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53. 왜 사람들은 복음에 적대적인가?
사도행전 14:1–7
1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4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오늘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의 이고니온에서의 선교장면입니다.
먼저 지도를 보면서 루트를 확인하겠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선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성안의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들었고 회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적대적인 사람들의 박해로 인해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이고니온이었습니다. 이곳은 에베소에서 다소로 향하는 로마 가도의 길목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이 선포되어질 때 나타나는 두 개의 상반된 반응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먼저 복음을 수용하는 모습입니다.
1절입니다.
사도행전 14:1
1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반면 복음에 적대적인 반응입니다.
2절입니다.
사도행전 14:2
2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사도행전 14:4–5
4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이러한 상반된 반응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면 어디나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복음에 적대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복된 소식이잖아요?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생명의 말씀인데 왜 사람들은 악감을 품고 적대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불교교나 이슬람교리를 들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과연 이렇게까지 반응할까요? 불교를 전하다 돌에 맞아 죽었다는 말 들어본 적 있습니까? 힌두교나 이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에 적대감을 품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의 복음에 대해서는 악감을 품는 것일까요.
오늘은 이 부분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른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까? 물론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제 질문의 의도는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이 결탁하여 십자가형으로 몰고 갔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그토록 악심을 품고 분개한 것입니까?
스데반은 어떻습니까? 그는 무엇 때문에 돌아 맞아 죽은 것입니까?
그가 돌에 맞아 죽을 만큼 죄가 있었나요?
바울도 마찬가지거든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 적대적인 세력들의 저항에 항상 부딪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어떤 부분이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고 죽이고 싶은 만큼의 악감정을 일으키는 것일까요?
복음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많은 사람이 종려나무를 흔들고 겉옷을 길에 깔며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에 그들은 폭도로 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까지 분노하게 한 것입니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의 신앙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성전제사를 정성껏 드리면 자신들이 거룩하게 되고 또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조항들을 세분화 시켜 일일이 지켜 가면서 순결한 삶을 살기위해 애썼습니다.
그들은 십계명을 기초로 하여서 율법을 잘 지키면 의롭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속죄제사 화목제사 속건제사 등 제사를 정성껏 드리게 되면 죄가 사해지고 거룩해진다고 믿었습니다.
율법준수와 성전제사 이 두 가지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과 성전제사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일수록 더 거룩하고 더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제사장들 또 성경을 연구하던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 이들의 열심과 헌신은 누가 보아도 신실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인식가운데는 이들이 거룩과 의로움의 상위계층에 속해 있었습니다.
마치 피라미드처럼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제사장 그룹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 아래에는 유대인들입니다. 이러한 체계 안에서 이방인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며 세리나 창기와 같이 분명한 죄를 범한 자들도 마찬가지로 저주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 그리고 장애인들도 포함되었습니다.
당시 종교적 인식으로 불치병이나 장애는 죄에 대한 심판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성전이었습니다. 성전구조를 보면 성소를 중심으로 종교적 계급체계에 따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고 성소에는 제사장들 그리고 그 바깥뜰에는 유대인들이 들어갑니다. 이방인들이나 장애를 가진 자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러한 종교적 인식체계를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가장 거룩하고 순결하다고 인정받던 종교지도자들부터 그들의 탐욕과 추악한 죄를 폭로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3:13–29
1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2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5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예수님은 당시 성전제사를 통해 거룩하게 되고 율법 준수를 통해 의롭게 된다고 여겼던 피라미드 가장 꼭대기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죄를 거침없이 폭로하셨습니다. 이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종교신념을 깨뜨리는 예수의 언행에 대하여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하고 악감을 품고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거룩하고 의로워지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력하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더 했지요. 그런데 예수라는 청년이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침상에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메고 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
이 말을 들은 서기관들은 이 사람이 신성모독을 한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예수라는 청년이 네 죄가 사함 받았다고 하니까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는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받아 가십니다. 아마도 여러 명의 바리새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인이 불쑥 들어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붙고 머리털로 씻깁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향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충격을 받고 격분합니다. “저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자신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거룩해지고 의로워 질 수 있다고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결코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적개심을 가지고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들의 내면에 숨겨진 죄를 들추어 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어떠한 의지와 노력으로도 거룩해지거나 의로워 질 수 없고 오직 예수만이 너희 죄를 사하고 오직 예수만이 너희를 의롭게 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내면에 숨겨진 죄를 폭로합니다. 고상한 말투와 매너 뒤에 숨겨진 탐욕과 누추한 죄를 들추어냅니다.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은 강조합니다. 이 죄는 종교적인 애씀과 노력으로도 결코 없어지거나 용서받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불교인들이 오체투지라는 것을 합니다.
티베트에 가면 오체, 즉 머리와 두 팔, 두 다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면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중생이 빠지기 쉬운 교만을 떨쳐버리고 어리석음을 참회하기 위해 이러한 예법을 행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당신이 아무리 오체투지를 해도 당신의 교만과 탐욕의 죄를 용서받지 못합니다 라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아마도 참지 못할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과 성전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거룩함과 순결한 자들로 설 수 있다고 믿는 자들에게 그것으로 당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 라고 선언합니다.
스데반의 순교장면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7:54
54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무슨 말을 들었기에 마음이 찔리고 이를 갈았을까요? 그 윗 구절을 보면,
사도행전 7:48 (NKRV)
48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성전제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53 (NKRV)
53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것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지만 실상 너희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51–53
51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스데반은 유대인들의 죄를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교만의 죄, 그리고 성령을 거스른 죄, 특히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죽인 죄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13장은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전한 복음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핵심은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고 그분은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것만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멸망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고 사도들이 전한 복음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듣고 분개하여 바울을 죽이려 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유대인들의 죄를 정확하게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3:39
39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면 의롭게 된다고 믿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치 오체투지를 하는 불교도들처럼 말입니다. 너희가 아무리 선한 행위를 쌓고 하나님 앞에서 기특한 행위를 한다고 해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여전히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4:19
19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다음 주에 살펴보게 되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돌로 바울을 쳐 죽이려 했습니다. 이때도 바울은 분명히 동일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죄를 지적하는 것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는 면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죄인들의 자신들의 죄를 결코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합리화 시키거나 그런 일이 없다고 부정합니다. 실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의 대부분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기로 결단하고 선택하고 즐깁니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 아무리 로맨스로 포장해도 불륜입니다. 불륜이라고 지적하면 로맨스라고 합리화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성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적당하고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 반응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죄를 지적하는 상대방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대하는 것입니다. 폭언이나 폭행을 할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인정하는 부정적인 반응입니다. 반면 긍정적인 반응이 있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개의 상반된 방응이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처럼 폭력을 행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가운데 회개하고 돌이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한 가지 도전을 줍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할 때 반드시 당신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선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아니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상관없이 이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CCC에서 사용하는 4영리 전도법이 있습니다. 전도에 있어서 탁월한 도구입니다.
자연에는 자연의 질서와 원리가 있는 것처럼 영적인 세계에도 4가지 영적원리가 있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제1원리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2원리 사람은 죄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제3원리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길입니다. 제4원리 우리는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아쉬운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너무 쉽게 다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회개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는 다는 것만으로는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의 본성은 자기를 가장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하면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받을 만하기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내가 어떠한 죄인인가를 철저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죽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죽인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쉽게 선포해 버립니다. 그것은 복음을 값싸게 만드는 일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사건을 다룹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죄는 심각한 것입니다. 결코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내 죄가 얼마만큼 심각한 것인지를 알 때 하나님의 사랑이 은혜로 다가옵니다.
로마서 5:20
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내가 얼마만큼 죄인인가를 깨닫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로 여겨집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쉽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를 보시면 1장부터 3장까지 우리가 어떠한 죄인인가를 철처하게 드러냅니다.
바울은 죄의 문제를 심각하고 위중하게 다룹니다.
로마서 3:10–18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당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악감정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의 욕망을 추구하며 살았단 삶이 죄였음을 지적해야 합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면서 상대반의 눈치를 살피지 마세요. 상대방이 기분나빠하면 어떡하지 걱정하지 마세요. 복음은 선포이지 설득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어떡해서든 달래고 얼래서 믿게 하려는 것은 복음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전에 어르신 한분이 한층 밑에 사는 어르신을 전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갔습니다. 주로 그 아파트에는 독거노인들이 많이 살고 계셨습니다. 집에 들어가니 창가에 할아버지가 앉아계셨습니다. 목사가 온다는 말을 들었지만 눈을 맞추거나 인사도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완고한 분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나 당황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창 밖에 목련꽃을 보고 계셨습니다. 할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어르신!, 내년에도 저 예쁜 목련꽃을 보실 확신이 있으세요?”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흔들입니다. “요즘 건강이 좋지 않아 염려가 많아가 많으시죠?” 라고 말했더니 그제서야 제 얼굴을 쳐다 보십니다.
“어르신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한 죄인입니다. 어르신뿐 아니라 목사인 저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라고 했더니” 화난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무슨 그렇게 죄를 지었소?”
“어르신, 그동안 어르신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도 않았고 의지하지도 않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어르신!, 어르신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세요?” 물었습니다.
고개를 떨구십니다. 장판에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일에 윗층 할머니와 함께 교회로 오셨습니다.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설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담대하게 전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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