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26.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
사도행전 7:1-8
1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2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5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6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7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8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오늘 본문은 공회앞에 붙잡혀온 스데반의 최후진술입니다. 이 진술을 끝으로 그는 순교하게 됩니다. 7장 전체가 스데반의 진술입니다. 그는 자신이 믿음을 증언하였고 이 증언이 곧 복음증거이기도 했습니다.
먼저, 스데반이 어떠한 상황에서 이러한 진술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7명의 리더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는 헬라파 사람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권 문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들이 모여 있는 회당에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스데반의 말을 듣던 사람들이 그와 논쟁을 하다가 결국 당해내지 못하자, 사람을 매수하여 공회에 고소하게 됩니다. 죄목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가 율법을 거슬러 말하고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성전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성전을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장소였고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하는 규범이었습니다. 율법과 성전은 유대인들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이 두 가지를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성모독이었고 유대사회에서 가장 치명적인 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뒤집어쓰신 죄목이 신성모독임을 아실 것입니다. 예수가 이것 때문에 십자가형을 받은 것을 보면 신성모독이 얼마만큼 중대한 죄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공회 앞에 붙잡혀 왔습니다. 우리가 익숙한 장면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이 자리에 섰었고 사도들도 이 자리에서 심문을 받고 채찍에 맞은 후 받은 후에 풀려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스데반도 공회 앞에 선 것입니다.
먼저 대제사장이 묻습니다. 1절에 보니까? 이것이 사실이냐?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스데반의 진술이 이어집니다. 그는 이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말하기 보다는 자신이 전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전하고 그들에게 판단하게 한 것입니다. 스데반이 전한 메시지가 정말로 신성모독인지 71명의 공회원 전체가 판단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부 성경에 전문가들 아닙니까?
그 내용이 3-53절까지입니다.
구약 성경전체를 구원사적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왜 하나님의 창조나 아담 그리고 노아가 아니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할까요?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신앙의 뿌리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8절까지 아브라함에 대해, 9-16절까지 요셉 그리고 19절 부터는 모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광야의 여정 그리고 가나안 정착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구약성경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역사가 인물들을 중심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스데반이 주목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강조입니다.
제가 신학대학 때 故한철하총장님으로부터 배운 가장 귀한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신본주의신앙입니다. 성경은 주제는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어떠한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지만 그는 위기의 순간 때마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야곱은 언약의 자손이었지만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영웅이지만 살인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합한 왕이였지만 간음죄와 살인교사죄를 범했습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을 통해 인물에 관심을 갖게 되면 성경을 잘 못 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연약한 인생들의 삶에 개입하시고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얼마만큼 위대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 삶에 왕으로서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순종과 경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본주의 신앙입니다.
스데반은 그 하나님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설교를 통해 깨닫게 되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에게 땅과 자손에 대해 약속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창세기의 기록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배워보려고 하지만 정작 배울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단지 창세기 22장의 이삭을 드린 사건 외에는 없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시고 중요한 두 가지 약속을 하시죠. 내가 너에게 땅을 주겠다 그리고 너를 통해 큰 민족을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땅과 씨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두 가지 약속이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땅과 씨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죄악으로 말미암아 심판받아 마땅한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셨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과연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땅에 갔지만 그곳에 기근이 임하자 애굽 땅으로 도피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오랜 기간 자손이 없자 첩을 통해 이스라엘을 낳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가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할 때 마다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언약을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믿을 만하며 반드시 이루어지실 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두 번의 언약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첫 번째 언약의 장면이 창세기 15장의 내용이죠.
고기를 쪼개어 놓고 밤에 하나님께서 그 사이를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고대근동아시아에서 언약을 맺는 방식이었습니다. 당시 두 인격대상자가 언약을 맺을 때 조개를 쪼개 놓고 언약당사자가 그 사이를 지나감으로 만일 둘 중 한 사람이 언약을 어기게 되면 이렇게 쪼개져 죽을 것이라는 것을 맹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의 언약의 방식을 사용하셔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습니다.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약속의 땅 그리고 민족입니다. 땅과 씨에 대한 약속이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이 고개를 쪼개 놓고 기다립니다. 캄캄한 밤에 횃불이 그 사이를 지나가죠. 아브라함을 그 사이를 지나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일방적 언약을 맺으심으로 반드시 자신이 약속한 것을 이룰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6장에 아브라함이 어떻게 합니까?
그의 아내 사라가 여전히 자녀가 없자 아브라함에게 첩을 얻어 자녀를 낳자고 제안하죠. 당시 문화가 그랬습니다. 자녀가 없으면 첨을 통해 자녀를 낳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 제안을 덜컥 수용하죠. 그래서 하갈이라는 첩을 얻고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식을 통해 약속을 지킬 것을 보여주셨지만 아브라함은 여전히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17장에 가면 다시 한 번 언약을 맺습니다.
이번에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십니다. 이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항상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20장에 보면, 그가 네게브 땅으로 갔을 때 또 다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이때 아비멜렉 왕이 사라를 취하고 그를 아내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때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사 밤에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경고하십니다. 네가 취한 여인은 남편이 있는 여자라고 말씀하시죠.
창세기 21장에 들어서면, 드디어 아들 이삭을 낳게 됩니다. 이때가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사라의 나이 90세였습니다. 이때 비로소 아브라함의 믿음이 온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22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시험에 응답하여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시험에 통과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아브라함이 과연 믿음의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결코 아니죠. 22장에 비로소 믿음의 사람이 되었지만, 12장에서 21장까지 오는 동안 그는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 없는 그의 인생 가운데 개입하셔서 결국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아브라함을 보아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까?
믿음이 없는 자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신실하심 긍휼하심과 사랑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 보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이 훨씬 가깝게 우리 가운데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신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을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스토리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그 하나님이 우리의 히스토리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내 인생을 주관하심을 잊어버립니다. 나의 자녀들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걱정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삶은 내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닙니다. “당신이 세상의 주인공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삶에 주인입니다.” 라고 말하면 기분이 좋죠. 자존감이 올라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자리할 때 그것이 교만이고 죄짓는 길입니다.
내 인생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내 노력과 의지의 결과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과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결과를 위해 과정들에 최선을 다합니다. 물론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꼭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과정에 최선을 다한다고 하여도 그 결과가 나쁠 수 있습니다. 또 과정이 좋지 않았음에도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하기도 하죠.
똑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하나는 성공하고 하나는 실패합니다.
그러면 성공한 아이는 부모가 잘해서 그런 것인가? 또는 실패한 아이는 부모가 잘못해서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환경에서도 결과가 다릅니다. 그러면 그 아이의 유전형질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정론이나 인과론으로는 해석되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건강한 인격을 갖춘 아이로 성장합니다. 어떤 아이는 인격적 부모와 최고의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문제아이로 자라갑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걱정과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저렇게 해서 과연 평탄한 삶을 살 것인가 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아이를 키우면서 그럴 때가 많습니다. 지금 이러면 나중에 이러한 결과가 생길 텐데. 하면서 걱정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 부모님들이 걱정하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지금 저렇게 하면 나중에 이렇게 될 텐데 하는 걱정.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타고난 운명이 주관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유전형질이 삶을 결정시켜놓은 것도 아닙니다. 또는 인과론도 아니고, 또는 우연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인생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 주도권을 내가 잡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내어 드리느냐의 싸움입니다.
내가 잡을 때 초조하고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알기 때문입니다. 점점 자녀들이 부모의 품을 떠날 텐데 불안하죠. 나의 통제권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면 그 불안감이 더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자녀들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붙드십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부분들이 많죠. 그렇다고 내가 주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 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나를 향한 목적과 계획은 항상 선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주도권 안에 살아가는 것 보다 안전한 것은 없습니다.
미국으로 유학길을 떠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걱정이 되시겠습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자녀들을 돌보십니다. 우리 자녀들의 삶을 주님께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의 삶의 주권자이십니다.
시편 139:9–10
9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우리가 어디를 가건 무슨 일을 할지라도 그 곳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겨 드립시다. 우리의 자녀들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우리가 맡기지 않더라고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 삶이 자신 있고 담대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삶을 주관한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한계 이상으로 살아갈 수 없죠.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지혜와 능력을 초월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담대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아브라함의 삶에 개입하셔서 항상 선함의 결과를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도 그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실수도 많이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실하심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는 것이 얼마만큼 감사하고 평안한 길인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염려와 초조함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역사가 영어로 히스토리입니다. He는 하나님이죠. 하나님의 스토리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하나님께서 인류가운데 개입하셔서 펼쳐 가시는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그 속에 우리의 히스토리도 포함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주관하시는 그분의 역사임을 기억하시며 그분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복된 인생길 되시길 축원합니다.
어제 이 설교를 준비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떠오른 찬양이 있었습니다.
요게벳의 노래라는 찬양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아기 모세를 갈대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띄어보내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작은 갈대 상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네
어떤 맘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흘러
동그란 눈으로 엄마를 보고 있는
아이와 입을 맞추고
상자를 덮고 강가에 띄우며
간절히 기도했겠지
정처 없이 강물에 흔들 흔들
흘러 내려가는 그 상자를 보며
눈을 감아도 보이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주저 앉아 눈물을 흘렸겠지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를 이끄시는 주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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