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17. 기독교 신앙의 담대함
사도행전 4:13-22
13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볼
첫 번째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담대함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담대함의 이유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응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한 산헤드린 공회는 이제 판결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변호에 아무런 변론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주장에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주장은 이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걸인이 건강하게 된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된 일입니다.
그는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그 나사렛 출신 예수입니다. 너희가 죽였던 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고 부활하신 예수의 능력이 이 사람을 낳게 하였습니다.“
공회원들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사도행전 4:13–14
13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그 탁월한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어부 출신 베드로의 주장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왜 그들은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베드로의 말이 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걸인이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진실입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진실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진실입니다.
그 예수가 얼마 전 십자가에 죽은 나사렛 출신 예수입니다. 진실입니다.
그가 부활했고 살아계십니다. 진실입니다.
만일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공회는 당연히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예수의 부활을 반박하거나 그들의 말이 거짓임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예수가 실제로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를 묻었던 무덤이 비어있습니다. 2개월 전 예수는 죽었고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빈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의 시신을 찾으려는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훔쳐 갔을 거라고 추측하였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죽은 예수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고, 곳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전 제자들을 만났고, 또 일시에 오백여 형제에게 나타나신 일도 있었습니다. 부활의 증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반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예수의 부활이 공적재판에서 첫 번째로 인정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이후 역사가 흘러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예수의 부활을 부정하는 증거를 공식적으로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을 신앙의 차원에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예수가 실제로 부활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은 부활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의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는 실제로 살아나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만난 예수는 환영이 아닙니다. 실제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였습니다. 그 몸으로 부활하여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않고서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담대해질 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거짓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는 겸손해지고 진실해 지는 법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부활의 주님을 믿고 그 주님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판결
이제 그들은 판결을 내립니다. 먼저 베드로와 요한을 공회 밖으로 보낸 후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4:15–17
15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들을 위협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없습니다. 추측하기로는 예수의 이름을 계속해서 전파하면 심한 고문을 받고 결국 예수처럼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요한의 담대한 모습 속에는 우리가 첫 번째로 배우게 되는 것은, 진리를 소유하면 담대해 진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소유한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은 돈으로 권력으로 흔들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면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그들의 판결을 베드로와 요한은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욱 담대히 발언합니다.
사도행전 4:19–20
19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이것이 바로 진리를 소유한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은 담대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도 진리를 소유함으로 담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이고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믿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읽은 당시 산헤드린공회의 재판내용은 누가가 기록하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어떻게 베드로와 요한이 없는 상황에서 공회가 의논한 내용까지도 누가는 알고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공회원 중에는 예수의 시신을 장사한 니고데모가 있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3장에서 밤에 예수님께 찾아와 구원의 길을 물었던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기독교인을 핍박했던 바울도 공회의 회의 내용을 알만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만일 누가의 이 기록이 거짓이었다면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손에 들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는 당시의 재판에 앉은뱅이 걸인도 증인으로 참석하였고 그의 나이가 40세 라는 사실까지도 밝히고 있습니다(22절). 왜 굳이 그의 나이까지 밝히는가? 이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기독교는 역사적 사실과 진리위에 세워졌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담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믿는 기독교의 진리에 선포함에 있어 담대해야 합니다.
어제 설교준비를 하러 집근처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펼치는데 뒤에 앉은 여성분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여성분은 자신이 왜 교회에 다니는지를 앞에 앉은 친구에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는 자신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축복을 바라거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신앙의 순수성을 밝히고 나서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인즉, 기독교 신앙은 자신의 마음에 평안함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안에 이 여성분과 같은 분들이 상당수가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마음의 평안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이유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믿는 이유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는 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확실한 진실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오류가 없는 책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믿습니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만일 이러한 사건이 어느 순간 일어난 일이라면 믿음을 갖는 것이 당황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4천년전 구약성경에서부터 예언했던 일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졌습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이사야를 통해 미리 예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취되었습니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도 미리 시편을 통해 예언이 되었고 성취되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인류 역사 속에서 하나하나 성취되었습니다. 오늘날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예언을 합니다. 그들은 60%만 맞아도 잘 맞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정말 선지자라면 100%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구약 선지자들의 모든 예언들이 신약시대에 정확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100% 성취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 말씀이 진리라고 믿습니다.
모든 예언은 이미 다 성취되었고 한 가지만 남겨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예언이 다 성취되었기에 이 예언도 성취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역사 가운데 실제로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이고 승천하실 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모든 자들이 보는 가운데 재림 하실 것입니다.
베드로의 주장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가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판단하라는 것은 이성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성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을 무조건 반대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한번 판단해 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닙니다.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앙의 내용을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분석하고 비판해 보고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학이 발전하면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붕괴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의 주장들을 과학으로 밝힐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지식과 상충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부활입니다. 죽은지 삼일 된 사람이 살아날 수는 없습니다. 이미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에서 온전한 몸으로 살아난다는 것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학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인정한다면 모든 것은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에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였어도 기독교 진리는 여전히 든든히 서 있습니다.
과학의 법칙들은 새로운 법칙에 의해 부정되고 무너져도 기독교 진리만큼은 변함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객관적 증거와 역사적 사실 그리고 진리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두 번째 살펴볼 내용은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그 어떤 권력자들의 말 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적인 권위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듣고 참고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최종적인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삶의 어떠한 판단과 결정의 순간 여러분들은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니까?
두 극단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나치게 주변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는 사람들입니다.
삶의 소신이 없거나 결정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는 경우 그러합니다.
자신의 판단으로 선택한 결과가 좋지 못할 때 주변사람의 의견에 의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번째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는 경우입니다.
자신의 소신과 뜻이 세워져 있기에 주변인 들이 조언이나 충고를 하여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결정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나치게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지나치게 자신의 소신과 생각에 고착되어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의 소신이라는 것이 대부분 내가 배우고 경험한 것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내 생각이 옳은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내린 자율적 판단일지라도 그것의 근거는 내가 살아온 환경과 그 속에서 경험한 일들 그리고 내가 배운 것, 읽은 책, 들은 이야기 들이 종합되어 내 사고와 생각의 틀을 이룹니다.
일단 그 틀이 세워지면, 그 방향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이 ‘옳다’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결정과 그에 대한 책임이 수반됩니다.
이때 우리는 나보다 삶의 경험이나 지혜가 있는 분들의 조건과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최종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타협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100퍼센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의 생각과 뜻과는 다르고 그 결정이 나에게 손해가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청년부 부장을 하시던 장로님은 늘 교회 청년들이 세계선교의 꿈을 품고 열방으로 나가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길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명문대 졸업을 앞둔 자신의 아들이 선교사로 지원하자 깊은 고민에 빠지셨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결단이 필요합니다. 100퍼센트 순종의 결단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입니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 하나님은 꿈이나 환상 음성계시를 통해 자신의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신구약 66권이 완성된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정당한 방법은 성경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그 뿐의 뜻을 파악합니다.
성경을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우리 삶에 세세한 부분에 말씀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암에 걸렸을 때 항암치료를 해야 할지 자연요법을 해야할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중환자들에 계신 부모님에게 연명치료를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파악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이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며 원리가 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수학의 원리를 깨우친 학생이 응용문제를 풀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모든 답을 다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풀어가는 핵심적인 원리들을 성경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배우는 과정 속에서 성경적 사고와 원리가 여러분의 삶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삶에서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전혀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살다가 중요한 결정의 순간 그분의 뜻을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은 날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설교나 가르침을 통해 자주 접하게 되면 그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 갑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 갑니다. 그리고 성경은 역사적 사건 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이야기로 전해 줍니다. 이야기는 우리에게 교훈이 되고 삶의 원칙이 됩니다. 수많은 성경의 이야기들이 우리 현재의 삶에 세밀한 결정의 순간 기준이 되고 원칙이 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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