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15.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사도행전 4:1-12
1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바른 복음은 언제나 저항을 받아 왔습니다.
성전에서 선포한 베드로의 설교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저항에 부딪히게 됩니다.
결국 붙잡히게 되고 심문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의 복음 선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1-3절에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 1-2절에 보면,
1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성전 맡은 자는 성전의 치안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두개인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누구인가? 이들은 상류층 귀족들과 유능한 엘리트들로 구성된 작은 그룹으로 출발했습니다. 대부분 제사장 계통의 사람입니다. 당시에 유대의 최고 권력기구는 산헤드린이었는데, 산헤드린은 고위급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서기관들)과 일부 평신도 들 총71명으로 구성된 모임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이 모임을 장악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일 보다는 정치적인 일을 좋아했습니다. 로마의 집권 세력과 긴밀하게 결탁해 있었고 따라서 대부분 부유했습니다.
이들은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였고, 나머지 성경은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영감 있는 말씀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세를 거부하고 오로지 현세를 중시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을 때 육체와 영혼이 함께 소멸해 버린다고 믿었습니다. 사후 세계나 죽은 자의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오경에 이러한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베드로가 선포한 복음을 싫어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종교권력이 복음을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음은 복된 소식 아닙니까?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아 하나의 자녀가 된다는 것처럼 복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왜 싫어할까요?
그것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앙과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제사장의 경우, 자신들의 메시아가 그렇게 볼품없는 모습일 것이라고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 왕처럼 힘과 권위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킬 메시야를 기대했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사고의 틀 속에 생각한 메시야, 그리스도와 예수가 틀려도 너무 틀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과 자신의 생각이 충돌할 때가 있죠. 당연히 복음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의 틀림과 오류를 인정하고 내려놓고 복음을 받아 들여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싫어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고집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말씀과 여러분들의 생각과 충돌할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말씀을 수용하십니까? 아니면 말씀을 싫어하십니까?
말씀 앞에 내 생각을 내려놓습니까? 아니면 끝까지 내 생각을 주장하십니까?
이들은 복음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가둡니다.
적법한 심문의 과정 없이 속전속결로 구속해 버린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이들이 굉장히 감정적인 상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일단 붙잡아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왜 이렇게 까지 할까요? 베드로와 요한이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상해하거나 불법을 주도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권력은 이들을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싫어하는 이유
왜 그럴까요?
이것이 오늘 우리가 나누게 될 중요한 주제입니다.
왜 당시 종교권력은 복음을 싫어하고 가두려고 했는가?
죄인의 특성 중에 하나는, 자신의 죄를 정확하게 폭로하는 자를 참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가운데 있는 죄악 세상 가운데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이 어둠 가운데 비추자 어둠이 그 빛을 참지 못한 것입니다. 죄인들이 빛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빛을 꺼버린 것입니다. 예수의 빛은 자신들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죄의 더러움을 들추어내었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비참하게 처형된 것입니까? 누가 예수를 십자가로 몰았습니까?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은 당시 종교권력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프레임을 짜고 여론을 형성하여 결국 십자가로 몰아간 것은 종교권력이었습니다. 여기에 민중들이 휘둘린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종교권력자들을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3장에는 “화 있을진저”하시면 당시 종교권력자들을 향해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다 잃지는 않고 몇 구절만 보시면,
<마태복음 23:13–15>
1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없음)
15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33–34>
33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놀라운 이적을 일으키시면 다 믿을 것 같지 않습니까?
죄인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비록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이적을 행한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죄를 폭로한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사가 등장합니다. 이후 종교권력의 반응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1:47–48
47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요한복음 11:53
53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렇죠? 그리고 이제 예수를 죽인 종교권력이 이제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은 것입니다.
적법하고 정당한 절차 없이 무조건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죄인의 특성은 자신의 죄가 지적당하여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때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죽이는 방식으로 끝까지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목격하기도 하고 또 우리가 그런 일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회사의 부정부패나 비리를 외부에 알려 공공의 안전과 권익을 지키는 자들을 내부고발자라고 합니다. 공무원들의 각종 비리, 정경유착의 현장,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 공공 의료기관들의 부도덕성, 환경·식품의 유통과 제조에 관련된 반사회적 행위 등이 이런 고발대상이 됩니다. 많은 경우 내부고발자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게 되거나 부당한 징계를 받기도 하고 왕따를 당하기도 합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들은 공익을 위해서 정의롭게 행동한 자들 아닙니까?
죄인들은 자신의 어둠을 감추기 위해 빛으로 행동하는 자들을 죽이는 방식으로 살아남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동생 아우를 들로 끌고나가 돌로 쳐 죽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왜 죽인 것입니까? 아벨이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자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반면 아벨과 아벨의 제사를 받으십니다. 제사를 받고 안 받고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가인이 잘 준비하여 다음에 받으실 만한 제사를 드리면 되는 것이죠.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께 분노합니다. 그 죽일듯한 분노를 하나님께 풀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죠. 그러니 동생에게 푼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죽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4:4–8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아벨의 깨끗함이 가인의 더러움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것을 가인은 참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죄성이 본성적으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회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잖아요. 죽어가는 분에게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았던 죄에 대하여 인정 하냐고 물으니까 고개를 막 흔드는 것입니다. 죽어 가면서도 자신의 죄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지혜의 말로 복음을 깨닫거나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만이 자신의 죄의 비참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오게 됩니다.
세례를 줄 때 목사가 첫 번째로 묻는 것이 이것입니다 .
“그대들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알며 당연히 그의 진노를 받을만하고 그의 크신 자비하심에서 구원 얻을 것 밖에 소망이 없는 자인 줄 아느뇨?”
간혹 구원의 확신 때문에 흔들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도 계시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과연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가실 확신이 있습니까?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만일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비참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십자가 밑에서 통회의 눈물을 흘리신 적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한 증거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 한 것이기 때문에 회개하셨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론을 공부해 보면 교리에서 회개가 소명 중생 다음에 나옵니다. 구원의 서정이라 고 하는데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구원을 베푸시는 과정을 설명한 내용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회개하고 나서 부르심(소명)도 받고 중생도 하고 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먼저 소명이 나오고 그 다음에 중생이 그리고 나서 회개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회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중생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회개의 경험이 있으시다면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간다고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오래하셨지만 회개의 경험이 없으신 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간혹 그런 분들 계세요. 대게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중단하신 분들입니다.
지금은 안 나가지만 때가 되면 열심히 신앙생활 하겠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여러분이 때를 결정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언제 어떻게 닥칠지 알지 못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 나간다는 것은 내 인생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교만입니다.
죽음은 대구 지하철 화재사건처럼 찾아오고, 세월호 처럼 임합니다.
고린도후서 6:2
2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복음은 설득이 아니라 선포
두 번째, 살펴볼 내용은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선포하는 모습입니다. 당당하고 담대합니다. 진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리는 자신있고 담대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국회와 같은 곳이 당시 산혜드린 공회였습니다. 5절과 6절이 공회의 구성원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고 심문과정 중에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이 이것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나”
권위와 자격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진리를 선포하는 자들에게 중요한 두 가지 요건이 권위와 자격입니다. 전에 제가 아프면 민간요법 찾아가지 말고 의사를 찾아가야 된다고 하면서 권위와 자격에 대한 문제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설교를 하고 있고 여러분들이 듣고 있는 이유는 권위와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 이렇게 물어볼 것입니다. 당신은 무슨 권위와 자격으로 설교를 하십니까?
신앙의 진리에 대하여 선포하려면 권위와 자격이 있어야 하고 이것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적 권위로부터 주어집니다.
어떤 분은 스스로 자기를 장로하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스스로 자기를 선교사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자기가 교회에서 장로의 일을 하고 또 선교사의 일을 하기에 그렇게 자신을 규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장로임직을 받으셨습니까? 자격과 권위를 확인하는 것이죠. 어느 선교회에서 선교사로 임명받으셨습니까? 이 또한 자격과 권위를 묻는 것입니다.
산헤드린공회는 당시 최고의 권력기구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누구로부터 권위를 부어받았는지, 그리고 그 권위를 허락한 사람이 누군 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그런 형식적인 질문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앉은뱅이 걸인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즉 어떻게 이 사람이 구원을 받은 것인가? 라는 것이라고 질문의 핵심을 바로잡습니다.
<사도행전 4:9>
9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그리고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사도행전 4:10>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와 요한은 그 어떤 권력에도 주눅 들거나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여러분, 복음은 선포입니다. 설득이 아닙니다.
우리의 말과 지혜로 상대방을 설복시키는 것이 복음을 증거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믿고 있는 바를 선포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사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은 사실입니다. 그것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것에 대한 반응과 선택은 상대방의 몫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담대하여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말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지금도 여전히 죽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먼저, 복음을 확실하게 알고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회가 있을 때에 바르고 분명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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