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19. 나눔의 공동체
사도행전 4:32-37
32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초기 기독교의 부흥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처음 기독교가 시작될 때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대교나 기독교나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이 예언한 메시아가 예수라고 믿었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믿는 자들을 중심으로 교회공동체가 시작됩니다.
이들은 처음 유대교의 이단분파로 인식되어 혹독한 핍박을 받습니다. 앞으로 등장하는 탁월한 유대인 바울은 초기성도들을 핍박했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초기성도들은 유대들에게는 이단으로 종교적 탄압을 받았고 로마로 부터는 황제숭배를 거절하여 심한 고문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폭발적으로 부흥하여 불과 약300년 만에 로마정부로부터 공인을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의 역사가 유럽 전역에 확산되어집니다.
교회가 가장 폭발적으로 부흥했던 시기가 바로 초대교회 때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혹독한 박해와 핍박 속에서 기독교는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학자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급진적인(레디컬한) 삶의 방식에서 이유를 찾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과연 그들이 어떠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그러했을까요?
첫 번째는 공유경제의 실천입니다.
32절에,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고 말합니다.
최근 들어 공유경제가 인기입니다. 한번 생산된 제품을 여럿이 공유해 쓰는 것입니다. 자동차, 빈방, 사무실 등 활용도가 떨어지는 물건이나 부동산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함으로서 사용을 극대화 하는 것입니다.
외국에 있는 한인 교회들이 현지인 교회 예배당을 공유해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에 사용하지 않는 학교의 강당을 빌려 예배드리는 것도 이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공유경제는 자원을 절약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함에 있어 탁월한 방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초대교회는 이미 공유경제를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공유경제는 어느 정도 값을 지불하고 함께 사용하지만 당시에는 서로의 값을 지불하지 않고 서로의 물건을 함께 공유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교회 안에 비곤한 성도들이 큰 혜택을 입었습니다.
저희 셋째가 태어나고 거의 산 것이 없습니다. 아기침대며 옷이며 필요한 물품들 대부분이 아기가 있는 성도들 가정에서 온 것입니다. 저희 것이 아니기에 잘 쓰고 돌려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만일 아기용품을 돈을 주고 샀다면 큰돈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지 않는 용품들이 공유됨으로 자원을 절약하고 공동체에 유익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분배적 정의의 실천입니다. 34절입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바로 공정과 정의입니다.
문재인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최근 한국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언급한 것입니다.
2014년에 발간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은 2백만 부 이상이 팔리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정의에 목말라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작년 말 수개월 동안 조국사태로 인해 사회전반이 몸살을 알았던 것도 공정에 대한 문제가 제기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에 우리가 예민한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기회가 평등하지 않았고, 과정이 공정하지 않았으며, 결과가 정의롭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정의의 개념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교정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입니다. 교정적 정의는 잘못이 있을 때는 공정하게 처벌하고 피해가 발생했을 때는 합당하게 배상하여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판의 과정을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법에 근거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과정으로 정의를 실현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가 할 때 교정적 정의가 바르게 시행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배적 정의는 각자에게 자신의 정당한 몫을 누릴 수 있게 하고,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분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이 바로 분배적 정의에 대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 사회가 각자에게 정당한 몫을 누릴 수 있게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과연 자신들의 몫을 누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껏 동안 그 어떤 국가도 그 어떤 정부도 분배적 정의를 실현해 본 적이 없습니다.
각자에게 정당한 몫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역사 가운데 시도된 적은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그것입니다. 사유재산을 철패하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사회제도를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빈부의 차이를 없애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소련, 중국, 북한만 보더라도 공산주의가 불가능한 이상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이 얼마만큼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존재인가를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가 결국 실패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초기 기독교가 공산주의였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공유재산을 실천함으로 빈부의 차이를 없앴으니 공산주의 아니냐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사유재산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만일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전 재산을 공유했다면 10계명에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통해 각 가정이 사적인 재산을 소유하는 것과 그것을 도둑질하는 것에 대하여 금지하였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탁월성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인간이 어떤 존재라고 말합니까?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어떤 일부분만 부패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부패한 것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이기적입니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은 그것을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한다고 하여도 이기적인 동기에서 출발하여 이기적 욕망을 채우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누가 열심히 근면 성실하게 일하겠습니까? 이기적 인간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만 움직이는 것이 인간입니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말은 좋지만 실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시도해 볼 수 는 있겠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도들이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여 공유했다는 것은 모든 재산을 다 내놓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집이 여러 채 있는 사람이 그 중에 몇 채를 정리하여 헌금한 것입니다. 자신의 돈 전부를 헌금한 것이 아니라 그 중에 일부를 헌금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와 그들로 하여금 부족함이 없도록 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분배적 정의를 실현한 것입니다. 부한 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내놓음으로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채웠던 것입니다.
그 어떤 국가나 정부도 실패한 분배적 정의를 교회가 실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공유경제와 분배적 정의라는 그 어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었던 이러한 모습은 과연 어떻게 실현된 것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가진 신앙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32절에 보시면,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여러분, 부부도 한 마음과 한 뜻이 되기 어렵지 않습니까? 각자 서로가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릅니다. 그렇게 20,30년을 살았던 부부가 마음을 합치는 것이 힘들죠. 하물며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부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많이 배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외향적인 사람과 내향적인 사람, 보수적인 사람과 진보적인 사람 등. 그 모든 다양성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것은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각 지체를 이룬 유기체와 같습니다.
로마서 12:5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고린도전서 12:27
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에베소서 5:30
30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이것이 초기 성도들이 가졌던 신앙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각 지체를 이룬 한 몸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한 마음과 한 뜻이라는 것은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뜻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처음 서로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이내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대하기 시작합니다. 가난한 자들이 부한 자들과 함께 한 상에서 먹습니다. 종과 주인이 함께 성찬에 참여합니다. 서로를 향하여 형제와 자매로 부르며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모입니다. 이것은 당시로는 충격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계급과 계층이 나뉜 사회에서 그것을 뛰어넘어 한 형제와 자매로 모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급진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지금, 서로를 바라볼 때 외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직위나 학벌 재산정도가 중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가 주인이던 종이던 권력자이던 평시민이든 부자이건 빈곤하건 상관이 없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나 나나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식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부요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보이는 것이죠.
그러니 부러운 것이 아니라 불쌍한 것입니다. 아무리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가 내 인생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권자임을 인정하니 그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처럼, 사람의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중심인 영혼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다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존재로 인식된 것입니다.
이러한 평등적 인식 속에서 성도를 형제와 자매로 인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생각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자원들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를 생각했겠죠. 왜 동일한 죄인인데 나는 부요하고 저 사람은 가난할까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자신의 소유가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룬 것이 아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대부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좋은 교육과 뛰어난 머리로 사회적 신분이 상승했을 때에라도 그것 또한 자신의 것이라고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 또한 자신의 것이라기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간혹 연예인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돌의 경우 한 번 뜨게 되면 몇 억 몇 십억 버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근로자가 평생 일해서 버는 돈을 1,2년 만에 벌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노력해서 그러한 부를 축적한 것입니까? 어느 정도 노력도 있겠죠. 그러나 타고난 끼와 재능 때문입니다. 그들이 조선시대 태어났으면 광대 아닙니까? 광대가 잘 살았나요? 시대를 잘 타고난 것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이 결국 부를 이룬 것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이룬 부를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믿었습니다. 자신이 발휘한 노력이라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재산을 자신만의 것으로 주장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인식 속에서 형제자매의 가난을 바라보면서 마땅히 자신의 재산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없으면 이기적 존재가 결코 이타적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성도를 나의 형제와 자매로 인식하는 것,
그리고 내가 가진 부를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닌 은혜로 인식하는 것,
여기서부터 나눔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나눔의 이유가 바로 은혜 때문입니다.
33절에 보면,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은혜를 받아야만 나눔이 실천됩니다. 나눔을 캠페인하고 강요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나눕니다.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결코 나눌 수 없지요. 어떻게 벌은 돈인데 라고 생각하면 아까워서 나누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가 등장합니다. 그는 여리고의 세무 소장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부당하고 과하게 세금을 부과하고 그 돈을 로마정부에 상납하여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창기와 함께 죄인의 대명사로 여겨졌습니다.
그랬던 그가 변화됩니다.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말합니다.
이기적 욕심과 탐욕에 노예였던 그가 이렇게 변화된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시킨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돌 무화과 나무위에 올라가 있는 그에게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고 그의 집에 가셔서 함께 음식을 드시고 담소를 나누신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변화된 것입니다.
그것은 삭개오과 예수님을 통해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만나신 것이 은혜이고 그의 집에 들어간 것이 은혜이며 그를 친구로 받아들이신 것이 은혜입니다. 삭개오는 이웃을 착취하여 부와 권력을 얻은 것을 알고 있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음을 자각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러운 죄임임을 알았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변화될 수 없었던 그가, 예수의 방문으로 은혜를 체험하였고 이것이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탐욕의 종으로 살던 그가 자유자가 된 것입니다. 물질의 욕망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그 변화에는 예수님으로 인해 받은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를 체험하지 않으면 결코 나눔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간혹 큰 물질을 헌금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은혜를 체험한 것입니다. 형제자매의 어려움을 보시면서 지정헌금으로 드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어려움이 내 아픔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은혜만이 탐욕적인 인간을 이타적인 인간으로 변화시킵니다. 교육으로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탐욕적이 되갑니다. 기회는 평등하지 않고, 과정은 공정하지 않으며, 결과는 정의롭지 못합니다. 그 어떤 정부도 법과 제도를 탁월하게 세팅한다고 할지라도 탐욕적 인간이 탐욕을 버리지 않는 이상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처음부터 세상이 보여주지 못했던 나눔을 실천함으로 세상에 충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가진 자는 자신의 부를 기꺼이 나눔으로 가난 한 자들의 필요를 채웠던 것입니다. 자신의 재능과 노력일지라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여겨 마땅히 자신의 물질로 공동체의 필요를 채웠던 것입니다.
가난 한 자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원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일을 소명으로 받아들여 열심을 다했습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노동의 가치를 중요히 여겼으며 그 어떤 일이라고 할지라도 천대하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의 귀천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소명감 없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최선을 다해 노예로서의 일을 감당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나님의 부름의 소명으로 여기고 만족했으며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결국 성도들을 한마음과 한뜻으로 묶었으며 그곳에서 기쁨으로 물질을 드림으로 서로의 필요를 채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세상에 충격을 주었고 많은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복음에 힘을 싫어주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날마다 구원받는 자들이 많아지는 폭발적인 교회성장을 이룬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교회를 통해 실현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가 나눔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고 형제자매를 끌어안는 사랑의 모습 속에서 부흥하는 교회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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