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22. 교회가 힘과 권위를 얻다
사도행전 5:17-32
17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23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27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하나님은 정결한 교회 순결한 성도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께 도구로 쓰임 받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기쁨이며 그분의 역사를 체험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를 정결하게 하신 후 교회를 통하여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셨습니다. 사도들의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예루살렘 지역에 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복음 선포와 함께 질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쫒아냄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반대세력에 부딪혀 왔습니다.
은혜가 임하는 곳에는 악한 영도 함께 역사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들을 통해 일어났던 예루살렘의 부흥의 역사가 그것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어려움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권력이었습니다.
그들에 의해 사도들이 다시 투옥되고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신비적 방법으로 옥에 나와 다시 복음을 전하게 되고, 이때 종교권력은 또 다시 그들을 잡아 공회에 세워 심문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들을 붙잡아 옥에 가둡니다. 이들이 누구인지는 전에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공회원들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최고 권력기관입니다.
이들은 성전 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옥에 가두고 위협하여 놓아준 적이 있습니다. 이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베드로와 요한뿐만 아니라 사도들을 전부 붙잡아 옥에 가둡니다. 성경은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를 마음의 시기가 가득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사도들이 옥에 갇힌 이유가 당시 종교권력의 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범죄를 해서가 아니라는 것이죠.
예수님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종교권력에 의해 붙잡혀 고문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어떤 범죄행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종교권력의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가 무엇이기에 무죄한 사도들을 옥에 가둔 것일까요?
오늘은 이 부분에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 마음 가운데 시기는 이런 것입니다.
자신들의 입지와 영향력이 사도들로 인해 축소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입니다.
반면 사도들의 영향력은 강화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입김에 의해 주도되었던 사회적 흐름이 사도들로 인해 순식간에 뒤집혀 진 것입니다. 자신들의 지도력과 지배력은 점점 약화되는 반면 사도들은 권위는 계속해서 힘을 얻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정이던 직장이던 사회이던 그 집단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사회의 지배권 또는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은, 그의 계급이나 직함 등의 권력이 행사하는 힘과는 다릅니다.
권력이 행사하는 힘은 상부에서 하부로 하양식으로 명령하고 통제합니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비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억지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권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권위는 계급이 주는 권위도 직함이 주는 권위도 아닙니다.
그것은 탁월함과 순결함 등에서 나오는 권위입니다. 이들은 지배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주도권을 쥐려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들의 권위에 순종합니다.
정부의 계속되는 강력한 부동산 정책을 비웃듯 아파트값은 계속해서 치솟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집이 투기의 목적으로 이용 되서는 안 되니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 채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여러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강남의 집을 말입니다. 그러니 정부정책이 힘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가면,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권력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권위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권위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신뢰에서 형성됩니다. 사람들은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만큼 신뢰할 만한가에 따라 권위를 부여하고 그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합니다. 이때 형성되는 신뢰는 대상의 탁월성과 순결성을 바탕으로 합니다.
탁월해서만도 아닙니다. 그가 순결한 마음을 정의롭고 공정해야 합니다.
순결한 마음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그에게 탁월함이 없으면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탁월함과 순결함이 있는 사람들을 찾게 되고 그 사람에게 귄위를 실어줍니다. 사람들은 그를 의지하게 되고 그의 영향력 아래에서 안정감을 갖게 살게 됩니다.
예루살렘 공회는 권력을 쥐고 있었으나 권위를 상실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이 세운 정책이나 방향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탁월했을지는 모르지만 순결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기도, 금식, 구제, 예배 등의 온갖 종교의식과 경건의 모양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배하려고 했지 섬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유익은 챙기면서도 희생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순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탁월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예수가 되어 병자들의 몸에 손을 대고 고쳐 주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금기시되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당시 불결하게 취급되었던 문둥병자에게도 손을 대어 고쳐주었습니다. 귀신 들려 평생을 고통 속에 살던 자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자유케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을 한다고 누가 돈을 주는 것도 대접해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을 그러한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라는 명령에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하였고, 교회는 서로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채우며 살아갈 때, 교회는 자신의 땅과 집을 팔아 가난 한 자들을 도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의 순결한 삶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서서히 백성을 다스리는 힘과 권위가 종교권력에서 사도들에게로 넘어가고 된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부여된 권력은 없었지만 사회를 움직이는 권위를 소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은 예루살렘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고 사람들은 그러한 교회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축적하고 모으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섬기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보았던 것입니다.
주인과 종이 함께 모여 찬양하고 성찬에 참여하여는 평등한 공동체를 보게 된 것입니다. 평등했지만 그 속에는 질서와 권위가 살아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은 단지 사도들이 이적과 기사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들의 권위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삶 자체가 큰 감동을 준 것입니다. 성도들의 얼굴에는 빛이 났고 그들의 삶은 늘 생동감과 탄력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중에도 감사와 찬양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교회는 사회를 이끄는 권위를 소유하게 되었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종교권력자들에게 시기심을 갖게 한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당시 공회원들이 사도들을 강제로 연행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26절에 보면
26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미국의 경찰은 공권력을 부여 받았으나 그것을 잘못 행사함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찰들의 말이나 지시에 따르지 않는 미국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반명 오래전 흑인운동을 주도하였던 마틴루터 킹 목사는 권력은 없었지만 그의 말 한마디에 미국사회가 움직였습니다. 1963년 8월에 워싱턴 링컨 기념관에서 행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설교는 당시뿐만 아니리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흑인 차별에 맞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불평등한 제도를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했고 이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안타까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를 이끄는 권위와 힘을 소유했던 초대교회와는 달이 한국교회는 이제 사회의 커다란 짐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교회의 권위에 압도당하지 않습니다. 압도당하기는커녕 개독교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뿐입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누구를 비판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속적 가치관을 가지고 세속화 된 삶의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의 모습이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이나 도전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도 돈과 권력을 추구했고, 탐욕과 쾌락을 채우며 살았습니다.
한국교회는 권위를 상실한지 오래되었습니다. 누구도 교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회복해야 할 모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탁월함과 순결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 파송하시면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우리 청년들은 직장에서 일할 때 남들보다 탁월하게 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그 일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라는 소명의식으로 일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탁월해 지십시오. 탁월하지 못하다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성실히 일하십시오. 타고난 재능이 없다면 남들보다 시간을 더 쏟고 힘을 더 쏟아야 합니다. 게으름과 나태함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입니다. 남들만큼 못한다면 남들보다 더 성실하게 열심히는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동료에게 상사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하나님께도 인정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하고 하찮게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하면 탁월하게 해낼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인정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것이 성도로서 옳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순결함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 인격적인 성숙함, 사람을 향한 존중,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 이러한 모든 것들이 순결함이라는 단어에 녹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찾는 사람들도 이런 사람입니다.
이들은 어디를 가나 권위를 가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이 땅에서 힘이나 권력을 부여 받지 못해도 권위를 가지고 사회나 조직을 움직이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과 당시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그 권위를 인정 받을 수 있었던 그들의 신앙적 태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공회에 끌려간 사도들이 대제사장과 공회원들 앞에서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지지 말라고 엄하게 명했는데 왜 계속해서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느냐고 하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29절에 보면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은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있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코람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신전의식을 말합니다. 삶의 그 기준과 목표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종교권력의 최고수장인 대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귄위 아래입니다.
우리가 항상 의식하고 순종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시고 그 분의 권위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그 귄위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부의 권위이던 공권력의 권위이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13장에서 “각 사람은 위의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입니다.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가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나 만일 그 권세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면 성도들은 마땅히 불복종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최고 권위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신실한 성도들은 신사참배의 강요에 불복종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기독교학교는 폐교되었고 목사들은 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우리의 최고 권위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이 성도들을 탁월하게 하고 순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사랑의 수준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죠. 마태복음 산산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그것이 무슨 사랑이냐?고 하시죠. 그러면서 너희를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 위해 기도하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사랑의 수준입니다.
이 말씀 앞에 자신의 사랑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행함의 기준 그리고 도달해야할 지향점이 하나님의 온전함이 때문에 이것을 의식하고 또 추구하고 살아가게 되면 우리의 모습은 점점 탁월해 지고 또 순결해 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들이 당시 종교권력에 의해 핍박받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시기심의 이유가 무엇인지 심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권력이 아닌 권위를 추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 탁월함과 순결함을 나타내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의 자세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도구들로 세워지길 축원드립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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