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07-22 12:48

23.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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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23.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

 

사도행전 5:33-42
33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34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35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36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38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40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이제 사도들은 산헤드린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습니다. 그들은 권위적인 분위기에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강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지난 밤 그들은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천사들의 손길을 통해 신비적 방법으로 출옥한 그들은 곧장 성전에 가서 복음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당시 사도들의 권위는 종교권력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보여주었던 삶의 진실성과 거룩성 그리고 탁월함과 순결함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질병을 치유하고 귀신이 떠나가고 가난과 빈곤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권능과 성도들의 겸손한 순종을 통해 예루살렘 사회를 변혁시키기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종교권력자들은 사도들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사도들이 산헤드린공회에서 심문을 받는 장면입니다. 공회는 이 전에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못하게 결정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결정을 어기고 복음을 전하자 다시금 붙잡아 온 것입니다.

본문의 나타난 공회의 분위기는 그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33절에 보면,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공회는 사도들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만큼 분개했던 것입니다.
산헤드린공회는 당시 엘리트 사두개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나름 지성을 갖춘 그들이 이렇게 까지 흥분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사도들이 무슨 죄를 범했기에 이토록 분개한 것입니까? 바로 이 대목에서입니다.


대제사장이 묻습니다. 28절에 사도행전 5:28
28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이에 대한 사도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5:29–32
29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이 말을 듣자 마다 그들이 분개한 것입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 그가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라는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아 죽인 예수라는 말 대신 ‘나무에 달아 죽였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말이 그들을 자극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베드로가 첫 번째 공회앞에서 심문 받을 때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그때는 십자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공회에서는 나무라고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라고 했을 때 그는 신명기의 말씀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공회원들도 그 의미를 너무나 정확하게 알았던 것입니다. 그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신명기 21:22–23
22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죽은 죄를 지은 자를 처벌할 때 나무에 달아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를 당일 땅에 장사하라고 명하십니다. 왜냐하면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를 계속 매달아 놓음으로 거룩한 땅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 정부가 결탁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로마가 고안한 사형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즉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뭐라고 증거합니까? 그 저주받은 예수가 바로 우리의 메시아 곧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결국 당시 종교권력은 구원자를 나무에 달아 죽인 장본인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71명의 공회원들 앞에서 주저함 없이 담대하게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회의장은 흥분한 공회원들로 인해 소란스러워 졌습니다. 그들은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상황을 중재한 것은 가말리엘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율법교사로 백성에게 존경받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당시 가장 탁월했던 율법 학자이며 그의 인품이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었기에 존경받던 선생이었습니다. 바울이 나중에 자신을 소개할 때 가말리엘 밑에서 수학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일단 사도들을 밖으로 나가게 합니다. 그리고 공회원들에게 이러한 말을 합니다.


주전 4년에 있었던 두 개의 실패한 메시아 운동을 언급합니다. 첫 번째는 드다라는 자칭 메시아가 일어났을 때 400명의 추종자들이 따랐지만 결국 로마에 의해 사형에 처해지고 그의 추종자들은 모두 흩어졌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례는 갈릴리의 유다가 아켈라오의 장세조치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메시아 운동을 펼쳤고 그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 사형에 처해지고 그의 추종자들도 다 흩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도 이와 같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5:38–39
38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탁월한 율법학자 답게 그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갑니다.
그의 이 말에 격분했던 공회원들이 흥분을 가라앉혔습니다. 너무나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들어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가말리엘은 사도들의 편이 아닙니다. 그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신중하게 판단한 것입니다.

사도들의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났으면 무너뜨릴 수 없다. 이 말은 지금까지도 진리입니다.
결국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하고 풀려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두 번째 공적재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가말리엘의 합리적 판단이후에 2천년이 흘렀습니다.
이 날까지 기독교는 건재할 뿐만 아니라 폭발적인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독교는 사람이 만든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심


역사 가운데 기독교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성이 개발되고 과학이 발전하면 결국 기독교는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진화론자인 리차드 도킨슨은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써서 기독교의 사상과 소행은 사람이 만든 것임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기독교는 건재하고 부흥합니다.


2천년 사도들의 핍박으로부터 지금까지도 기독교는 끊임없는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건재한 것은 사람이 만든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말리엘의 합리적 판단처럼, 만일 기독교가 하나님이 시작하셨다면 이것에 거스르는 것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지금껏 수많은 종교가 발생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사람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들도 많았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라졌습니다. 사람에게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천지 이만희는 자신이 신적존재인 보혜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만희는 죽을 것이고 신천지 종교도 사라질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죽었고 그의 부활을 증거했던 사도들도 죽었지만 기독교 신앙은 여전히 살아서 역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습니다.
2천 년 전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아 죽은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습니다.
예수는 저주를 받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저주는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은 것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2천년 기독교 신앙이 법정에 섰습니다. 그때 내려진 선고는 지금까지도 유효합니다.
사람에게서 났으면 사라질 것이지만, 하나님에게서 났으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들이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을 믿는다면,
베드로의 증언에 다시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반복하여 증언한 것이 이것입니다.
나무에 달아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오른손을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오직 기독교만 죄사함의 길이 있다

30절과 31절입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31절에 회개함입니다. 회개함으로 죄사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께서 나무엘 달려 저주를 받으신 이유는 우리를 죄사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죄사함 받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2천 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나의 죄를 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사건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산처럼 높이 쌓여있는 나의 죄를 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눈물이 핏물방울이 될 때까지 기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기도합니다. 여기서 잔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의미합니다. 이 잔은 저주이며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한번 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던 성자 예수께서 아버지께 눈물로 호소한 것이 아버지에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고, 예수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마지막 죽음의 순간 외친 하늘을 향해 외친 것이 무엇입니까?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저주를 당하셨습니다.

예수가 받은 진노와 저주는 내가 하나님께 받아야 할 죗값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그 죄를 사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창세전이 이미 작정한 구원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땅에 태어나는 많고 많은 세대들 가운데 그의 자녀들을 택정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사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선포될 때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눈물로 참회하며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회개한 자들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십니다.
너희 죄가 주홍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사1:18).
이것은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8:1)고 선포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이 은혜의 복음을 자신들만 간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일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투옥되어 있을 때 천사를 통해 신비적 방법으로 꺼내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5:19–20
19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사명이 있는 한 주님은 그 생명을 지키십니다. 이 사명이 다할 때까지 그들의 삶을 강권적으로 간섭하십니다. 사도들은 알았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자신들을 가두지만 하나님의 복음은 가둘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자신들이 도구들로 쓰임받고 있다는 감격과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핍박과 고난을 극복한다

사도행전 5:40–41 (NKRV)
40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은 복음 때문에 채찍질을 당하고 고문당하는 것을 오히려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육신은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자유 하였습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한 번도 이 땅에서의 부요함이나 육신의 건강을 보장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음을 말합니다.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해야할 때가 있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아도 희생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가 많음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길을 예수께서는 이렇게 요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4
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 의지, 내 소망, 내 주장을 꺾고 이제는 주님께서 내 안에 살아 계셔서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 주님 기뻐하시는 말을 하며,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을 섬기며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에 고난이 없지 않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는 능욕과 조롱과 비난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내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공회 앞을 떠나는 사도들의 몸은 채찍에 맞아 망신창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빛이 났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한 가지 동일한 생각으로 뜨거워졌습니다. 그것은 우리 삶에 이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지라도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파해야지.
십자가라는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 내 앞에 있을지라도 이 복음을 담대히 전파해야지.
42절입니다.
사도행전 5:42
42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그 어떤 절망에서도 우리를 일으켜 세워 기쁨을 누리게 함에 있습니다. 능욕과 조롱과 압제와 핍박이 아무리 거세도 성도의 신앙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의 확신 때문입니다.
사도들에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평화가 그들의 삶을 압도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의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냉혹한 현실속에서도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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