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05-25 07:18

63.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선교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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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63.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선교

 

사도행전 17:1–15

1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10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4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5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우리는 계속해서 바울의 마게도냐 지역 선교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데살로니가 지역과 베뢰아 지역에서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데살로니가의 사람들과 베뢰아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의 복음전도 방식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시면, 바울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역의 중심도시입니다. 로마에서 아시아로 연결되는 에그나티아 도로가 지나고 있고요, 무역항이 있어 교통의 요지입니다.    

 

바울의 선교방식

1. 대상 – 익숙한 사람들 

바울은 어느 지역을 가면 항상 유대인의 회당을 찾았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에서는 회당이 없었지요. 그래서 강가에 있는 기도처소를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루디아를 만나지 않습니까? 데살로니가에는 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것이 가장 익숙하고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울에게 만큼은 그랬습니다. 당시 유럽지역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예배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교육하고 교제하는 센터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에 나가면 먼저 교회를 세우거든요.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모입니다. 교회에서 한국문화도 가르치고 한글도 가르치고 하거든요. 회당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바울은 이방인지역을 선교하면서 처음부터 이방인들을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먼저는 자신과 같은 유대인들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회당을 찾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도 또는 선교는 나에게 익숙한 사람들에게 먼저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가까운 친족들, 자주 만나는 이웃들이 전도의 1차 대상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안식일에 회당에 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2절을 보십시오. “바울의 자기의 관례대로” “관례대로”라는 것은 “늘 하던대로”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하던 대로 하지, 하지 않았던 것을 어느 순간 하게 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과 예배하고 교제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랫동안 선교사역을 하기가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전도는 나에게 익숙한 대상을 만나 익숙한 방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2. 내용

바울은 선도 또는 전도의 방식은 성경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2절 뒷부분부터 보면, 

사도행전 17:2–3

2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세 안식일에 거쳐 성경을 가르친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을 가지로” 로 번역된 ‘가지고’는 ‘논쟁하다’ ‘대화하다’라는 의미입니다(디아겔로마이). 강론은 오늘날 설교의 형태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토론하였다”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성서를 놓고 토론하였다”로 번역했습니다. NIV영어성경은 ‘설명하고’ ‘증명했다’고 번역했습니다.(3explaining and proving)

그러니까 바울이 3주 동안 회당에서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가지고 토론도하고 대화도 하고 가르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뜻을 풀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그리스도가 고난 받고 죽고 다시 살아날 것을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성경은 구약성경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령님께서 주신 지식과 지혜의 은사로 구약성경을 통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을 교훈적 차원에서 읽고 배웠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한다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회심전에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성령으로 거듭난후 부터는 성경을 완전히 이해하고 통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심판의 말씀을 하시는데 이 말씀입니다. 

 창세기 3:15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할 것이고, 너는 그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고 하십니다. 그 어떤 유대인도 이 말씀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는 여자의 후손은 과연 누구인가? 바울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임을 깨닫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사단이 여자의 후손인 예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머리가 상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로마서 바울은 로마서 16:20절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 16:20 

20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박살냈듯이 평강의 하나님께서 이제 곧 너희 발 아래에서도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사건들, 율법의 내용들, 예배의 형식들, 때로는 지혜의 잠언, 시, 예언 등등 이 모든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언 또는 예표하고 있고, 그 그리스도가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지 않습니까?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24:26–27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구약의 모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설교나 전도나 제자훈련 등 모든 사역의 핵심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하고, 그 핵심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단지 교훈이나 삶의 지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맡은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만일 성경을 통해 예수를 증거하지 않으면 그 설교와 가르침이 큰 감동을 줄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 성도들이 성경을 많이 읽고 공부도 하고 해도 예수가 그리스임을 믿지 않는다면 그 모든 수고는 헛된 것입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때로는 토론하고, 대화하면서 예수님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성경을 통해 예수를 증거해야 하는가?

이것이 왜 중요한 것입니까? 

그럴 때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강화되는 것도 성경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베드로전서 1:23

23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2:2 

2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하나님 말씀을 의미합니다. 순전하다는 것은 오염되지 않은 하나님 말씀을 의미하고 신령한 젖이라는 것은 성경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순전한 말씀, 신령한 말씀을 아기가 젖을 사모하듯 사모하고 먹을 때 우리의 신앙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도 성경말씀으로 되는 것이고, 이후 성숙하고 성장하는 것도 말씀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자와 거지에 대한 비유를 하십니다. 

부자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거지의 이름은 나사로입니다. 부자는 호화롭게 살았고 나사로는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둘이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갔고 부자는 지옥에 갑니다. 부자는 자신이 당하는 지옥의 고통이 너무 괴로워 천국의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에 물 한방울이라고 먹게 해주소서. 아브라함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어 건너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자는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오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라고 하죠.

이때 아브라함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6:29–31

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모세와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당시 성경을 통해서 회개하고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방식이 아니라면 회개도 구원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죽은 자가 살아나 권할지라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지만, 실제로 예수님과 가깝게 지냈던 청년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를 살려 내십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유일한 방법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아무리 신비한 일을 체험하고 그것을 보고 듣는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거나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인 말씀을 사모해야지, 어떤 신비한 체험을 사모하셔서는 안됩니다. 예언도 필요하고, 환상도 필요하고, 방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들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거나 또는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지 못합니다. 그 순간에는 대단한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금새 시듭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은 성경을 묵상하고 배우고 공부하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베뢰아 사람들이 본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17:10–11 (NKRV)

10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사람들이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했다고 합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바울을 통해 배운 말씀을 듣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돌아가서 매일 마다 성경을 펼쳐서 과연 그러한가? 과연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가를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주일에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날마다 시간을 내어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스스로 묵상한 말씀이 우리 영혼을 강건하게 할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 받는 것 이상으로 큰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두가지 반응

이러한 바울의 전도에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두 가지 반응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사도행전 17:4

4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사도행전 17:12 

12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경건한 헬라인이라는 것은 헬라인이지만 유대교에 입문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회심한 것입니다. 또 적지 않은 귀부인도 회심했는데 이들은 데살로니가의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반면,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7:5 

5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사도행전 17:13 

13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때 좋은 일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핍박도 함께 따릅니다. 

내가 주의 일에 헌신했는데 왜 이렇게 어려운 일들이 생기지? 그럴 때 있죠. 

그러나 성경은 주님을 일을 할 때 박해가 따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로 오라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마게도냐 선교는 확실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려움이 없어야 되잖아요? 하나님의 뜻하신 길인데 만사형통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빌립보에서는 억울하게 붙잡혀 채찍에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불량배들에 추격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하신 길이라 할지라도 어려움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해가 저무는데 배를 타고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십니다. 배가 갈릴리 호수의 중간지점을 지날 때 큰 광풍이 불고 파도가 높아 뒤집힐 위기를 당합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에도 광풍이 불고 파도가 높게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가자고 하신 길입니다. 그러면 평탄해야 되잖아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편23편에는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가리고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뜻을 묻고 어떤 일에 헌신하거나 어떤 일들을 진행할 때,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당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악한 사단들도 공격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단은 주의 일에 적극적으로 방해공작을 펼칩니다. 그 공격은 교활합니다. 사람을 통해서도 오고, 환경을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의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공격할 것입니다. 

 

이때 성도들은 당황하지 않고 묵묵하게 주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를 흔드는 수많은 일들이 있지만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부정적인 상황이 아니라 긍정적인 상황입니다.

바울을 통해 회심한 경건한 헬라인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인 있음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에서도 그러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지만 찬송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일들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뿌린 복음의 씨앗들이 다 열매 맺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어떤 씨는 돌짝밭에 떨어지고요, 어떤 씨는 가치덤불에 떨어집니다. 또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중에는 좋은 땅에 떨어져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얻게 하는 씨앗도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사람들은 부정적인 현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바라보고 감사해하고 담대하게 나가는 것입니다. 실패한 9가지 일들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않고 성공한 한가지 일에 소망을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마음을 부정적 현실로 몰아가 염려와 두려움에 빠뜨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은 평강이며 담대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삶에 고난과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뜻을 이룸에 있어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일에 헌신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때란 없습니다. 삶을 흔드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헌신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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