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40. 고넬료의 경건
사도행전 10:1–8
1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사도행전 강해 40번째 시간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은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리라(행1:8)고 말씀하셨지요.
사도행전은 2장의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10장까지 오면서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 끝까지 확장되는 사건들을 보여줍니다.
10장은 복음이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장소적 배경은 가이사랴입니다.
가이사랴는 지중해 연안도시입니다. 예루살렘 북서쪽 105km지점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신대원 시절 이곳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바닷가의 세워진 건축물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아름다운 도시답게 그곳에 사는 고넬료라는 사람도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먼저 로마에서 파견한 군대의 백부장입니다.
여기 사용된 군대라는 용어는 당시 100명 단위로 총600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말합니다.
백부장은 100명 단위의 부대를 이끄는 부사관입니다. 당시 백부장의 사회적 지위는 중산층 이상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경건한 자라고 소개합니다.
2절에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함이란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첫 번째,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 번째,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세 번째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라고 말하고 있죠.
여러분들은 경건함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분은 참 경건해” 라고 할 때 어떤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경건이 무언인지를 살펴보고 우리의 삶이 경건해지길 소원합니다.
첫 번째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되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기도하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경건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외라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 앞에 서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막연하게 생각할 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막연했던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느끼는 첫 번째 반응은 두려움입니다. 이것을 경외라고 말합니다.
전에 뉴질랜드의 북쪽 끝인 케이프링가에서 보았던 별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새벽에 차에서 내려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 하늘을 빼곡히 채운 셀 수 도 없는 별이 제 머리 위에 있었습니다. 별이 하늘에 있어야 되는데 머리 위에 있었고 하늘로부터 해서 수평선 끝까지 채워져 있었습니다. 저는 별에 의해 사방에 둘러싸인 채 절벽위에 서 이었습니다.
그 무한 광대한 우주 가운데 먼지와 같이 작은 별인 지구에서 서 있으면서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때의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두려움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 앞에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이것이 경외심입니다.
이렇듯 경외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었던 하나님, 막연하게만 여겨졌던 그 하나님이 현실의 나의 삶 가운데 다가오실 때 느끼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경외가 무엇인지는 구약의 이스라엘에 백성이 언약을 맺을 때의 장면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5:22–29
22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에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23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수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24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에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보았나이다
25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26육신을 가진 자로서 우리처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에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27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28여호와께서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너희가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
29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29절의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라고 말씀하시죠.
어떤 마음입니까?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두렵고 떨림으로 서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러한 마음의 자세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결국 경외라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성품을 알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자세와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거짓을 행하지 못합니다. 거짓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두렵기에 거짓을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행여 거짓을 행했다면 회개할 수 밖에 없지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지 않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귀한 자들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한 비유를 드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누가복음 18:2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사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 일로 그랄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내로 삼을 뻔하죠. 아비멜렉이 이것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네가 왜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했느냐? 이때 아브라함이 이런 말을 합니다.
창세기 20:11
11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도시이기에 사람들이 강팍하여 아내를 빼앗고 죽일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과 위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경건한 분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거짓을 행하거나 쉽게 죄를 범하면 그는 경건한 자가 아닙니다. 그가 비록 설교도 하고 기도도 하고 예배의 제반 행위를 인도할지라도 경건한 자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 분을 두려워하십니까?
나는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서 있음을 믿으십니까?
두 번째로 경건한 사람은 구제 하는 사람입니다.
고넬료는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고 합니다.
구제가 경건의 행위로 인정되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과부들을 도왔던 욥바의 다비다라는 여 제자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역이 지속될 수 있도록 베드로를 통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그녀를 살려내십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이웃을 물질로 섬기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신명기 14:29
29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사회적 약자들을 물질로 섬길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하면 범사에 복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제를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약한 자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되어보니 약한 자녀에게 마음이 더 쓰입니다. 찬송가 가사에게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귀한 우리들이 이 땅에서 어려움 없이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과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그들을 섬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약한 자들을 돕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람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내 앞에 있는 이웃을 사랑함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지 않기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이웃을 돌보지 않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이런 비유를 하세요.
마지막 심판 때에 모든 민족을 모으고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둘로 나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랬더니 이들이 대답합니다.
“주님 우리가 어느 때에 그랬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준적도 없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 드린 적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주님께서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 형제들을 돌보는 것을 자신에게 한 것으로 받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 어려운 형제들을 돕는 것은 곧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는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겠습니까?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 주신 그토록 나를 사랑하신 주님은 내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분을 사랑할 것입니까?
우리 곁에 있는 어려운 형제자매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일 수도 있고요, 기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내가 시간을 내어 함께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가진 어떤 노하우나 기술을 나누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희 교회가 한밭에 앞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 예배할 때입니다. 그때 성도가 효철이 창문형제, 임집사님 그리고 저와 아내 이렇게 였습니다.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헌금을 모아둔 돈이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선풍기 30대를 사서 진잠 주민센타에 기증했습니다. 복지과 직원들이 너무 기뻐하시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해 드렸습니다. 그때 제가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축복하시겠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 중에 하나가, 성도의 교제입니다.
성도들 가정에 어떤 일이 있으면 모두가 마음을 모아 주십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시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어려움 당한 가족에 전달해 달라고 구제헌금을 드리시고, 장학금으로 사용해 달라고 장학헌금으로 드리십니다.
저는 이러한 아름다운 모습들이 교회의 전통으로 자리잡고, 또 더 풍성해 지길 기도합니다.
잠언 11:24–25 (NKRV)
24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어떻게 구제를 좋아하는데 풍족해 질까요?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더 풍성히 하라고 복을 주십니다.
구제에 힘쓰는 교회는 복을 받습니다. 구제에 힘쓰는 가정은 복을 받습니다.
고넬료는 대단한 부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많이 구제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경건함이라고 말합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지요. 내 물질생활을 보면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그대로 드러납니다. 구제는 해야지 결단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이 먼저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웃에게로 마음이 갑니다. 그리고 그들을 돕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은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항상 기도한다는 것은 정기적으로 기도시간을 정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정기적으로 기도시간을 정해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환상중에 하나님의 사자를 보는데 이때가 구시 기도시간이었습니다.
다음주에 살펴볼 베드로도 환상을 보는데 제 6시 기도시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9 (NKRV)
9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도 제 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면서 생긴일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많은 경우 기도와 연관되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기도하러 가는 도중에, 기도 중에, 그리고 기도 후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죽은 다비다를 살리는 것도 베드로가 기도하고 난 후였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할 때 그것은 정기적으로 시간을 갖고 기도라는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항상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정기적인 기도시간을 갖고 기도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경건한 사람입니까?
본문에 보면 이러한 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은 인정하십니다.
사도행전 10:4 (NKRV)
4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여러분의 구제와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떨어지는 구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땅에 떨어지는 기도는 하나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 앞에 상달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장 응답하지 않더라고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이죠.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고넬료와 같은 경건한 자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시고, 많이 구제하시고, 정기적으로 기도하시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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