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16. 버린 돌과 머릿 돌
사도행전 4:8-12
8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지난 시간에 이어 베드로가 공회 앞에서 선포하는 설교의 내용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유대민족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공회는 사두개인들이 독점한 제사장들 24명, 바리새인들이 주류를 이룬 서기관들 22명, 그리고 장로 24명 합하여 70명과 의장인 대제사장까지 총71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5절에는 그 중 대표적인 사람들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 가아바,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제사장의 문중”입니다.
누구든 이 공회 앞에 서면 그 엄격한 분위기에 앞도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와 요한은 주저함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얼마 전 있었던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언급하면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논의와 계획은 이 공회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 이후에 본격적인 체포 작전이 은밀하게 진행되었고, 무장한 군인들에 붙잡혀 심문을 받고 고문을 당한 후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죽인 장본인들에게 너희가 죽인 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 예수는 살아나셨고 그 권능으로 앉은뱅이가 건강하게 되었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한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오늘은 베드로의 이 선포가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말은 건축에서 나온 격언입니다. 쓸모없는 돌로 여겨진 것이 아주 중요한 자리에 놓였다는 의미입니다.
건축자는 돌을 보는 전문가들입니다. 이들은 온갖 돌의 가치를 압니다. 이들은 돌의 모양, 결, 강도를 전문적으로 알기 때문에, 이들의 판단은 거의 틀릴 수 없습니다. 이들은 못 쓰는 돌과 귀한 돌을 구별하는데 숙련된 전문가들입니다. 이들이 버린 돌이면 사실 쓸모없는 돌입니다.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향하여 너희 건축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전문가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 건축가들과 같았습니다. 구약성경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소수의 특권층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민족의 대표들로서 의회를 통해 논의하고 결정하는 것은 대부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민중들은 공회의 판단을 하나님의 뜻으로 존중하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보면서 내린 결론은 신성모독자요 반란주동자였습니다. 이것은 건축자 즉,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 전문가들의 의견이기에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버린 돌로 취급하였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감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예수가 실은 모퉁이의 머릿돌이라고 말합니다.
머릿돌이 무엇입니까?
건물의 초석으로 건물의 기초를 하나로 묵어 주는 큰 돌이었습니다. 이 돌은 두 방향으로 물리게 되며, 양쪽에서 오는 압력을 받습니다. 이 돌이 빠지면, 모든 건물이 내려앉습니다.
예수가 바로 머릿돌로서 하나님 나라의 초석 성전의 근간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말처럼 예수와 그들과의 연관성을 잘 설명해 주는 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쉽게 이 말씀을 읽어나갑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사람들이 예수를 버린 돌처럼 무가치하게 취급했지만 그분이 진정한 모퉁이 돌이로서 귀한 분이시구나” 하는 정도에서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이 말을 했을 때는 그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그들은 이전에 있었던 사건을 기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약 두 달 전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이 처음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 것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일으키신 난동(그들의 표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는 성전에 들어와 당시 매매하는 자를 내쫒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전청결 사건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곳에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소식이 공회원들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마가복음 11:18
18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한편에서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을 때었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성전에 거닐고 계셨습니다. 이때에 공회에서 파견된 대표들이 예수를 만나러 갑니다.
그들은 예수를 향하여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으냐”고 묻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 부터냐 사람으로 부터냐 고 되물음으로 그들과의 대립과 논쟁을 피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한 비유를 하십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입니다.
마가복음 12:1–12
1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공회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12절에 예수께서 이 비유를 하실 때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알았다고 기록합니다.
무엇을 알았는가?
이 비유에 등장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은 선지자들입니다. 그리고 최후에 보낸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농부는 당시 공회원들을 비롯한 종교권력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핍박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심히 때립니다. 다음에는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합니다. 마침내 주인의 아들을 죽입니다. 그 강도가 점점 파괴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여 어떻게 대했습니까?
8절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포도원 밖에 던졌다는 것은 가장 치욕적인 상태, 저주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 비유대로 당시 종교권력은 예수를 죽였고 성문밖에 내 던졌던 것입니다.
이 비유 끝에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마가복음 12:10–11
“10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왜 갑자기 엉뚱하게 버림받은 돌에 대하여 말씀하실까요? 히브리어에서 “돌(eben)”은 “아들(haben)”과 거의 소리가 같습니다. 구약과 당시 랍비 문언에는 이스라엘 후손들이 “돌들”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자손들의 이름을 돌들에 새긴 것에서 유래됩니다.
이런 배경에서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버려진 돌”이 “버려진 아들”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포도원 밖에 버려진 아들과 버려진 돌은 그래서 같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 버려진 돌, 즉 버려진 아들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118편 22-23절의 다윗의 시를 인용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다윗은 버림받은 돌이었지만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모퉁이 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기이하신 은혜를 체험하고 이 시편을 작성했던 것이죠.
예수님은 이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당시 유대지도자들과 종교권력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불과 며칠 후 이들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대로 된 것입니다.
결국 유대지도자들과 종교권력자들은 악한 농부였던 것입니다. 주인이 보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능욕했고 마침내 주인의 아들 즉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예수는 포도원 밖에 버려진 주인의 아들처럼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는 철저하게 건축자들에 의해 버려진 돌, 버려진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불과 두 달이 채 안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 처형으로 몰고 갔던 공회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건축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버렸고 죽였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비유가 아직도 생생하게 귓가에 맴돌고 있을 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때에 하셨던 그 말씀을 다시 꺼내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비유를 정확하게 해석하여 전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버린 그 돌이, 그 아들이 바로 예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분이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론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4:12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밖에는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유일한 구원자,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는 오직 예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를 믿는 것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받았을 충격이 어떠했겠습니까?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베드로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 전에 베드로는 두려움에 자주 빠졌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붙잡히셨을 때, 소녀 앞에서 예수를 저주하고 도망쳤던 자입니다. 그런 그가 담대함과 용기로 가득 차 예수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후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는 공회원들 앞에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말할 정도로 담대해 졌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라는 그 압도적인 권위와 분위기에 눌리지 않고, 담대하고 당당하게 그는 예수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바로 예수의 부활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버려진 돌 예수가 모퉁이 돌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모퉁이 돌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 돌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모퉁이 돌은 건물이 초석이고 중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초석이며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모퉁이 돌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후 그의 삶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그의 서신서에 발견됩니다.
베드로전서 2:4–9
4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살아있는 돌이라고 말합니다. 돌은 무생물입니다. 그런데 살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당시 대부분의 우상들은 돌로 새겨 만들었습니다. 우상은 죽은 돌입니다. 죽은 신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산돌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보배로운 산돌입니다.
남녀가 결혼할 때 보석을 주고받습니다. 세심하게 선택한 보배로운 돌입니다. 이것은 부부의 연합을 이루는 상징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신랑으로 오십니다. 그분은 보배롭고 존귀한 분으로 우리와 연합하십니다. 더럽고 추악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우리도 존귀한 자들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가 어떻게 됩니까?
9절입니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 된 것입니다.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우리가 이렇게 존귀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의 인생에 모퉁이 돌이 되었습니다. 이후 베드로는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전도자가 됩니다. 터툴리안은 베드로가 로마에서 아마 주후64년경에 순교했다고 합니다. 오리겐은 그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주님과 같은 방식으로 죽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들은 예수를 인생의 모퉁이 돌로 받아들이셨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인생의 초석이며 중심에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을 지탱하고 움직이고 결정하게 만드는 근원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건축자들, 전문가들이 말하는 모퉁이 돌은 모두 흔들리고 무너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하나둘 우리 곁을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내 삶을 지탱해 주는 사업이나 직장도 언젠가는 내려놓을 때가옵니다.
나의 건강도 점점 무너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흔들리고 변하는 것을 내 삶의 모퉁이 돌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이러한 것을 삶의 모퉁이 돌로 삼았다면, 그 변화되는 것에 의해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요동치고 흔들릴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반석이신 예수를 모퉁이 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삶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동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 나의 반석시오, 산성이시오, 나의 구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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