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36. 참된 신앙의 길
사도행전 9:1–9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오늘 본문은 사울의 회심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사울이 어떻게 해서 사도가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늘 사건을 통해 참된 믿음의 길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참된 믿음은 바른지식을 기반으로 합니다.
회심 전에 사울은 자신의 믿음이 참되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구약성경에 능통했습니다. 유대인중의 유대인이었으며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음에 생명을 걸만큼 열정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라는 청년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는 다는 것은 그의 신앙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자인데 구원자가 저주의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을 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주장을 펼치고 돌에 맞아 줄을 때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자를 발본색원하여 고문하고 죽이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라고 믿었습니다.
1절에 보면 당시 바울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그는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에 가서 다메섹으로 가는 공문을 청합니다. 대제사장은 당시 산헤드린공회의 수장이었습니다. 다메섹은 현재의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커스를 말합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으로부터 240Km 북쪽에 위치합니다. 이곳에는 이미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예루살렘교회의 박해가 시작되자 많은 성도들이 이주해 간 것입니다. 그곳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형성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곳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붙잡아 본국으로 소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권한이 대제사장에게 있었기 때문에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며 열정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충성과 열정은 잘못된 지식위에 세워진 충성이며 열정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신앙은 반드시 진리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신앙의 기반이 바른 지식이 아니면 그 위에 충성과 열정을 더한다고 해도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그 충성과 열정은 타인에게 위협과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은 타인에게 상처를 뿐만 아니라 자신을 파괴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입다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무남독녀를 번제로 바친 사람입니다.
그는 암몬과의 싸움에 나가면서 하나님께 서원하지요.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를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입니다”
이후 성경은 여호와께서 암몬을 입다의 손에 넘기셨다고 전쟁의 상황을 간결하게 기록합니다.
성경이 주목하는 것은 그의 서원과 그 결과입니다.
사사기 11:34–35
34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입다는 여호와께 서원을 하였고 그 서원은 자신의 무남독녀 딸을 번제로 바치는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열정이 있었습니다. 주의 영이 임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불행했고 비참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받는 분이 아닙니다. 인신제자는 이방종교에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해 신께 제물을 바치는데 그 소원함이 간절할수록 소중한 것을 바치게 되죠. 그중에 최고의 제물이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입다는 전쟁의 승리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함께 사는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서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서원을 지킵니다. 그만큼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열정 때문에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딸을 번제로 드리는 비참한 결과를 낳습니다.
어떻게 주의 영이 임한 입다, 그것도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열정이 가득했던 그가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입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당시의 영적상황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사기 10:6
6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그들은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고 하면 모든 신을 다 섬겼습니다. 그 중에 한 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과 열정을 가지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충성과 열정이 바른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에디오피아 내시의 구원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가 읽던 성경이 이사야53장이었습니다. 수단 당하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 예언이 예수에게서 성취됩니다.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고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계시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바르게 알면 당연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고 연구하여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면 그 모든 노력과 열심은 헛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참된 믿음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바른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책 한권 읽은 사람이라고 하죠. 그가 가진 지식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 얄팍한 지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의학서적 한권 읽고 질병을 진단하는 것이죠. 경제서적 한권 읽고 경제를 분석하는 것이죠. 신학서적 한권 읽고 기독교를 판단하죠. 위험한 것입니다.
대학교 때 읽었던 책인데 제목도 기억나지 않고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데 표지 그림만 기억납니다. 여러 사람이 도화지에 하나님을 그립니다. 각자가 아는 하나님을 그리는 것입니다. 과연 누구의 그림이 진짜 하나님일까요?
마치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기둥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다른 장님이 코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파이프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장님이 몸통을 만지면서 코끼리는 원통이라고 말합니다. 다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가진 신앙이 참된 신앙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바른 지식위에 세워져 있는지, 성경적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목사가 강대상에서 말한다고 다 “아멘”하시면 안됩니다. 목사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있고 적용하고 있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은 불경한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틀릴 수 있거든요.
사도행전 17:11
11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사람들을 칭찬하죠. 그들이 “너그럽다”는 것은 열린 자세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과연 성경적인가를 연구하고 확인한 후 그것이 맞으면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자신의 신앙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성도들을 만나곤 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전부입니다. 어떤 성도님은 신실하신 분인데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신이 기대하는 하나님을 그려놓고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베뢰아 사람들과 같은 열린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 생각과 성경의 말씀이 부딪힐 때 내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모토 가운데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경을 중심으로 항상 개혁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검으로 잘못된 생각을 잘라내고 성경적 사고로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성도들이 바른 성경의 지식위에 신앙을 세우길 바랍니다.
나의 잘못된 신념과 내려놓고 성경의 지식으로 무장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흔들림 없는 견고한 신앙을 세우시는 우리 성도들 되길 바랍니다.
두 번째 참된 신앙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데 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사울은 분명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나중에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라는 표현으로 통해 사울은 빛만 본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정오(22:6)였기 때문에 태양이 밝았습니다. 그런데 그 태양빛을 능가하는 빛이 사울을 휘감은 것입니다. 그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땅에 엎드립니다.
소리가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두 번 부르는 장면을 보면 대부분 인격적 친밀함을 나타내거나 긴급한 상황에서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단에 올리고 칼을 들어 죽이려 할 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나님의 급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때도 “모세야 모세야” 부르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처음으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때도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시는 음성을 듣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 번 부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울은 자신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은 계속 이어집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여러분! 이때의 예수님의 음성은 어떤 감정을 감고 있었을까요? 분노일까요? 자신을 핍박하는 사울을 향해 화가 나서 하시는 음성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사울을 향한 안타까운 심정을 담은 음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친밀하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사울의 잘못된 신앙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에 충성과 열정을 다하는 그를 불쌍히 여기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어가면서 자신을 향해 침 뱉고 모욕하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구합니다. “하나님!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사울에게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시며 안타깝게 여기시며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부끄럽고 더러운 죄인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정죄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실 때도 그러셨습니다. 그녀는 남편 여섯 명과 동거했던 막장 인생을 살았던 여인입니다. 그를 만났을 때도 그의 부끄러운 죄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탐욕의 노예로 살고 있던 삭개오를 찾아가셨을 때도 그를 나무라거나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고 하시죠. 자신을 저주하고 배신한 베드로를 찾아가셨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 새벽에 생선을 구워놓으시고 조반을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결코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환대하시고 감싸주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하시며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도 우리 인생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자신을 핍박하는 사울을 찾아오신 주님께서 죄의 노예로 살고 있던 우리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그 인격적 만남이 우리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사람은 교육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잠시 행동이 교정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금새 돌아갑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 중요합니다. 예배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것 중요합니다. 기도에 열중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없이는 그 모든 것들을 헛된 종교생활일 뿐입니다.
참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까?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노력한다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야 합니다.
이러한 찾아오심은 두 가지 모습으로 구분됩니다.
첫 번째는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거나 설교를 듣거나
또는 성경을 공부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의 이성과 마음을 여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 말씀이 믿어지면서 동시에 우리의 더럽고 추악한 죄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때 회개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이 믿어지고 나는 그분의 피조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면서 그러한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일어나는 일반적인 과정입니다.
지난 시간 살펴보았던 에디오피아 내시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구약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갈 만큼 신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참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빌립을 통하여 성경을 배우고 마침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은 후 참 신앙인으로 거듭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러한 과정으로 성도들을 부르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하십니다.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관념적 존재가 아니라, 부활의 주님이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 하심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전인 주님의 은헤로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회개의 경험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지금은 그 기억이 흐릿하고 너무나 오래전의 경험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회개했던 순간이 있었다면 그때 예수님은 여러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우리의 구원자로 고백하고 있다면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신비적 체험을 통해 찾아오시기도 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오신 것처럼, 때때로 신비적인 체험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기도 하고, 신비적 환상을 보기도 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긴급한 경우이기 때문에 모든 성도에게 일반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일이 없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00대학교에 이00교수는 회심 전에 기독교를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종교자유정책구원이라는 조직을 세우고 어떻게 하면 기독교를 이 땅에서 박멸할까를 연구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탄압하는 법안을 만들고 시민사회를 설득하고 국회를 통과시켜 마침내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 일을 했습니다. 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JESUS LOVES YOU라는 간판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부터 없어졌죠. 그가 진행했던 일 중에 하나입니다.
2010년 대광고 사건의 대법원 승소(대광고 강의석군이 미션스쿨의 예배참석의 자유를 주장했던 사건), 2008년 공직자 종교중립법 제정, 2007년 종교시설의 투표소 설치 불가, 지하도로의 사적 점용을 허가한 사랑의교회 문제와 관련한 법률 개정등 그들이 진행한 일들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탄압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들기 위해 절에서 공부하던 중에 머리가 너무 아팠다고 합니다. 절에서 좀 벗어나면 좀 괜찮아지고 다시 오면 아프고 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평소 즐겨 보았던 기독교방송을 틀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알아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CTS를 켜고 목사님들의 설교를 자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자주 설교를 듣다가 조롱하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도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는 말에 조롱하려고 하는데 순간 입술이 굳고 온 몸이 마비되는 체험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것과 같았다고 말합니다. 그 순간 자신이 얼마만큼 더럽고 추한 죄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오신 분이 하나님임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더러운 죄임임을 자각하는 순간 이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죽지 않은 것이죠. 이 더럽고 추악한 죄인이 죽지 않았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은혜를 깨닫는 순간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그는 지금까지 기독교를 탄압하는 세력들의 정체를 밝히고 그들의 전략을 분석하여 교회가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강의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동안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고 기독교를 공부했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신학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지금도 신비적인 방식으로 그가 선택한 사람들을 찾아오십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참된 신앙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의 인생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었지만 이제는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는 항상 자신을 소개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며 복음을 전파하는 인생을 삽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핍박과 고난을 받고 마침내 목이 잘려 순교당하죠. 그러나 그는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항상 기뻐했고 쉬지 않고 기도했으며 범사에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참된 신앙의 길에 들어서면 이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셨다면 이제 그분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시길 바랍니다.
비록 삶의 고난과 아픔들이 있지만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