빌립보 교회는 특별했습니다. 특별히 애정을 가진 교회입니다. 바울이 사역할 때 다른 교회의 헌금은 받지 않는데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헌금만은 받거든요. 여러분들이 빌립보서를 보면 이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누가가 이들과 함께 무교절을 보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무교절은 유대인의 3대 절기중 하나로,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 다음 날부터 1주 동안 무교병을 먹으면서 지내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의 독립을 기념하는 기쁨의 축제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이기도 했습니다.  

구약에서 무교절을 지킨 모습을 보면 대부분 기쁨의 축제입니다. 

역대하 30:21 

21예루살렘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이 크게 즐거워하며 칠 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날마다 여호와를 칭송하며 큰 소리 나는 악기를 울려 여호와를 찬양하였으며

 

에스라 6:22 

22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러한 기쁨의 축제를 바울과 누가는 빌립보 성도들과 보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첫정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누가에게 있어서는 첫 번째 사역 지거든요. 그러니 이곳 성도들에게 애정이 각별했을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구요. 

 

바울의 선교 사역은 결코 평탄치 만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기도 하고, 붙잡혀 채찍에 맞기도 했습니다. 어두운 감옥에 갇히기도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 사역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성도들과의 사랑의 교제 때문입니다. 사역에 힘을 낼 수 있었던 것, 포기하지 않고 기쁨으로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도들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쓸 때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 1:8 

8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립보서 4 

1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여러분! 바울과 누가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지 않습니까? 사역을 위한 멈춤이 아니라 절기의 기쁨을 나누기 위한 멈춤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바울의 마음은 급합니다. 그는 오순절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도행전 20:16 

16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그러나 빌립보 성도들과 마음을 나누는 따듯한 교제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사역자와 성도의 관계가 이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역자에게 있어서 기쁨이요 면류관은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에게 목사는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목사에게 성도들은 기쁨의 순간을 함께 나누고픈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바울에게 모든 교회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 같은 경우는 바울을 근심 시켰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3차 선교 여행 때 에베소에서 쓴 편지입니다. 이런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21 

21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고린도전서 16:7 

7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 공동체를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께서 함께 하고 싶은 공동체입니까? 저는 아직까지 그렇다고 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러한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세상에서 상처 입은 자들이 우리 공동체에 왔을 때 치유되고 회복되는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만나고 싶은 사람들,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가 함께 기쁨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공동체는 모두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주인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아름답고 건강한 공동체로 세워 가셔야 합니다. 저는 말씀으로 섬기는 것이고 여러분들은 각자의 은사에 맞게 섬기셔야 합니다. 기쁜우리교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기쁨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고 헌신하시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위로를 나누는 공동체

다음으로 살펴볼 사건은 드로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과 누가는 배를 타고 닷새 만에 드로아에 도착합니다. 닷새가 걸렸다는 것은 역풍을 만난 것입니다. 드로아에서 7일을 머물며 말씀사역을 하게 됩니다. 이때 일어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7 

7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7절에 “그 주간의 첫날”이라는 것은 주일을 말합니다. 주일은 주님의 부활의 날입니다. 달력을 보면 주일부터 시작하지 않습니까? 간혹 월요일부터 시작하는 달력이 있는데, 잘못된 것이죠. 주일이 첫날이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주님의 부활한 날, 즉 주일에 모여 식사와 성찬을 함께 진행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떡을 때려 하여 모였다”는 것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드로아를 떠나기 전날 참으로 당황스러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떠나긴 전 밤이 새도록 말씀을 전합니다. 그날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8 

8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이 모인 것으로 보아, 이곳에도 이정도의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밤이라 등불을 많이 켰던 것입니다. 얼마나 사람이 많았으면 유두고라고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통풍이 잘 안 되는 다락방에 사람들이 가득 들이찼고 등불도 많이 켰으니 산소가 부족했을 것입니다. 또 말씀이 밤중까지 계속 이어진 것입니다. 바울이 글을 잘 썼지만 말에는 능하지 않았거든요. 더군다나, 이곳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낮에 일을 하는 노동자들입니다. 말씀에 대한 열망으로 모인 것입니다. 그중에 유두고도 있었던 것입니다. 

 

유두고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공기가 통하는 창으로 갑니다. 창틀에 걸터앉아 말씀을 듣던 중에 떨어진 것입니다. 높이가 삼층이었으니까 6미터 이상은 되었겠죠. 그가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기절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성경은 분명히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글을 기록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누가잖아요? 누가의 직업이 의사입니다. 그가 이곳에 있었거든요. 의사의 판단에 죽은 것입니다. 

 

이때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사도행전 20:10 

10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길로 유두고를 살리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날인 주일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간혹 어떤 설교자는 설교 때에 졸면 안 된다는 교훈으로 이 사건을 다루기도 합니다. 그런 메시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드로아의 성도들이 얼마만큼 말씀을 듣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렇게 피곤하고 졸린 가운데도 밤이 새도록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그 열정 말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떠나면 다시 말씀을 듣기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역자들은 귀했거든요. 지금처럼 말씀의 홍수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니 한 말씀이라도 더 듣고 기억하려고 한 것입니다. 

유두고라는 이름이 당시 신분적으로 낮은 사람들이 주로 사용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낮에 몸을 쓰는 노동을 했을 것이고, 심히 피곤한 중에 말씀을 듣고자 했던 것입니다. 

 

제가 2006년에 분당중앙교회에서 부목사 사역을 했습니다. 그때 집이 부천에 있었는데요. 사택으로 이사가기 전 2개월을 승용차로 출퇴근을 했습니다. 처음 부임하고 대심방이 시작되었는데요, 새벽6시부터 밤10시까지 심방을 했습니다. 매일 20가정씩 30분 단위로 심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녁에 집에 돌아올 때 너무 피곤했습니다. 때는 겨울이었는데, 창문을 열고, 따귀를 때리고 하면서 2개월을 운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졸음을 이기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없더라고요. 그때 출퇴근길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역을 위해 생명을 지키십니다.  

만일 유두고가 죽었다면 어땠을까요? 바울의 사역에 큰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바울 뿐만 아니라 그의 동역자들 그리고 드로아의 성도들도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계획한 선교사역이 진행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그를 살리심으로 계속해서 바울의 사역과 그의 말씀에 힘을 실어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자들을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실 일들이 마쳐지지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죽은 생명을 살린 사건이 등장합니다. 

먼저 베드로입니다. 사도행전 9장 보면 욥바에 사는 다비다라는 여제자를 소개하면서 그가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헌신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녀가 죽자 제자들은 베드로를 청하여 와달라고합니다. 베드로는 죽은 시체가 있는 다락방에 올라가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명하자 그녀가 일어납니다. 

 

이후 베드로의 사역을 보면 고넬료를 비롯하여 이방인들에게까지 강력하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사도들이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특별한 사건이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비상한 은혜입니다. 이러한 비상은혜를 통해 사도들의 권위를 세워주셨고 이것을 체험한 사도들은 담대하게 되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두고를 살린 사건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붙잡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호송됩니다. 바울은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어려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로마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 담대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그것은 죽은 나사로를 살린 그 주님의 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체험했으니 그 믿음은 확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두고가 살아난 사건은 드로아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바울의 동역자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었습니다. 복음이 결국 우리의 죽은 영혼뿐만 아니라 죽을 몸도 살릴 것임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도 주님의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후에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사도행전 20:22–24 

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부귀와 명예가 아니었습니다. 결박과 환난이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교의 길을 담대하게 갑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죽음을 능가하는 부활의 권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 이후에 드로아 성도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20:12 

12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성도들은 살아난 청년 때문에 위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또는 바울 때문에 위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바울을 통해 청년을 살린 주님 때문에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난 청년을 보면서 주님의 부활의 권능이 지금도 역사함을 체험한 것입니다. 

 

참된 위로는 사람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참된 위로는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위로할때는 주님의 위로를 전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성도들에게 “삼가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은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의 능력으로 고인을 살리실 것입니다”라고 할때 이 믿음의 말이 참된 위로가 됩니다. 

내가 죽음 앞에 서 있을 때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은 나를 둘러싼 가족들이 아닙니다. 이제 곧 주님께서 죽을 내 생명을 살리실 것이란 믿음과 확신입니다. 그 주님이 지금 내 손을 붙잡고 있다는 믿음이 참된 위로가 됩니다. 

 

 

교회공동체는 위로의 공동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 슬픔이 많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슬픔 가장 큰 절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죽음을 이깁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참된 위로가 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부활밖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부활을 믿고 부활을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서로를 위로하고 소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7–18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두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첫 번째는 빌립보 교회처럼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드로아 교회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위로의 공동체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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