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06-30 09:13

20.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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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20.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

 

사도행전 5:1–11 

1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오늘 본문의 사건은 해석하기 어려운 성경의 내용중에 하나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신의 소유를 팔아 그 중에 얼마를 감추고 헌금 드렸다가 결국 죽게 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은 먼저, 초대교회 가운데 일어난 은혜의 역사를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난 시간 살펴본 것처럼, 공유경제와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것이라 하지 않고 교회 안에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던 것입니다. 집이 여러 채 있던 성도는 그 중에 얼마를 정리하여 헌금하였고 땅이 많았던 성도들은 그 중에 얼마를 정리하여 사도들의 발 앞에 내 놓았습니다. 이를 통하여 교회 안에 빈곤한 자들의 필요를 채움으로 가난한 자들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주께서 구원 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행2:47)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모습과 대조되는 사건이 본문입니다. 

 

시간을 돌이켜 당시 예루살렘 교회를 그려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로 마가에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에게 방언이 임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곳곳을 다니며 방언으로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오순절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모국어로 복음을 전달받고 회개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루에 3천명이 회개했으니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선천성 앉은뱅이 걸인을 치유한 사건 또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한 이후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나 5천명까지 성도의 수가 증가합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여 예배하기를 힘썼고 또한 집에서 모여 예배와 교제 그리고 성찬을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던 것입니다.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형제자매가 되었으니 서로의 필요와 어려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실제적인 나눔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모범적이었던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성경은 특별히 그의 선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장 36-37절입니다. 

사도행전 4:36–37 

36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바나바의 원래 이름은 요셉입니다. 그를 위로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바나바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복음증거에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하고 그를 선교사로 헌신 할 수 있도록 뒤에서 섬겼던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그는 구브로 출신으로 레위족이라고 소개합니다. 그가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하죠. 아마도 자신의 고향땅인 구브로에 있는 땅일 것입니다. 성경에 소개될 정도라면 상당한 액수를 헌금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바나나와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부부는 무엇 때문에 자신의 땅을 팔았을까요? 

그것은 당시 초대교회 안에 이루어지는 나눔의 모습 속에서 일종의 부담을 느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대부분의 부유한 사람들은 기꺼이 자발적으로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이들도 얼마의 땅을 팔 만큼 살림살이가 넉넉했던 것입니다. 

 

바나바의 아름다운 헌신이 이들 부부에게 감동과 도전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일로 바나바는 사도들과 많은 성도들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의 헌신이 교회담장을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 되었을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의논을 했겠지요. 우리도 무언가 교회를 위해 헌신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결국 땅을 팔게 된 것입니다. 막상 땅을 팔아 돈을 쥐게 된 그들은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견물생심이라고 사람 수중에 돈이 들어오면 처음 가졌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땅을 판값의 일부를 감추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인 아나니아가 먼저 이 돈을 사도들께로 가져간 것입니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이것이 땅 판 값의 전부입니까?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3절입니다.  

사도행전 5:3–4 

3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가 죽을 만큼 잘못한 일이 무엇입니까? 

땅을 판 것도 그 중에 얼마를 자신의 소유로 한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이 또한 칭찬받을 만한 일이죠. 베드로도 이것을 인정합니다. 

4절에 보면 이 땅이 너희 것이기 때문에 너희가 어떻게 하든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헌금을 하던 하지 않던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은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속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한 거짓말 한 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이기에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거짓말에 대하여 쉽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짓말을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로 봅니다. 

예를 들어, 여리고성 전투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 패합니다. 그 이유는 아간이라는 자가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고 전리품을 훔쳤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간과 그 가족이 아골 골짜기에서 돌로 처형되고 맙니다.

 

전리품을 훔치는 것이 돌에 맞아 죽을 만큼 큰 죄일까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까지 냉혹하실 수 있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거짓말 하는 자가 언급됩니다. 

<요한계시록 21:8> 

8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거짓말 하는 자가 살인자 우상숭배자와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7> 

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요한계시록 22:15> 

15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십계명에도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거짓말을 중요한 죄로 언급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사람에게 한 것일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무시하게 될 때,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을 때, 그분이 실제 우리 삶에 주관하시는 것을 무시할 때, 우리는 쉽게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공의로우셔서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움에 대한 균형 있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하고 공의로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의 공의로움만을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을 무서워만 하고 친밀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두 가지의 균형 있는 신앙이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경외하며 또한 그분 앞에 친밀하게 나가게 합니다.

 

어제 희수가 저에게 혼이 났습니다. 식사 후에 수박을 먹다가 혼 난 것입니다. 수박을 잘라 나누어 먹던 중에 몇 개 남지 않으니 마음이 급했던 것입니다. 다섯 조각이 남았는데 자기 자리에다가 3개를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빼었더니 다시 자기 자리로 되가져가는 것입니다. 그 순간 제가 화가 났고 이후 즐거웠던 간식 타임이 끝나버렸습니다.    

 

제가 화가 났던 부분은 이것입니다.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 때문입니다. 지난 주 몇 번 이런 일들이 있어서 안 그래도 벼르고 있었던 참에 수박사건이 계기가 된 것입니다. 

 

자녀들이 아버지의 권위를 타고 넘으려 할 때 그것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깨버리는 행위입니다. 저의 훈계가 자녀에게 더 이상 영향을 주지 못하게 될 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자녀들이 아버지를 무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에서 보여준 죄의 근본뿌리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으라 그러나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에덴의 모든 축복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 속에서 만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존중하고 금하신 것을 순종하여 지킬 때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듣지 않을 때 그 관계는 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깬 것이 아니라 아담이 깨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결국 더 이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맘과 뜻대로 살겠다는 의지적 행동이었습니다. 

 

희수가 끝까지 자신이 수박을 챙기겠다고 우긴 것은 그것이 설사 장난이라고 할지라도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저를 화나게 한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자신의 땅을 판 값을 속여 드렸습니다. 

그들이 사도들 앞에서 이것이 전부라고 거짓말을 할 때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무시한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이미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을 뿐입니다. 단지 이 사건 하나로 그들이 심판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들의 삶은 계속해서 거짓말을 해왔을 것이고 하나님을 의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간혹 교회 안에서 헌금횡령이나 성적부도덕의 문제가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해왔던 일들이 드러나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드러났을 때는 이미 양심이 화인 맞은 상태에서 드러났기 때문에 결코 회개하거나 뉘우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 돈을 횡령했을 때는 이래도 되나 양심에 가책을 느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한번 두 번 하면서 양심이 무뎌진 것이죠. 그러나 결국 어떤 계시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간혹 뉴스에 등장하는 유명인들의 성폭력이나 횡령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한번으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래전부터 해왔던 것이 결국 들통 나게 된 경우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님을 무시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바나바의 헌신을 보면서 자신들도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 받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을 드리며 기도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또한 나름 헌금생활도 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여 드린 자발적 경배와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의식한 형식적인 종교행위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삶은 비단 교회 내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서도 순종되어야 할 자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코람데오의 정신을 강조하였습니다. 코람데오는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입니다.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살 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정직하고 신실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윤리의 수준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가 여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 행동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어떻게 보실까? 내가 행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떤 판단을 하실까 하는 것이 기준입니다. 

 

저는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서 후회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하나님 앞에서 행한 부끄러운 일들입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잘못한 일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행동의 결과만을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동기를 아십니다. 

사람은 성과와 결과를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동기와 진행과정 그리고 결과를 종합적으로 판단하십니다. 

그 일의 성과와 결과가 아무리 좋더라도 동기가 잘못되면 하나님 앞에서는 잘못한 것입니다. 

그 과정 가운데 불법이 있었다면 잘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입니다. 

 

교회건축이라는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진다고 하여도 그 과정 가운데 서류가 조작되고 불법으로 증축 되어 진다면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무시한 것입니다.

경쟁적인 전도행사에서 아무리 선한 의도로 길거리 노숙자에게 돈을 주고 예배를 참석하게 했을 때, 그것은 결과적으로 노숙자를 예배에 참석하게 했을지는 모르지만, 돈을 주고 참석하게 함으로 예배의 거룩성과 순수성을 해치는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음식 장사하는 성도가 아무리 음식을 맛있게 만든다고 하여도 유통기한이 지난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은 것입니다. 

영업사원이 회사의 물건을 팔기위해 과장광고를 하여 성과를 낸다고 할지라도 또 그것으로 큰돈을 벌어 헌금을 드릴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의 동기와 과정과 결과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초대교회라는 독특한 환경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입니다. 이 일로 하나님은 자신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시며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었습니다. 이 두려움은무서움이 아니라 경외심을 말합니다.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부모가 권위를 가지고 훈계와 징계를 적절하게 내릴 때 아이들은 부모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신뢰하고 존경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 하시며 그 심판은 공의롭고 정의롭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시며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세상의 죄악에 대하여 인내하고 참고 있다고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심판은 유보되고 연기되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행하는 모든 일의 동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진행되는 과정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떠할지라도 감사함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의 역사가 임한 시기였습니다.

은혜가 강하게 임했지만 동시에 심판도 강하게 임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심판하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살아계십니다. 

사회의 거짓과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는다고 심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유보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참고 인내하십니다. 그리고 그 죄악의 과격함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임할 것입니다. 

 

전에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 라는 육아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문제아동의 가정을 진단하고 처방하여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자상한 부모는 늘 아이의 친구가 되어주길 원했습니다. 늘 좋은 아빠 좋은 엄마로 아이의 눈높이 맞추어 살았습니다. 아이의 문제행동은 버릇이 없고 고집스런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친구가 되어싶어하던 부모에게 오은형씨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아이들에게는 친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모가 필요하다고. 눈높이를 맞추어 주는 친구가 아닌 권위자라로서 아이의 삶을 지도하고 교육해야할 부모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자상한 위로자로,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친구로 여기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친구로서의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을 지니신 강력한 귄위를 지니신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 하나님 앞에 설 때 참된 경건과 순종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친밀한 아버지로 다가오실 때가 있지만, 그 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인식하며 살아가신 다면 오늘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 대답은 여러분 각자가 삶의 자리에서 보여주는 그 모습을 통해 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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