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34. 종교인인가? 그리스도인인가?
사도행전 8:9–25
9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12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14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17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18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1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24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25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오늘 본문의 내용은 쉽지 않습니다.
두가지 내용을 살펴보게 될텐데요. 첫 번째는 물세례와 성령세례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물세례는 받았는데 성령세례는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두 사고가 안수하때 성령께서 임하시는데 이러한 현상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술사 시몬이라는 사람이 사도들이 행한 성령이 임하게 하는 일을 돈을 주고 사려고 하는데 이 사건에 대한 영적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박해를 받았고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가는 곳 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중 사도행전이 주목하는 것은 사마리아 선교였습니다. 흩어진 성도들이 사마리아 지역을 복음화한 사건입니다. 당시 혐오지역이었던 그 땅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이례적이었습니다. 유대역사의 치욕을 간직한 그곳에 그 누구도 가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복음을 들고 간 사람은 빌립이었습니다.
빌립은 예루살렘교회에서 뽑은 7명의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죠. 그가 복음을 전파할 때 큰 능력이 임하였고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귀신들이 떠나가고 병자들이 고침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결과 그 성에 큰 기쁨이 임합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큰 박해 그리고 스데반의 순교로 인한 큰 울음, 그리고 이제 복음 전파를 통한 큰 기쁨. 성경은 결국 성도의 삶에 박해와 울음이 있지만 결국에는 큰 기쁨으로 결론지어짐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사마리아 선교 가운데 있었던 특별한 사건입니다.
9절에 보면, 시몬이라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는 마술사입니다. 마술은 속임수입니다. 당시 마술은 과학과 혼합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어떤 마술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어떤 일들을 행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큰 자라고 칭했고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불렀습니다.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랐다고 하니까, 사마리아서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돈도 상당히 벌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이 시몬을 찾아가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업의 문제일 수도 있고, 건강의 어려움 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녀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해결되지 는 삶의 문제 앞에서 사람들은 신적 능력을 의지하게 되죠.
사람들이 무당굿을 하는 이유가 그래서일 것입니다. 무당이 작두를 타고 춤을 추는 것을 보면서 신이 임했고 그것이 어떤 신이든 상관없이 그 신을 통해 자신의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적개는 300만원부터 용한 무당의 경우 한번 굿에 1억까지 받는다고 하니
이러한 종교장사는 예나 지금이나 불황이 없습니다.
할렐루야기도원의 김계화 원장은 직통계시, 성령수술, 매독사건, 능력의 생수 등으로 물의를 일으켜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개량된 의사 가운을 입고 기상천회한 안수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면봉에 액체를 묻혀 코에 꽂는 생기안수, 사우나안수, 부황 뜨는 불안수, 특별계시안수, 신비의 묘약이라는 누에효소 안수, 죽을 자가 한 알 먹고 살아났다는 곤진단(환), 허브안수, 머리안수, 총명안수, 잇몸안수... 등.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부위별 안수 만들어 놓고, 만 원 씩 안수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500여 명의 신도들이 일인당 5만원 이상의 현금을 하루에 지출! 90노인에서 장애우들에게까지 돈을 받고 장사를 합니다.
그곳에서는 아직도 김계화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천국의 새로운 계시를 받아 전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계화 원장을 ‘영의 어머니’라 추앙하며 우상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거짓과 사기 또는 귀신의 장난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것에 쉽게 속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이 거짓과 사기에 쉽게 속습니다. OECD국가 중에 사기범죄률 1위가 우리나라거든요. 이렇게 사기사건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우리가 잘 속는다는 증거입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짓뉴스에 속고 있습니까? 알면서도 속습니다.
시몬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돈 벌이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과학지식과 마술을 혼합하여 사람들에게 신적인 능력을 과시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시몬의 거짓역사를 깨뜨린 사람이 빌립이었습니다.
12절에 보면, 빌립의 사역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고 그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확증하는 표가 이적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지금 이곳 가운데 임하고 있다는 증거가 이적사건이었습니다.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가 고침 받는 일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이곳에 임했구나 라고 믿었던 것이죠.
시몬이 바로 이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시몬은 그 동안 속임수로 어떠한 일들을 진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경이로워 했지만 시몬 자신은 알았습니다. 속임수라는 것을. 그런데 진짜가 나타난 것입니다.
빌립의 사역 가운데 나타난 이적은 속임수가 아니라 진짜였습니다.
그래서 시몬도 복음을 믿기로 결정합니다. 세례도 받습니다.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닙니다.
그의 믿음은 과연 진짜일까요?
믿음의 고백도 있었고 세례도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온전한 것일까요?
한편 예루살렘이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에 보냅니다. 조금 어려운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 부분을 잘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도행전 8:14–17
14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17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이 부분이 왜 어려운가 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을 통해 복음을 듣고 믿고 세례를 받았거든요(12절). 그런데 성령이 임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임하기를 기도하여 성령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고 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오순절 계통에서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구분하고 성령세례를 제2의 축복으로 여겨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에게만 임한다고 믿습니다. 순복음교회 다니셨던 분들은 그렇게 배우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증거는 방언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근거를 오늘 본문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만 가지고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가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이미 임재하신 결과입니다. 물론 그 고백이 진실할 때임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세례는 그 믿음을 확증하는 표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이 사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라고 물로 세례를 줌으로 증거를 삼는 것입니다.
물세례를 통하여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임하셨다는 증거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이미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왜 성령이 임하지 않으셨는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그것은 이방 땅에 처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처음으로 유대 땅을 벗어나 이방인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는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역시 유대인입니다. 살아온 배경만 다를 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처음으로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특수한 상황에서 검증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이방인들에게도 성령님은 임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속된 자들, 불결한 자들 이었거든요.
베드로조차도 이러한 선민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실 때, 미리 환상을 보여주시죠.
속된 짐승을 보여주시고 이것을 잡아 먹으로 하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때 두 번째 소리가 들리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자 하지 말라”
이러한 인식이 당시 성도들에게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사마리아는 어떤 땅입니까? 유대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더럽힌 저주 받은 곳 아닙니까? 그러니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이 공적으로 인정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이 아직 내리시지 않고 사도들의 공적인 안수가 있을 때 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 성령이 임함으로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성령이 임했음을 확인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사마리아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을 모든 성도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세례를 받고 그 다음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언을 못한다고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세례를 받은 사람은 다 성령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물세례가 성령세례를 받은 것을 확증하는 절차이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셨죠. 이해가 안 되신 분들은 개인적으로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로 성령께서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임하십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시몬이 돈을 주고 그 능력을 사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8:19
19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이 말은 들은 베드로가 분개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8:20–22
20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1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그동안 사도행전은 복음이 선포될 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여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경우가 있었죠. 반대로 복음 전하는 자들을 박해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복음을 받아들이긴 하지만 그것을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는 경우가 등장합니다.
겉으로는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도 받았지만, 그 모든 종교적 제반행위가 결국에는 자기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기독교신앙 안에서 가장 타락한 형태의 모습입니다.
기독교신앙을 자기유익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해 하나님을 믿습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믿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기에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비록 박해가 따르고 초라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에게 현실적인 아무런 유익이 없을 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업이 여전히 어려워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고, 자녀들은 여전히 속 썩이고 눈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손해를 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며 구주이시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며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시몬처럼, 하나님을 이용하여 어떠한 이익을 추구하려고 할 때, 하나님을 우리의 종으로 취급하는 것이며 우리가 왕으로 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권능을 돈을 주고 사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권능으로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신의 호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선행이나 구제 또는 참선을 통해 신께 가까이 가며 또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내에도 이것을 믿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도 내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죄사함 받아 천국에 가는 것도 내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이루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도 내가 수고하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시몬에게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대가를 지불하고 얻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믿음을 가지게 되면, 이 땅에서 사업이 잘되고 돈도 잘 버는 사람은 무언가 하나님께 애쓰고 노력한 것이 많아 축복을 받는 것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반면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충성하지 않고 드린 것이 없어 그렇다고 여깁니다.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는 성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제가 뉴질랜드에서 만난 어떤 성도님은 한국에 있을 때 사업이 어려워졌음으로 차를 바꾸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녔는데 차가 바뀌면 교인들이 저분은 하나님께 뭔가 잘못해서 벌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의 밑바탕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나의 노력여하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은혜는 쉬운 말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고 싶어 주는 것이 선물입니다. 사랑하기에 좋아하기에 주고 싶어 주는 것입니다. 만일 선물에 돈을 지불하면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불쾌한 일입니다.
은혜에 대한 보답, 선물에 대한 최선의 보답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최선의 보답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은혜를 돈으로 살려는 것은 악독이며 불의이다. (23절)
시몬은 무엇 때문에 성령이 임하는 능력을 돈을 주고 사려고 했을까요? 그 능력으로 더 많은 돈을 벌고, 그 지역가운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f
하나님 나라를 위해 능력을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능력을 구하게 될 때 그것은 악독이고 불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께 능력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꼭 영적인 은사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돈이 능력이죠. 여성들에게 미모가 능력입니다. 학생들에게 성적이 능력이죠. 청년들에게 공기업이나 대기업이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능력을 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생활과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신앙을 수단화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위해 우리의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헌신하며 희생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으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종교인과 기독교 신앙을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바리기는 기쁜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빌립처럼 큰 박해와 큰 울음 속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축복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신앙을 이용하는 종교인들이 아니라, 순결한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복된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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