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 기독교는 기록된 말씀위에 세워졌습니다
사도행전 1:1–3
1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행전 강해 두 번째 시간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쓴 첫 번째 책인 누가복음과의 연관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정부의 고위관리인 데오빌로에게 기독교를 설명하면서 먼저는 예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에 주목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기독교는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을 기반으로 하여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이러한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을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했다는 부분입니다.
첫 번째로 살펴볼 것은 기독교는 기록된 성경위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2절 마지막에 보면 “기록하였노라”고 말하고 있죠. 누가가 누가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행함과 가르심을 기록했다는 내용입니다.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헌정하기 위해 누가복음을 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시 누가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당시 막 태동된 교회의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록이 다 성경으로 인정된 것은 아닙니다. 오직 사도성이 인정된 책들만을 정경으로 인정했습니다.
누가복음 1:1–2 (NKRV)
1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에 대하여 기록한 사람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이에 해당합니다. 마태복음은 마태가 쓴 복음입니다. 마가복음은 마가가 쓴 복음입니다. 이들 외에도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떠돌아다니는 복음서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유다복음일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이단들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는 성경을 확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정경화과정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계속되는 회의를 거쳐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최종27권의 신약성경을 정경으로 확정하였고 오늘날 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
당시 신양성경이 정경으로 인정되는데 적용된 기준은 (1)사도성의 문제- 저자가 사도 혹은 사도적 수준에 있는 사람인가? (2)영감성의 문제 –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그 내용이 영적인 성격을 지녔는가? 이 기준에 의해 외경이나 위경이 정경에서 제외되었습니다. (3)보편성의 문제 – 교회나 교부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인정되고 있는가? 이 기준에 의해 수많은 위작들이 제외되었습니다.
첫 번째 기준이 사도성이었는데 그렇다면 사도성이 무엇인가?
사도는 예수님의 12제자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하면서 12제자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6:12–13
12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열두 명이 아니라 더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열두명만을 사도로 택하신 것입니다.
왜 열두 명으로 한정하셨을까? 그것은 구약의 12지파가 구약 성도들의 총수를 상징하는 것처럼 열두사도는 신약성도들 전체를 상징하고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롯유다가 예수를 배신하고 결국 자살합니다. 이에 초대교회는 한 사람의 사도를 추가로 택하여 세우게 됩니다. 이때 그들이 사도의 기준으로 세운 내용이 이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1:21–26 (NKRV)
21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사도의 조건은 첫째,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부터 죽으시고 승천하실 때 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사도가 해야할 중요한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22절에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공생에 기간 동안 항상 함께 있었고 부활하신 주님을 실제로 목격하였고 승천하실 때까지 함께 있었던 사람만이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해야 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택하신 자입니다. 제자들 무리 중에 12사도를 예수님께서 택하십니다. 그런데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를 세울 때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제비뽑기였습니다.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사용했던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제비 뽑힌 자가 주님이 택하신 자라로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님께 택하신바 되어”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행함과 가르침을 기록한 책 위에 세워졌습니다. 당시 많은 기록이 있었지만 성경으로 인정될 수 있는 기록, 즉 정경의 기준은 사도성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도라 함은 예수님의 공생에 동안에 항상 함께 있었고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격한 자들입니다. 그들 중에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자들만이 사도인 것입니다.
사도는 열두 사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자신들이 사도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교황이 사도직을 계승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개신교 쪽에서는 소위 신사도주위가 그렇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선택된 사역자들에게 초대교회 사도들에게 주셨던 신기한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하고 예언을 하기도 하며 직통계시를 받기도 합니다. 이들의 집회에 가보면 쓰러짐, 발작, 떨림의 현상이 있기도 하고, 계속해서 웃기도 하고 짐승의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하늘에게 금가루가 떨어지기도 하고 이빨이 금니로 변한다고 합니다.
한국의 몇몇 대형교회와 급진적 선교단체가 이것에 영향을 받아서 분별력 없는 성도들을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비한 능력이 나타난다고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당도 작두를 탑니다.
마태복음 24:24 (NKRV)
24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9–10 (NKRV)
9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따라서 모든 기적과 표적을 성령의 역사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권능과 능력이라 해도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극단적 신비주의적인 신사도 운동은 비성경적 형태로서 지극히 경계해야 할 대상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사도는 열두 사도로 끝난 것입니다. 더 이상의 사도는 없습니다. 교회는 그들이 남긴 기록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기록된 성경만이 사도적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교황이나 신비적 능력을 행사는 오늘날 사도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사도적 권위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 어떤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기록된 성경만을 신적권위로 인정합니다.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이 선택된 사도들에 의해 사복음서를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이후에는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내용을 또한 사도들에게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 내용인 사도행전 이후부터 진행됩니다.
이러한 기록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은 무엇에 대한 기록일까요?
누가복음 24:25–27 (NKRV)
25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엠마오로 두 제자가 가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그들은 동료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27절입니다. “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당시 모든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이 무엇을 말하는 가? 자기에 관한 것, 즉 예수님에 관하여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과 신약 성경 모두는 그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쓴 것이고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쓴 것입니다. 이 기록이 교회의 초석이고 기독교의 근간인 것입니다.
두 번째 살펴볼 내용은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기록은 성령님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이해되어지고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2절에 보니까 “성령으로 명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택함 받은 사도들조차도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행함과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의 성전청결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물건과 짐승 파는 자들을 내쫒으시고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며 노하신 것입니다. 이때 유대인들이 네가 이런 선지자와 같은 일을 하는데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세우겠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반발합니다.
당시 예수님이 이러한 행동과 이 말씀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곁에 있던 제자들 조차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깨닫게 되었는가? 요한은 이렇게 코멘트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21–22 (NKRV)
21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기 시작한 시점이 부활 후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는 말씀이 눈에 보이는 건물 성전이 아니라 성전된 자기 육체를 언급한 것과 헐라는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의미하고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것은 부활할 것임을 말씀한 것이죠. 이것을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 후 성령님을 통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19–21 (NKRV)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성경의 저자가 사람이지만 원저자는 성령님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각자의 은사와 사용하셔서 기록케 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원저자이시기 때문에 성령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 없이는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것이 성경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지혜와 계시의 영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야만 성경을 이해하고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말씀하셨고 그것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이 2천년을 흘러 우리 가운데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이 임하셔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지식 호기심을 이 책을 읽습니다. 어떤 이들은 윤리적 가르침을 얻기 위해 읽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화적 이야기로 이 책을 대합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성경을 읽을 때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이 2천전에 화석화 된 말씀이 아니라 오늘 살아있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들려지는 것입니다.
이 일을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2천년 사도들을 불러 성령으로 명하신 주님께서는 오늘날도 그분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까? 아브라함이 선하고 의롭기 때문인가? 아닙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릴 적 부터 아버지를 따라 우상 만드는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를 선택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많고 많은 민족 중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십니다. 왜 이스라엘일까? 그들이 선하고 의로운 민족이기 때문일까?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7:6–8 (NKRV)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택은 택함 받은 자의 어떠함에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 가운데 어떤 이들을 선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실 때 얼마나 좋은 가문의 여인들이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왕궁에서 조신하게 자란 여인이 아니라 낮고 천한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리아에게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바울과 같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자를 선택하셔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세웠을까? 바울에게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 가운데 그를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결과 이 자리에 있습니다. 왜 나일까? 내가 선하고 신실해서 일까?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6–31 (NKRV)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그의 자녀를 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 성령님은 임하여 계십니다. 그 분께서 우리를 기록된 말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하십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그 말씀이 역사하여 우리의 감추어진 죄를 들추어내고 회개의 자리로 인도하며, 상한 마음을 위로하고 회복시키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기록된 말씀위에 세워져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경험한 신비적 체험이나 신앙이 좋은 주변 분들의 말 위에 세워져 있습니까? 또는 감동받은 경건서적위에 세워져 있지는 않습니까?
누가는 말합니다. 예수께서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신 일을 기록하였노라
우리의 신앙이 말씀위에 세워질 때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르고 건강한 신앙은 기록된 성경 말씀위에 세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